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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습니다.”
황후에 대한 정리를 하고 있는 사이 황후궁에 도착했다.
궁은 예상외로 삭막했다. 좀 더 사치를 부리거나 화려한 것을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였으나 정원은 최소한의 겉치레만 해놓았다. 황궁 정원에 빠짐없이 배치되어있던 조각상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거나 희귀한 꽃들도 없었다.
“제국의 보배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보통은 겨울에는 마른 나뭇가지를 흉하다고 여기는 귀족들이 많아 온실에서 티타임을 가진다. 그러나 그녀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안 그래도 삭막한 정원이 더 삭막해 보였다.
“세르니아 양 어서 오세요. 무례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례한 건 아는구나.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싱긋 웃었다.
황후는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반겼다. 부드러운 얼굴이 마치 봄 햇살 같아서 그녀의 꿍꿍이를 몰랐다면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바보처럼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말씀을 편히 낮추어 주십시오.”
“아니요. 저는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으니 불편함을 느끼지 말아주세요.”
존대를 쓰는 황후라니. 꺼림칙했으나 나는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황후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떠한 말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의 허락이 떨어져야 앉을 수 있다. 나는 민망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어머, 세르니아 양이 너무 예뻐서 앉으라고 말하는 걸 깜빡했네요.”
거짓말을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군.
단순히 기죽이기 위해 나를 세워 둔 걸까? 아니면 금제나 저주를 걸기 위한 사전작업이었을까. 어쨌든 방심은 금물! 황후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으며 화답했다. 입술에 침을 바르고.
“아닙니다. 저도 황후님의 아름다우신 미모에 흠뻑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는걸요.”
“그런 말 많이 듣는답니다.”
아, 네. 그러시구나.
과하게 아부를 했으나 황후는 부채를 팔랑거리며 능청스럽게 넘겼다. 헬리오스의 능글맞음은 그녀에게서 비롯된 걸까.
“세르니아 양을 만나고 싶었답니다.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네.”
그녀의 한마디에 수잔이 의자를 빼줬다.
나와 만나고 싶었다니. 내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고민하고 있자 테이블에 먹음직스러운 디저트와 따뜻한 홍차가 나왔다.
‘식은 건 아니네.’
사교계에서는 싫어하는 상대를 고상하게 물 먹이기 위해 식은 홍차나 딱딱해진 파이를 대접한다고 하던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내가 홍차에 신경이 팔린 사이 황후가 우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궁금했습니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 제 이야기를 하셨나요?”
생각해보니 테러 사건이 마무리되고 그에게 나에 관한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설마 황후에게 내가 테러 사건을 해결했다고 이야기한 건가. 그건 곤란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단어조차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나는 행동과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황후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는데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머릿속에서 흐릿한 영상이 일렁거렸다.
‘데이지 양의 활약으로 테러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칭찬이었습니다.’
알고 있는 장면이었다.
원작에서 데이지와 황후의 첫 만남에서 나왔던 대사였다.
‘아직 황후와 만나는 꿈은 꾸지 않았는데.’
그 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데이지의 꿈을 계속 꾸고 있었으나 제일 마지막에 꾼 꿈은 마탑에 들어간 데이지가 헬리오스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부분이었다. 어째서 아직 꿈에도 나오지 않은 장면이?
“세르니아 양의 활약으로 테러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칭찬이었습니다.”
찻잔을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장면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가 데이지의 시선으로 꿈을 꾼 것처럼.
‘이 기묘한 기시감은 뭐지.’
허공에서 멈췄던 손을 자연스럽게 내려 무릎 위에 올렸다. 놀라서 한 박자 늦었으나 나는 호들갑스럽게 겸손을 떨었다. 마치 쑥스러워서 대답을 못 한 것처럼 보이도록.
“아닙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루카리온 선생님이 전부 해결하셨습니다.”
순진무구한 미소를 띄웠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웃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맹렬하게 돌아갔다. 대체 헬리오스는 어디까지 말했을까. 내 활약으로 사건이 해결됐다고 말했다는 건 내가 공작의 추천을 받고 테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 아카데미 선생님이 됐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리라.
“마땅히 드러내야 할 업적인데 사건 자체를 내부에서 덮어버려서 세르니아의 공이 사라진 것이 아쉽습니다.”
“괜찮습니다. 업적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외부로 드러냈을 때 불러올 파장보다는 제국의 안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 겸손하셔라.”
나는 황후의 칭찬에 몸들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연기했으나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손에선 축축한 식은땀이 흘렀다.
‘왜 이렇게 사탕발림을 하는 거야?’
황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나를 시험하는 건가?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나와는 달리 정작 황후는 수잔에게 다과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잔을 포함한 시녀들이 준비한 디저트와 홍차를 테이블에 세팅했다.
“급히 초대한다고 제대로 준비는 못 했으나 주방장이 직접 만든 몽블랑은 굉장히 맛있답니다.”
먹음직스러운 몽블랑 케이크를 보자 홀린 듯이 포크를 집어 들려고 했다. 잠깐! 황후가 맛보라고 권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 내가 여기 디저트를 먹으러 온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케이크 안에 무슨 장난을 쳐놨을지 몰랐다.
‘먹으면 저주에 걸리는 빵이나 홍차일 수도 있잖아.’
백설공주의 사과처럼. 생각이 그까지 미치자 식욕이 뚝 떨어졌다.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황후에게 말했다.
“하필 오늘 아침을 너무 과하게 먹어서 케이크는 도저히 안 들어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홍차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런, 무리하지 말아요. 케이크는 다음에 놀러 와서 맛봐도 되니까요.”
다음에 또 와야 하는 건가.
말은 그렇게 했으나 황후의 시선은 찻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른 홍차를 마시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찻잔을 들어 입에 가까이 댔다. 입술만 축여야지.
‘티 나지 않게 홍차 마시는 척하며 침 삼키고.’
그녀의 집요한 시선이 내 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침을 두어 번 삼키고 천연덕스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황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뭐야 목적이 정말 다과를 먹이는 거였나? 여기에 뭔가 걸려 있는 거야?’
나는 맑은 다홍빛을 내는 홍차를 봤다.
혹시나 해서 준비된 설탕을 하나 넣고 은수저로 휘휘 저었으나 은수저는 멀쩡했다. 독약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냥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걸까.’
단순하게 헬리오스와 대화하고 내게 관심이 생겨서 초대했는데 내가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세르니아 양은 전 아르덴타인 공작의 자식이었죠.”
잔을 잡고 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테러 사건에서 갑자기 전 공작의 자식으로 넘어가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서였다. 나는 일단 그녀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네.”
“부모님의 죽음은 정말 유감입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아르덴타인을 이었을 텐데.”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걸까. 생각해. 분명 숨은 의도가 있으리라. 나는 눈을 내리깔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황후가 원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죠.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내가 그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말끝을 흐림으로써 뒤에 이어질 말은 황후 마음대로 생각하는 효과를 노린 것!
‘내가 쌍둥이의 자리를 욕심낸다고 생각하는 건가.’
돌려 말하긴 했으나 그녀의 말은 ‘부모님이 살아 있었다면 네가 아르덴타인 공작을 이을 수 있었는데 안됐네.’라는 뉘앙스였다.
“세르니아 양의 마음을 이해해요.”
“네?”
황후가 내 마음을 이해한다니. 대화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 속에 빠지는 이 느낌은 뭘까. 당황한 표정을 갈무리하고 있자 황후가 찻잔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부모님 없이 자라는 외로움, 누려야 할 것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슬픔을요.”
“황후 폐하께서요?”
따뜻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를 통해 느껴졌다.
‘아, 개수작이구나.’
드디어 황후의 본심이 나타났다. 아주 일부지만.
좋게 포장했으나 결국은 ‘공작가를 되찾고 싶지 않니? 원래 네 거였잖아’ 하고 맛있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저도 비슷한 아픔을 알고 있으니까요.”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이 세계에 오직 자신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호소하는 얼굴로. 내가 원작을 알고, 테러 사건부터 황후를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순진하게 넘어갈 정도였다.
“그런…… 황후 폐하께서는 어떤 아픔이 있나요?”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속고 속이는 게임의 시작이었다. 나는 한껏 감동받은 얼굴로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저는 브릴리언 왕녀로 태어났으나 언제나 오라버니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왕위를 이을 오라버니만 신경 썼습니다. 저를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나는 공감 간다는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방치시키던 부모님은 성인이 되자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아슬란데 황제 폐하와 국혼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오라버니보다 더 똑똑하고 브릴리언 왕국을 잘 이끌 수 있는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습니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겨우 폈다.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를 회유하기 위해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했다.
‘뭔가 걸리는데.’
분위기상 황후의 과거가 거짓말 같진 않았다. 그런데 뭔가 걸렸다. 본능적인 거부감. 테러 사건 때처럼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지금의 생활도 만족합니다. 제 나름대로 황후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의무를 다하려고 하고 있죠.”
“그렇군요. 저도 황후 폐하의 마음이 이해 가요. 거기다 원치 않은 결혼이었음에도 의무를 다하는 모습까지 너무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