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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붉게 물든 하늘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태양에 시선을 빼앗겨 감상하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불편했다. 그제야 남아 있던 졸음이 싹 가졌다.
‘이불?’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거리감이라든가 뺨을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을 때, 시리우스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거기다 몇 번 있었던 일이라 그런지 놀라진 않았다.
‘이런 일에 익숙해질 줄이야.’
다만 몸을 감싸고 있는 하얀 이불이 왜 여기 있는 걸까라는 의문뿐.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불 안에서 꿈틀거렸더니 시리우스가 고개를 숙이고 나를 보고 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시리우스의 은발은 석양 때문에 붉게 물들어있었다. 오묘한 주황색과 찬란한 금색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노을 그 자체였다. 하늘을 감상하듯이 그의 얼굴을 말없이 감상하고 있자 겸연쩍은 미소를 한 시리우스가 내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신가요?”
그의 물음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완전 넋 놓고 구경하던 나는 이불 안에 있는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확실히 아픈 곳은 없었다. 좀 피곤하긴 했으나 체력도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아마 저번처럼 시리우스가 내 몸에 마력을 불어 넣어줬으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쯤인지 물었다.
“공작가로 가는 길입니다.”
“텔레포트 안 하고?”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언제나 나를 이동시킬 때는 텔레포트로 한 번에 보내주더니 오늘은 왜 직접 날아서 데려다주는 건지.
‘그래도 텔레포트를 하는 것보다는 변명하기 편하겠다.’
황궁에서 마차를 타고 공작가 앞까지 왔다고 말하면 되니까. 혼자서 변명거리를 완벽하게 떠올릴 동안 시리우스는 대답이 없었다. 별생각 없이 물었던 질문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머뭇거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시리우스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조금이라도 세르니아 님과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아, 뭐야. 귀엽잖아.’
하마터면 육성으로 말할 뻔했다. 설마 뱉은 건 아니겠지.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시리우스의 눈치를 봤으나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라면 집요하리만큼 시선을 맞춰 왔을 텐데 자기가 한 말이 꽤나 부끄러운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떨리는 속눈썹이나 살짝 붉어진 귀 끝이 눈에 들어왔다. 시리우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진 것이 노을이 아닌 나 때문이라 생각하자 그것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중증인가.’
이마저도 귀여워 보이다니.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보다 내가 그에게 가지는 감정은 컸나 보다.
“세르니아 님?”
내가 대답이 없자 초조해진 시리우스는 내 눈치를 봤다. 이럴 때는 진짜 대형견 같은데. 침대 위에서는 맹수 같았다. 먹잇감을 노리고 사냥하는. 그 차이가 너무 커서 따라가기 힘들었다. 어느 쪽이 좋냐고 묻는다면 둘 다.
‘미쳤네.’
콩깍지가 쓰였다.
그것도 아주 두꺼운 콩깍지가. 근처에 벽이 있었더라면 주저 없이 이마를 박았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잡생각을 털어냈다.
“그런데 이불은 뭐야?”
그리고 주제를 돌렸다.
어색한 분위기나 내게 불리한 상황일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비장의 카드. 내 교묘한 주제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 시리우스는 잠시 망설인 후 입을 열었다.
“세르니아 님이 이불을 꽉 잡고 놓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들고 왔습니다.”
봄이 다가오지만 아직 추워서 덮어 준건가? 시리우스라면 이불이 아니라 온도 조절 같은 마법을 거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는 예상외의 대답을 했다.
“내가 이불을?”
“네. 강하게 빼면 깰까 봐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빼려고 했더니 뭐라 중얼거렸는데…….”
왜 뜸 들이는 걸까. 사람 불안하게.
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시리우스를 바라봤다. 왠지 헛소리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뭐라고 했어?”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으나 이불킥이 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이불킥 예약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서 이불을 꽉 잡고 놓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도 이불킥 예약이었다.
“그, 그랬구나. 저기 공작가가 보인다! 이쯤에서 내려줘도 괜찮아.”
결국 나는 다시 한번 말 돌리기를 시도했다.
타이밍 좋게 공작가가 눈에 보여서 다행이었다. 천천히 날던 시리우스가 공작가 근처에서 하강했다.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나를 내려주지 않자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안 놓는 거지.’
잠깐 동안 말 없는 대치가 이어졌다. 언제까지 안고 있으려고 이러는 걸까. 시리우스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굽히고 있던 무릎을 쭉 뻗고 땅을 향해 버둥거리자 시리우스가 아쉽다는 듯이 나를 내려줬다. 이불을 감은 채. 나는 이불은 시리우스에게 건네고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 음, 그러니까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고……. 이제 빚은 없는 거다?”
황후궁에서 빼내 준 것은 고마웠으나 시리우스 궁에서 있었던 일이 부끄러웠다. 나는 조금이라도 민망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부러 빚을 언급하며 물었다.
“……네.”
시리우스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내가 빚을 들먹여서 그런 건가.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했는데 마땅한 변명거리도, 다른 화제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겐 애써 외면하던 감정을 인정하는 계기가 됐지만 시리우스의 입장에서는 빚을 이용해서 억지로 한 거라고 생각하겠지.’
시리우스는 폭주해서 강압적으로 스킨십을 하더라도 언제나 마지막엔 멈췄다.
내가 싫다고, 안 된다고 하면 결국 그는 내게 사과를 하고 물러났다. 이번에도 시리우스가 빚을 들먹이며 요구했으나 최종적으로 내가 거부했다면 안 했을 것이다.
‘내 의지로 수락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시리우스는 내가 자신을 동정하기 때문에 거절을 못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누구보다 나에 대해 빨리 알아차리지만 내가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거겠지.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싫어서 한 건 아니니까.”
한숨 소리에 움찔거리던 시리우스가 내 대답을 듣고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여기서 시리우스에게 좋아하는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다. 시리우스라면 내가 가진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조금의 호감일지라도 기뻐하겠지.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 안쪽에서 희미한 불안감이 솟아났기에.
‘먼저 고백하고 싶지 않다거나 밀당을 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
애초에 모태솔로인지라 밀당을 할 능력도 없었다.
그런 연애적인 달콤한 불안감이 아니었다. 좀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불안감이었다. 마치 황실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발견했을 때나 황후를 만났을 때처럼.
“그러니 죄책감을 갖지 마.”
차마 내 감정을 전하지 못했다. 그저 시리우스가 상처받지 않을 선에서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시리우스의 미간을 찌푸렸다. 잘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욕구를 억누르는, 가끔 나에게 보여주던 표정이었다.
“세르니아 님은 너무 상냥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꾸 어리광을 부리게 됩니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어둡진 않았다. 보름달이 밤하늘에 환히 떠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우스에게 나는 달 같은 존재겠지. 저주라는 어둠에 잠식됐을 때 밝혀준 구원의 빛. 그에게 감정을 느끼게 해준 유일한 존재였으니.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내가 그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이유에 연연해 하고 있는 건가.’
쌍둥이는 내가 그들을 키워졌기에 나를 따른다. 카나린이나 벨라는 내가 도와줬기에 나와 친구가 됐다. 다들 너무 쉽게 마음을 열고 과하게 나를 좋아해 주는 부분이 있으나 그래도 계기가 있었다. 반면 시리우스는 달랐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의문을 좀처럼 떨쳐 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세르니아 님을 탓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민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시리우스가 사과하며 내게 다가와서 생각을 멈춰야 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예전에 한 번 거절했던 그날처럼. 나는 그가 내민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기사의 맹세를 하듯이 경건하게 내 손등에 입을 맞춘 시리우스가 작게 속삭였다.
“부디 당신의 상냥함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시리우스는 잡고 있던 손을 돌렸다.
갑자기 뭐 하는 거지 싶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받은 분홍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놓고 있자 나른한 웃음을 머금은 시리우스가 내 손목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붉은 자국이 남아 있던 자리에 아주 가볍게.
“이 흔적이 키스 마크라 생각하는 사람은 세르니아 님밖에 없겠죠.”
“뭐?”
느닷없이 키스 마크?
확실히 목덜미나 쇄골도 아니고 손목에 있는 붉은 자국을 보고 키스 마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벌레에게 물려서 긁었다거나 상처가 생겼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무슨 의도로 이야기를 꺼낸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번에는 빨리 사라지도록 기도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이 흔적을 볼 때마다 저를 떠올려 주세요. 저의 작은 어리광입니다.”
자신의 말을 마친 시리우스는 평안한 밤이 되라는 인사를 하고 텔레포트를 했다. 오글거리는 대사에 굳어 있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리우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와, 어떻게 저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대본도 없이 술술 뱉을 수 있는 거지?”
마법사는 이과 계열이 아니라 문과 계열이었나? 사실 시리우스는 로맨스 소설 애독자라던가. 매번 느끼지만 왜 부끄러움은 언제나 내 몫인 거지? 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열기를 식히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혼자만의 아우성이 시리우스에게 닿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화끈거리는 목덜미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도 시리우스 때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