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81화 (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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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 황궁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안색이 안 좋아요.”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피곤해서 그런 거니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공작가에 도착하자 먼저 돌아온 카나린이 나를 찾아왔다. 갑자기 일이 있다고 사라졌으니 걱정할 만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얼굴에 드러난 피곤함을 지우며 밝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럼요. 그렌드윈이 잘 설명해주겠다고 했는데 혹시 이상한 말 하진 않았나요?”

나는 농담이 섞인 어투로 카나린에게 물었다.

그렌드윈이 뭐라고 말했는지 대충은 알아야 나중에 입을 맞추기 편하니까. 카나린이 아리엘처럼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괜히 대놓고 물어서 의심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치명적인 실수를 한 황태자님을 도와주기 위해 급히 가셨다고……. 정말 별일 아니죠?”

어떻게 실수를 해야 치명적이게 실수하는 걸까.

아까 수잔과 대화하며 조금 올라갔던 그렌드윈의 평가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 내가 그렌드윈보다 변명은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황태자님이 블레닌의 밤 행사를 준비하다가 실수를 했지 뭐예요! 수습한다고 조금 피곤하네요.”

황후궁에서 헬리오스가 블레닌의 밤을 이야기하던 것이 떠올라서 황급히 덧붙였다. 어떤 실수인지는 전혀 생각 안 해놨지만 이 정도면 포장 잘했다!

“그렇게나 심각한 실수였어요?”

지어낸 변명이 그럴싸해서 자화자찬하고 있었는데 카나린이 한층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변명은 잘 포장했으나 헬리오스의 이미지까진 포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회피를 선택했다.

“조금? 그래도 황태자님의 명예를 위해 여기까지만 말할게요.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할까요?”

“아, 피곤할 텐데 제가 잡고 있었네요. 니아 오늘 같이 가줘서 정말 고마웠고, 얼른 들어가서 푹 쉬어요.”

“네. 카나도 평안한 밤 되세요.”

카나린은 헬리오스의 실수에 관해서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무사히 넘겨서 다행이다! 나는 카나린과 헤어지고 다른 시녀들도 모두 물렸다. 어린 시절부터 가끔씩 혼자서 씻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시녀는 없었다.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다가 가슴 언저리에 남은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보단 덜 심하네.’

내 억울함을 알아 준 걸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쇄골에 남은 흔적들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하얀 피부 위에 떠오른 자국들은 옅은 분홍색이었다. 벌레에 물려서 가려워 보이는 색. 내일이면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한 핑크는 그의 눈동자를 연상시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시리우스와 관계는 어정쩡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뻗지 않는, 애매하고도 어중간한 사이. 이 관계가 나 때문에 발전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았기에 변화하지 않았다.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구나.’

고요한 적막이 깔린 어두운 방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어째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정체는 뭔지에 대해서.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한참이나 고민한 후에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나는 여전히 이유에 집착하고 있었다. 시리우스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 머리로 ‘이유 없이 좋아할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나 마음속에선 끊임없이 ‘시리우스가 이유도 없이 나를 좋아하는 게 가능할까?’ 하고 되뇌게 된다.

비어버린 여주인공의 대체품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순수하게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래는 데이지를 좋아해야 했으니.

‘한심해.’

시리우스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망설이는 내가 한심했다. 비어 있는 데이지의 그림자가 너무 컸기에.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는 가끔씩 열등감을 만들어 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데이지에게. 정령의 힘이라든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마법 능력.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혼자서 강했으니까. 은연중에 그녀와 나를 비교하기도 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부정적인 사고는 끝도 없이 바닥으로 파고든다. 나는 땅굴을 파기 전에 양 뺨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건 데이지에게 열등감을 가지는 일이 아니다. 알고 있다. 나는 데이지와 다르다는 것을.

‘나는 평범해.’

그렇기에 생각을 멈춰서는 안 됐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만들어 내자. 이미 시작된 감정. 막기에는 늦어 버렸다. 그러니 미련을 버리자. 원작의 이야기는 지금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내가 시리우스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없으니. 나는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망설임을 털어냈다.

‘거기다 시리우스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오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따로 있어.’

그녀가 없어도 일어나는 원작의 사건들과 아카데미 테러 사건 이후 꾸게 되는 데이지의 꿈이 자꾸 내게 경고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오늘 황후궁에서 일어났던 잔상처럼.

“아, 진짜 왜 이렇게 복잡하냐.”

답답한 마음을 털기 위해 육성으로 내뱉었으나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 불안은 나를 더욱 심란하게 할 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고 침대에 미끄러지듯 누웠다. 머리 아픈 건 딱 질색인데.

‘갑자기 그 장면이 왜 떠올랐을까.’

꿈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장면. 그런데 정확한 타이밍에 절묘하게 오버랩이었다. 내가 아무리 소설을 봤다지만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글로 읽은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현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원작마저 흐릿해진 시점에서.

‘그리고 그 부분도 이상해.’

기억의 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것이겠지. 애초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수첩에 적어놓은 내용이 전부였다. 그런데 흐릿해져 가던 원작이 가끔씩 뚜렷하게 생각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검성의 관한 것.’

아카데미 테러 사건은 수첩에 딱 한 줄 적혀있었다. 그러나 검성을 마주한 순간 테러 사건에 관한 내용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테러 사건의 원인이라든가 검성이 황실기사단장이었다는 사소한 설정들이.

이번에도 그랬다.

데이지와 황후의 티타임 장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방에 돌아와서 바로 수첩을 펼쳤으나 적힌 내용은 별거 없었다. ‘황후의 초대로 데이지와 티타임을 가짐, 대화 도중 헬리오스가 궁으로 찾아와 데이지를 데려감.’ 정도밖에. 그 황후와 티타임 이후 미묘하게 원작에 있었던 일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황후랑 만난 시기라던가.’

작중에서 데이지는 ‘블레닌의 밤’ 때문에 황궁에 온 것이다. 블레닌의 밤은 다음 주. 데이지와 황후가 만난 날은 일주일 후라는 뜻이다.

‘헬리오스에 대한 감정을 깨달은 데이지는 그를 만나기 위해 황궁으로 간다. 블레닌의 밤에 초청되는 마법사들은 마탑주를 포함해서 상위 능력을 가진 4명의 마법사. 데이지는 마탑주의 제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함께 오지.’

원작에서 데이지와 황후의 첫 대면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헬리오스를 만나러 왔으나 정작 블레닌의 밤 행사 준비로 바빠서 그를 만날 틈이 없었는데 오늘처럼 황후의 시녀가 데이지를 부른다. 황후의 초대라고 말하면서.

‘스쳐 지나간 장면은 일치했지만 소설에서는 황후가 금제를 걸려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어. 이것도 서술트릭일까?’

아니면 원작과 다르게 황후가 내게만 금제를 걸려고 했던 걸까.

후자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원작에는 황후의 계획대로 척척 진행됐으나 지금은 내 존재로 인해 틀어진 부분이 많으니. 그래서 오늘 만나보고 금제를 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었다.

‘데이지는 정령의 보호라도 받고 있었으나 나는 그런 것도 없으니 더 쉬워 보였겠지.’

시리우스가 딱 맞춰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황후의 명령을 거부 못 하고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었을 것이다. 틀어진 계획으로 인해 황후의 행보가 원작과 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똑똑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여태껏 내가 해결했던 문제들은 대부분 원작에 나왔던 내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건의 과정이나 결과를 알고 있어서 의문점을 깨달을 수 있었고, 새로운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원작이라는 토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그렇기에 앞으로 달라지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이 불안감을 풀어내고 싶었다.

‘데이지의 꿈을 꾸는 것과 원작이 점점 선명하게 생각나는 것이 황후의 계획에 대비라는 경고인가? 어쩌면 내가 이 세계에 환생한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복잡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상황은 거대한 소용돌이 같았다. 도망가려고 해도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력해서 피할 수 없는,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필연적인 운명. 나는 왼쪽 손목에 남은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삼켜질지 아니면 무사히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몰아치는 폭풍에 당하지 않으려면 대비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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