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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세르니아 양이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었습니다.”
우선 그녀가 좋아할 법한 맞장구를 쳤는데 마주 본 붉은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음습함이 흘러나왔다. 건국제 때 황후를 보고 느꼈던 감정. 먹이를 바라보는 뱀의 눈이었다.
‘뭐야. 몸이 안 움직여.’
방심한 건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메두사의 눈을 보고 돌이 된 것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고정된 시선은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서 뗄 수 없었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시녀들과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는 삭막한 정원은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나름 경계했다고 생각했는데.’
황후에게 벗어나기 위해 손가락이나 목에 힘을 줬으나 소용없었다.
정지된 풍경 속에서 그녀의 오른손이 내 머리를 향해 다가왔다.
‘금제를 거는 건가?’
드란과 레베카가 걸렸던 금제가 머리에서부터 터졌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단순히 다과나 먹고 이야기나 하려고 나를 불렀을 리가 없지.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 순간부터 나는 방심했던 걸지도.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다더니.’
무슨 금제를 걸려고 하는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이해한다거나 자신의 아픔을 꺼낸 것은 틈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나. 애초에 내게 금제를 걸어서 황후가 얻게 될 이익이 뭘까. 아니면 영혼에 금제를 걸어 의지를 조종할 수 있는 걸까. 별의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르니아 님.”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
허스키한 저음이 정원에 울려 퍼지자 멈췄던 공기가 흘렀다. 얼어붙었던 몸도 움직여졌다. 딱딱하게 굳었던 고개를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렸다.
“시리우스.”
그는 언제나 가장 위험한 순간에 찾아온다.
마치 흑기사처럼.
“어머, 시리우스 저주가 풀렸다는 소문은 진짜였군요. 축하해요. 최근 저주가 풀리고 바쁘다고 하던데 어쩐 일로 제 궁까지 찾아온 건가요?”
“세르니아 님과 선약이 있어서 데리러 왔습니다.”
황후는 뻔뻔하게 손을 놓으며 부채를 폈고, 시리우스는 내게 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세르니아 양, 점심때는 그렌드윈과 약속이 있다고 했지 않았나요?”
아니, 수잔 씨 그건 대체 언제 말했데요?
전달하는 거 못 봤는데. 내 시선이 잠시 수잔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에.
“제가 원래 한 번 외출했을 때 몰아서 약속을 잡아요.”
집순이라서.
순간적으로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 그렌드윈 보고 변명 못 한다고 했던 거 반성해라.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머뭇거리는 것보단 나으니까.’
어이없는 변명이더라도 타이밍을 놓치는 것보다 낫다고 합리화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인물이 또 등장했다. 황궁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다 만나는 기분이었다.
“어머님!”
“헬리오스, 연락도 없이 오다니. 별일이네요.”
그녀는 부채를 느긋하게 팔랑거리며 온화하게 말했으나 붉은 눈동자가 게슴츠레해졌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이 찬 헬리오스는 시리우스가 여기에 있을 거라 예상 못 했는지 놀란 얼굴을 했다.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오늘 제 궁에 꽃향기가 풍기나 봅니다. 이렇게 보기 힘든 인물들이 모두 모인 것을 보니.”
황후가 던진 농담에 웃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눈치 게임도 아니고. 결국 내가 나서서 상황 정리를 하려는데 호흡을 가다듬은 헬리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리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블레닌의 밤 행사 준비로 의논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 급히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블레닌의 밤’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시기에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다. 마탑에서 마법사를 초청해 봄을 부르는 의식을 치르고 태양의 신 후손인 황제가 어둠을 물리치고 태양이 더 오래 떠 있도록 만드는 날이라고 한다.
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낮이 길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황족을 신성화하기 위한 것이겠지.
“저희가 있어봤자 방해밖에 안 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헬리오스가 황후를 붙잡자 시리우스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의외로 황후는 쉽게 우리를 보내줬다.
“그래요. 세르니아 양 다음에 또 봐요.”
“오늘 초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나는 예의상 감사 인사를 하고 겨우 황후궁에서 탈출했다.
궁을 나오자 긴장이 풀렸다. 안도의 숨을 뱉으며 걷고 있었는데 가는 방향이 영 이상했다. 시리우스가 이끄는 길은 본궁과 반대 방향이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아마도 시리우스의 궁. 직접 걸어서 간 것은 예전에 딱 한 번뿐이었으나 유독 정리가 안 된 길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제 궁으로요.”
혹시나 싶어서 물었는데 역시나였다.
따라가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시리우스의 궁에 가면 그날 밤이 떠올라 민망할 거 같아서. 그러고 보니 한동안 연락도 안 됐던 사실이 생각나 걸음을 멈추고 그를 추궁했다.
“일주일 동안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걱정하셨습니까?”
사과부터 할 줄 알았는데, 시리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뭔가 위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내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걱정했다는데 왜 그렇게 웃어?”
“세르니아 님이 제 생각을 했다는 것이 기뻐서요.”
말없이 잠수 타면 걱정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핀잔을 주자 시리우스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한층 짙어진 미소를 띠고.
“제가 보고 싶었습니까?”
황궁으로 오는 길, 마차 벽에 머리를 박았던 통증이 떠올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한번 쓰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요. 저는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일주일이 일 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저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도 재주였다.
말을 마친 시리우스는 내가 문지른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가 다가와도 스킨십을 할 거라 생각 못 했기에 방심하고 있었다.
“잠, 잠깐. 허락 맡고 만지기로 약속했잖아!”
가벼운 버드키스였으나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하필 보고 싶었는지 물은 뒤 이마에 키스를 하다니. 무의식중에 했던 생각을 모조리 읽힌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러웠다.
‘아니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좁쌀만 한 기대를 한 것뿐.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찰싹 때렸다. 시리우스의 입술이 떨어진 그 자리에. 찰싹거리는 소리가 한적한 오솔길에 울려 퍼졌지만 나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더욱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웠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어서 입술을 잘근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세르니아 님 허락 없이 키스해서 기분 나쁘셨나요?”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시리우스가 허리를 숙여서 시선을 맞추려고 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린 표정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해 보였으나 혹시라도 붉어진 내 얼굴을 들킬까 봐 등을 홱 하고 돌렸다.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당연히 시리우스가 알아차릴 거라는 생각을 뒤늦게 하며 후회했지만.
‘나 지금 부끄러워서 네 얼굴 못 보겠다. 하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그러나 등 뒤에 있던 시리우스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뭐지? 평소의 시리우스라면 내가 물러서면 쫓아와서 죄송하다고 할 건데. 나는 불안감에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시리우……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내 예상대로 나를 지그시 보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다만 그의 표정이 너무 낯설었다. 저주 때문에 감정이 없어서 짓던 빈껍데기 같은 무표정과 달랐다.
‘무서워.’
알 수 없는 공포감이었다.
지하실에서 봤던 검은 기운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한 감정들을 무표정이란 가면 밑에 억지로 밀어 넣은 느낌.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심해처럼 깊고 깊은 어둠을 본 기분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꺼낼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시리우스가 내 부름에 대답했다.
“네. 세르니아 님.”
무표정이 깨지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말간 웃음을 머금은 채.
내가 헛것을 봤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표정 변화의 간극이 너무 커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뭐했어?”
본능이 가면 밑에 숨긴 어둠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나는 결국 대화 주제를 돌렸다.
“취업했습니다.”
명쾌하게 답한 시리우스 때문에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혔다. 더군다나 취업이라니. 뜬금없는 단어에 장난치는 건가 싶었는데 짓궂은 그의 미소를 보자 잊고 있던 잠꼬대가 떠올랐다.
“세르니아 님께서 결혼하려면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기에.”
이불킥 예약이었다.
그날따라 묘하게 결혼에 집착하더라. 다음부터 반드시 생각하고 입 밖으로 뱉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시리우스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 결혼은 안 할 거라고.
“설마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요?”
바짝 다가온 시리우스가 스산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오늘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영하로 온도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꺼림칙한 무표정보다 째려보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부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결혼할 생각 자체가 없어서!”
“그런 건가요.”
날카롭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왜 내가 시리우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키고 시리우스의 관심사를 결혼에서 떼 놓으려는 시도를 했다.
“것보다 취업이라니, 대체 어디에?”
“마탑에요.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으나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다음부터는 연락하고.”
“네. 세르니아 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일이 생겨도 무조건 연락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걱정한 건 아닌데. 그렇지만 앞에 계속 연락 안 되는 것을 들먹였기 때문에 부정 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