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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74화 (7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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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류를 제출하는 것까지 같이하려고 했는데 카나린이 거부했다. 아마도 자신과 엮여서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녀 나름의 배려였기에 여기선 내가 물러섰다.

“네.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 여기 있을게요.”

카나린이 법무부 사무실로 들어가자 나 혼자 복도에 덩그러니 서 있기 애매해서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세르니아 누님?”

“어?”

잘 아는 목소리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시리우스나 헬리오스는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우연히 만난 사람은 예상치도 못한 그렌드윈이었다.

“역시 세르니아 누님이셨군요! 누가 복도를 수상쩍게 어슬렁거린다는 신고를 받고 왔는데 머리 색을 보고 바로 알아봤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이 십니까?”

“신고? 나는 친구가…… 볼일이 있어서. 너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그렇게 수상하게 어슬렁거렸나.

카나린이 신분 포기 청원서를 내러 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주제를 돌리기 위해 그렌드윈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으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아카데미 졸업하고 황실기사단에 부단장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렇겠지.

그가 입고 있는 옷은 황실기사단의 제복이었으니. 이야, 교복보다 제복이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널찍한 어깨와 역삼각형 상체! 제복으로 가릴 수 없는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절대 제복에 대한 사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제복이 잘 어울린다!”

“감사합니다.”

그렌드윈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표정한 얼굴 위에 희미하게 부끄러운 감정이 드러났다. 어쩐지 그렌드윈을 보고 있으니 공작이 생각났다. 외형이나 분위기는 정반대였으나 감정 표현이 서툰 점이 묘하게 닮아서일까.

“졸업하자마자 부단장이라니 대단하네.”

내가 그의 어깨를 치며 칭찬해주자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짜식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렌드윈이 갑자기 허리를 숙여서 고개를 내게 들이댔다. 뭐 하는 걸까?

“뭐 하는 거야?”

생각과 말이 동시에 나갔다.

너무 당황해서. 햇살을 받아서 별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그렌드윈의 금발이 내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머리…… 쓰다듬어 주시지 않는 건가요?”

“어, 음…… 왜?”

진심으로 이해를 못 해서 물었는데 그렌드윈이 고개를 들고 흔들리는 동공으로 내게 물었다.

“엘을 칭찬하실 때는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잖아요.”

“으응, 그게…… 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다가 그제야 그렌드윈의 행동을 이해했다.

칭찬받을 짓 했으니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건가. 일단 해달라기에 손을 얹어서 에리얼을 쓰다듬듯이 쓰다듬었으나 느낌은 전혀 달랐다. 190cm가 넘는 거구의 남정네가 덩치만 커다란 개처럼 보였다.

‘이야, 나보다 머릿결 좋은 거 같은데. 나중에 벨에게 머리 뭐로 감는지 물어봐야겠다.’

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무념무상으로 머리를 쓰다듬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그렌드윈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약간 상기된 건 쑥스러워서겠지.

“감사합니다. 누가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건 처음이라 부끄럽네요.”

그렌드윈의 말에 태클을 걸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으나 꾹 참았다.

누가 덩치가 산만 한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겠는가. 나도 약간 망설였는데. 거기다 마치 내가 먼저 쓰다듬고 싶다고 말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그렌드윈이었다.

“그래. 나중에 또 칭찬받고 싶으면 말해.”

그래도 나쁜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칭찬받고 싶은 것뿐이라서 별말 하지 않았다.

‘에리얼이 칭찬받는 모습이 부러웠나 보네.’

나야 어릴 적부터 자주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끌어안으며 칭찬을 했기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귀족 사이에서 그런 애정표현은 잘 하지 않는다. 팔불출인 그렌드윈도 벨라를 보물 다루듯이 소중하게 대하나 스킨십이 잦은 편은 아니었다.

“네. 친구분의 볼일이 오래 걸리나 보군요.”

그렌드윈과 대화한다고 잠시 잊고 있었는데 카나린이 도통 나올 기색이 없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확인절차만 거치면 승인은 빨리 된다고 했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도 아니면 안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렌드윈이 말을 걸었다.

“저쪽에 벤치가 있는데 앉아서 기다리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

우선 그렌드윈이 가리킨 곳으로 이동했다.

안에 일이 밀려있어서 카나린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들어간 지 꽤 됐으니 곧 나올 거 같기도 했고. 괜히 들어갔다가 마무리하고 나오려던 카나린과 마주치면 자신이 그렇게도 못미더웠냐고 시무룩해 할 것 같았기에.

법무부는 본궁 1층 동쪽 끝방에 있었는데 근처에 작은 연못으로 후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겨울이라 공기는 차가웠으나 오늘은 햇빛이 쨍쨍해서 춥다는 느낌은 없었다. 적당한 서늘함!

“너는 왜 앉아?”

한껏 햇볕을 쬐며 광합성을 하고 있는데 그렌드윈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는 지금 근무 중이라서 내게 벤치가 있는 곳만 알려주고 당연히 일하러 돌아갈 줄 알았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제가 지켜드려야죠.”

황궁에 이상한 사람이요?

그냥 땡땡이친다고 하지. 변명도 참 못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장이나 돼서 근무시간에 놀면 안 된다고 잔소리하고 싶지도 않았고, 솔직히 그의 근무태도는 나와 상관없었으니.

‘시리우스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황궁에 오면 헬리오스나 그렌드윈을 만날 가능성이 더 컸었네.’

시리우스는 궁에 갇혀 지내니까.

그런데 소문은 왜 그렇게나 빠르게 퍼진 거지? 궁에 시종도 없으니 더 조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리우스의 소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르니아 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기억 속에도 수첩 속에도 없던 사람. 시녀처럼 보이는데 황궁의 시녀가 대체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부르는 걸까.

“저는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 수잔이라고 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세르니아 님을 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인물을 듣고 얼음처럼 굳었다.

황후라니. 황궁이니 황후가 있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그 사람이 어째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초대한 걸까.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수잔을 쳐다봤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황후 폐하가 기다리고 계시니 빨리 가시지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거절 권한 따위 애초에 없다는 건가.’

아카데미 테러 사건 이후 독자적으로 황후를 조사해보려고 했으나 무리였다. 공작에게도 말하려 했지만 검성이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못 박았기에 그에게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황후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곤란하다.’

아직 그녀에 관한 증거도 찾지 못했을 텐데 찍히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으나 나는 재촉하는 시녀를 따라 일어섰다.

“저도 가겠습니다.”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그렌드윈도 일어나며 나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렌드윈이라도 함께 가면 든든하지. 1 대 1보다는 2 대 1이 편하니까.

“안 됩니다. 황후 폐하께서 세르니아 님만 데려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세르니아 님은 저와 선약이 있었습니다. 예정에도 없던 초대 때문에 선약을 미뤄야 한다면 동행 정도는 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황실기사단 부단장입니다. 황후궁에 방문할 자격도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오, 아까 전만 해도 허술한 변명을 내뱉던 그렌드윈이 완벽한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내 안에 있던 그렌드윈의 허당 이미지가 조금 수그러졌다. 그의 핑계가 너무 적당해서 내심 같이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황후의 시녀는 단호했다.

“저는 황후 폐하의 명령만 따를 뿐입니다.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 오늘 선약을 미룬 것에 대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지금 보상이 문제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큰소리를 내려던 그렌드윈을 말렸다.

수잔의 태도를 보아하니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사람 같았다.

내가 가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 데려갈 것 같은 느낌! 여기선 수잔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렌드윈, 벨라를 도와줬을 때 네가 내 부탁 들어준다고 했던 거 기억나?”

“……네”

그렌드윈은 내가 하려는 부탁을 알아차렸는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직 입도 안 열었는데. 마지못해 대답을 한 그렌드윈의 미간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가 나를 걱정해서 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카나가 나오면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공작가로 돌아가라고 전해줄래?”

“알겠습니다.”

나는 그렌드윈의 어깨를 치며 작게 속삭였다. 괜찮다고.

그렌드윈의 미간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끝까지 따라오겠다고 우기진 않았다.

“안내하겠습니다.”

법무부에서 나오지 않았던 카나린이 조금 걱정되긴 했으나 그렌드윈에게 부탁해놨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겠지. 나는 호랑이굴로 끌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황후가 나를 왜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설마 황궁에서 죽이기야 하겠는가.

최악의 상황은 내가 금제에 걸리거나 저주에 걸리는 것. 그것만 피하면 오히려 내게 기회일 수도 있었다. 황후의 존재가 워낙 베일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조사하기 힘들었었다. 그녀는 사교 모임도 거의 나가지 않았고 행사에도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있었다.

‘대체 어떤 경로로 친해진 걸까.’

트룩 후작가의 차남만이 아니었다.

마치 거미줄이 제국을 촘촘히 덮은 것처럼 그녀의 인맥은 곳곳에 퍼져있었다.

‘아라네아.’

복면인이 소속돼 있었던 조직의 이름.

황후가 지었을 법한 이름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거미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제국이라는 먹잇감에 거미줄을 칭칭 감고 잡아먹을 시기를 재고 있는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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