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77화 (7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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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쨌든 황후궁에서도 무사히 탈출했고, 얼른 공작가로 돌아가서 카나린에게 일은 잘됐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시리우스에게 본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벌써 사라졌네요.”

시리우스의 하얗고 길쭉한 검지가 내 쇄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어를 생략한 말이었으나 손가락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노골적이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누구는 자국이 사라질 때까지 시녀도 다 물리고 혼자 씻었는데!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던 일주일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얼마나 빨리 사라지길 기도했는지 알아?”

아, 실수했다.

그의 입꼬리가 떨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감상한 소감이었다.

“기도까지 하셨습니까?”

“아니 그게…….”

유순하게 웃고 있던 시리우스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은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황급히 아니라고 말하려 했으나 떨어진 입꼬리를 다시 올리며 내게 다가오는 시리우스 때문에 더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싫으셨습니까.”

어딘가 비틀린 미소를 머금은 그는 질문조차 아닌 문장을 뱉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괜히 그를 더 자극할까 봐 꾹 참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저도 처음이라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는걸.”

매우 정중한 말투였으나 그의 태도는 정중함과 거리가 멀었다.

지척으로 다가온 시리우스는 내 손목을 잡았다. 아주 가볍게. 내가 손쉽게 뺄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뭐?”

내 청각을 의심했다.

‘한 번 더’라니. 무엇을? 섹스를요? 여기서요?

시리우스의 진득한 눈길은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 그가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프지 않았으나 뭘 하려는 건지 불안해서 지금이라도 빼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망설여졌다.

“다음에는 좀 더 기분 좋게 해드리겠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그런 약속한 적 없었……잠결에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손목에 뜨끈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더니 시리우스가 손목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동맥이 지나가는 자리에.

“읏!”

갑자기 강렬하게 빨아들였다. 나는 예고도 없이 시작된 스킨십에 놀라 얕은 신음을 뱉었다. ‘츕’하는 소리를 내며 손목에 키스마크를 남긴 시리우스는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나타난 말캉한 혀가 손목을 핥고서야 떨어졌다. 하얀 피부 위에 붉게 물든 자국이 퍽이나 마음에 드는지 엄지로 지그시 문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흔적이 남았네요. 이번에도 빨리 사라지길 기도하실 건가요?”

“시리우스 그러니까 내가 기도했던 건 시녀들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어 그랬지 다른 뜻은 없었어!”

진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속사포로 쏟아낸 변명은 시리우스에게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그의 화를 부채질했는지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분홍색 눈동자엔 어둠이 일렁거렸다.

“다른 뜻은 없었다, 라……. 당신이 그리도 무르니 제가 자꾸 기대하게 됩니다.”

저주가 완전히 풀려서일까.

그의 표정이 예전보다 풍부해졌다. 가끔 희미하게 보여줬던 광기나 집착을 날것 그대로 드러냈다. 나를 향한 감정들이 피부에 닿아 따끔따끔했다.

“그…… 저주는 완전히 풀렸잖아! 아, 그러고 보니 저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위험했다.

이 흐름은 위험했다. 나는 저번에 묻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그의 신경을 돌리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뭐든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관계가 끝난 후에요.”

정말 하겠다고?

그렇게 말한 시리우스는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다른 변명을 쥐어짜 냈다.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니, 저주가 풀렸으니까 이제 안 해도…….”

“빚이 하나 남았지요.”

강요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하나 담긴 말은 협박에 가까운 어감이었다.

“괜찮지 않습니까. 이제 저도 성인인걸요. 세르니아 님의 동의만 있으면.”

예전에 했던 설교를 그대로 돌려받을 줄이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니, 망설이고 있는 시점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시리우스가 빚을 들먹이며 협박하더라도 내가 완강히 거절하면 나를 공작가로 돌려보내 줄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리우스의 손이 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손가락은 내 볼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서늘했으나 그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는 묘하게 뜨거워졌다. 나는 볼을 쓰다듬는 시리우스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저항할 수 없다.’

내가 시리우스에게 무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동정이었다. 저주받아서, 가족에게 버려지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해서, 소설에서 여주인공을 사랑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채 자신을 희생해서 죽기 때문에. 이유는 많았다. 그래서 끝까지 동정이라고 생각했다. 첫 섹스를 했던 날도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연민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감정은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바뀌어 있었다.

‘어느 순간 동정이 정으로 변해버렸어.’

첫인상은 별로였으나 저주 때문에 그런 거겠지 하고 넘겼었다. 이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그에게서 쌍둥이와 비슷한 면모를 발견하고 마음이 약해진 것도 맞았다.

‘좋아하는 편이라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쌍둥이를 제외하고 나를 가장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고, 내가 위험하거나 힘들 때면 언제나 나타났기에. 그래도 어디까지나 어린애라고 생각했었다. 육체적으로는 2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20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으니.

‘스킨십 수위가 높아졌을 때부터인가.’

깨달았다. 내가 더 이상 그를 어린애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새 시리우스가 남자로 느껴진다는 것을.

“세르니아 님,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진 건가요.”

“…….”

입술을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분홍색 눈동자를 뿌리칠 수 없었다.

“……여기서는 싫어.”

한참이나 뜸 들이다 겨우 뱉은 말.

나는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 시리우스가 귀에 속삭였다. 자신의 궁으로 가자고. 궁까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걸어가기를 택했다. 텔레포트로 바로 이동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복잡한 상념을 다스리기 위해 걷고 싶었다.

“잠깐, 씻고 하자.”

“알겠습니다.”

궁에 막 도착하자마자 내게 달라붙는 시리우스를 떼어내며 말했다. 그는 순순히 나를 욕실로 보내줬다. 같이 씻자고 할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은 안 보이네.’

원래라면 헬리오스가 붙여준 사람이 궁을 관리 하고 있어야 했는데 너무 조용했다. 인적은 없으나 관리는 잘 되어있었다. 시리우스가 마법으로 관리하는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됐지.’

분명 카나린의 서류 제출을 따라왔다가 그렌드윈을 만나고 황후궁으로 갔다가 마지막은 시리우스와……. 이게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라니. 욕실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마차 벽보다 더 딱딱했다.

“세르니아 님 괜찮으십니까?”

욕실 밖까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는지 문 너머에서 시리우스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따뜻한 물에 잡념을 흘려보내며 욕실에서 나왔다.

“응. 괜찮아. 너도 씻고 와.”

“……네.”

욕실에 비치된 가운을 걸치고 나가자 시리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잠시 굳었다가 씻고 오라는 내 목소리에 반응해서 욕실로 들어갔다.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리우스의 말대로 둘 다 성인이고, 누군가의 강요로 이루어지는 관계도 아니었다. 따로 약혼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걸릴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뭔가 걸렸다. 형태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언저리에서 술렁거렸다.

‘확실히 이대로 시리우스랑 결혼하더라도 문제는 없는데.’

쌍둥이들의 반발이 일어나겠지만 그건 상대가 시리우스라서가 아니라 내가 결혼한다는 것 때문이니까 넘어가고. 여태껏 결혼을 안 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귀찮아서였다. 가문을 이을 귀족과 결혼할 경우 안주인으로서 가문의 내부를 책임져야 한다. 종이의 산에 둘러싸였던 공작부인같이.

그렇다고 가문을 잇지 못하는 차남이나 그 밑의 남자와 결혼할 경우 아르덴타인에게 다양한 지원을 요구할 것이 뻔했다. 물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런 이해관계에 얽히고 싶지 않아 결혼을 피한 것이었으나 시리우스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2황자이지만 마탑에 소속되어서 정치적으로 자유로웠다. 마탑은 오로지 능력 위주로 돌아가고 어떠한 국가에 소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와 결혼한다면 내가 귀찮을 만한 일들이 전부 해결되지.’

가문의 살림을 할 필요도 없었고, 아르덴타인에 빌붙으려는 것도 아니니 내가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 또한 사라진다. 거기다 시리우스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도 없으리라. 해피엔딩일 텐데.

‘어째서 찝찝할까.’

마치 손가락 끄트머리에 일어난 거스러미처럼. 아주 티끌 같은 불안감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세르니아 님.”

듣기 좋은 저음이 내 이름을 불렀다. 머리 말리는 것도 잊고 깊은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와,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온 시리우스의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기를 뚝뚝 흘리는 은색 머리칼이나 볼그스름해진 볼, 가운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 왠지 내 피부보다 하얀 것 같은데. 넋을 놓고 감상하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방금 침 흘릴 뻔했다.

‘저런 얼굴로 내가 좋다는데 어떻게 안 넘어가냐고!’

침대 베개를 주먹으로 팡팡 내려치고 싶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하는 행동은 또 어떻고.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으응, 다 씻었어?”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괜찮아. 시리우스도 떨고 있겠지. 그도 오늘이 두 번째일 테니.

“긴장하셨습니까?”

내 예상과 다르게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느긋하게 다가오더니 아직 물기가 남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처음 했을 때의 떨림도 불안함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나만 긴장한 건가? 어쩐지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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