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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82화 (8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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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마치고 카나린이 내게 산책을 권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 할 것 같아서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꽃이 피지 않은 장미정원을 거닐었다. 옅은 안개가 끼어 있었으나 촉촉한 초봄의 아침 공기가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어색하진 않았다. 공기에 녹아들어 있는 고요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기에.

“저는 오늘 공작가를 떠나려고 해요.”

장미정원을 지나 온실에 다다를 때쯤 카나린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떠날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너무 급작스러웠다. 거기다 어젠 경황이 없어서 서류 제출하고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했었다. 나는 우선 그녀에게 황궁에서 서류처리는 잘했는지부터 물어봤다.

“카나, 일단 어제 황궁에서는 어떻게 됐나요. 차근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네. 어제 서류를 제출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으나 승인은 금방 되더군요.”

카나린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녀가 가져간 서류를 처음 보는 행정관은 당황하더니 공작부인의 말대로 법전에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기다리라고 했고, 카나린이 이미 준비한 또 한 장의 종이를 내밀자 행정관이 안경을 고쳐 쓰고 내용을 확인했다고 한다. 종이를 받아든 행정관은 법 조항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보고 법전을 펼쳐 적힌 내용과 대조하는 것까지 별문제 없었다고 했다.

‘의외로 금방 끝났네? 하지만 어제 기다릴 때는 더 오래 걸렸던 것 같았는데.’

그녀의 말대로라면 10분조차 걸리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릴 때는 그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복도 앞에서 서성이다가 그렌드윈을 만나 대화를 나눴고, 그럼에도 카나린이 나오지 않아서 나와 그렌드윈은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황후의 시녀가 나를 부를 때까지 안 나왔으니 족히 30분 이상은 지났을 것이다.

“별일 없었네요.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어요.”

“맞아요. 확인 절차도 끝나고 승인만 해주면 되는데 갑자기 일이 많으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저도 안에서 하염없이 대기했어요.”

법무부도 블레닌의 밤 때문에 바빴나?

아닐 텐데. 법무부는 법적인 서류 절차를 처리하는 곳이라 블레닌의 밤과는 관계없을 것이다. 아무리 일이 쌓였다 하더라도 승인만 해주면 끝나는 서류였는데 그걸 굳이 대기 시켰다니. 이상했다.

“근데 좀 이상하긴 했어요. 바쁘다던 행정관들이 저를 힐끔힐끔 보며 뜸 들이는 것 같았거든요.”

카나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어제의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서류를 제출하려고 했을 때는 그런 말이 없었나요?”

“상황도 좀 묘했던 게, 갑자기 상사로 보이는 사람이 행정관을 호출했고 뭔가 대화를 나누고 돌아와서는 저에게 기다리라고 했어요.”

꺼림칙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설마 카나린이 오래 걸린 것까지 황후의 수작이었던 건가. 그녀는 어떻게 서류 제출 중인 카나린의 존재를 알고 발을 잡을 걸까.

‘황궁 정문을 지날 때 신분 확인을 한다.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특정 구역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신분만 확인되면 출입이 까다롭지 않아.’

황궁 도서관이나 행정 관련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 본궁에 출입하는 귀족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황족들이 기거하는 궁이나 황제의 독대라도 하지 않는 이상 신분만 증명되면 특별한 제약 없이 자유롭다.

‘황궁 정문에 황후의 사람이 있었고, 우리를 보고 따라 왔다거나.’

하지만 인기척은 못 느꼈는데.

아니지. 내가 은신술을 펼친 암살자의 기척까지 잡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법무부까지 걸어가면서 스쳐 지나간 사람도 많았으니 그중에서 황후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아라네아가 황궁에도 잠입해 있다면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까다로워진다.’

신분을 위장하거나 아니면 드란이나 레베카처럼 가문을 이을 수 없는 귀족들을 회유했다면 더더욱.

‘어쩌면 아라네아에 소속된 귀족들도 있을 수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복면인들처럼 일회용으로 사용하진 않겠지만 아카데미까지 손을 뻗칠 정도니 황궁에는 황후의 눈과 귀가 많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 카나린이 떨어지자 고의적으로 카나린을 붙잡았을 것이다. 나를 부르기 위해.

“니아?”

“미안해요. 딴생각했네요.”

내가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카나린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불렀다. 생각할 부분이 많았으나 황후에 대한 고민은 덮어뒀다. 지금 고민한다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카나린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으며 처음 주제를 꺼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좀 더 공작가에 머무르며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을 텐데.”

카나린은 급하게 백작가에서 빠져나왔기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전혀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 서류가 승인돼서 그녀는 이제 평민. 마땅히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 먹고 살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금전적으로 지원하려고 했었다.

“아니에요. 이미 공작가에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여기서 더 폐를 끼칠 수 없죠.”

그러나 카나린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단순히 부담스러워서 하는 거절이 아니었다. 흔들림 없이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나 단단한 목소리에서 그녀의 뚜렷한 의지가 느껴졌다.

“따로 계획해 둔 것이 있나요?”

“네. 사실 일주일 동안 성을 버린다면 뭘 하고 살아야 할지 깊이 고민했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카나린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저는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대 포기하지 않을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죠. 여태껏 의미 없이 살아온 것만 같았어요.”

부정적인 말이었으나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에 서려 있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끼어들지 않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니아를 만나고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적어도 저를 믿어주는 친구를 사귀었잖아요?”

카나린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더 이상 과거의 자신감 없던 카나린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제 시간은 의미 없지 않았어요. 니아를 만나고,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 덕분이니까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곳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녀의 눈이 희망으로 빛났다.

“아직 서툴고 모르는 것도 많지만 천천히 알아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선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고. 그래서 결정을 내리고 곧장 아카데미로 편지를 한 통 보냈답니다. 오늘 답장이 왔어요.”

카나린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 보여줬다. 아카데미 인장이 찍힌 편지를 보자 예전에 지나가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드란과 레베카처럼 인턴 자격으로 아카데미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아카데미에는 직업을 갖지 못한 졸업생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 아카데미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거든요. 원장님의 승인이 필요해서 편지 보냈는데 생각보다 빨리 답이 와서 놀랐어요.”

확실히 아카데미 안에 있으면 제이페인 백작이 접근할 수도 없고, 숙식도 한 번에 해결되니 일석이조다!

“한동안은 아카데미에서 일할 수 있는 거군요. 축하해요! 잘 해낼 거라 믿어요.”

“고마워요.”

선택한 길이 어디로 이어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가기 위한 여정. 카나린은 망설임 없이 한 걸음 내디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여행을 응원하기로 했다.

“준비는 끝난 건가요?”

“네. 아침에 편지를 받고 바로 준비했어요. 챙길 것도 입고 왔던 교복밖에 없지만요.”

생각해보니 카나린은 공작게 올 때도 빈손으로 왔었기에 딱히 짐이 없었다.

‘졸업했는데 교복을 입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교직원들은 보통 사복을 입던데.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리에게 카나린이 입을 만한 옷들을 몰래 챙겨서 보내라고 언질을 해야겠다. 다만 블레닌의 밤까지는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벌써 떠난다니 조금 아쉬웠다.

“인사는 끝냈나요?”

“공작부인에게는 지금 가서 전하려고 해요.”

“아……. 그래요. 갔다 와요.”

아리엘의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말았다.

아직 아리엘과 따로 이야기도 못 했고, 괜히 카나린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도 배웅할 때 같이 가자고 말해볼까.’

카나린은 공작부인의 집무실로 갔고, 나는 아리엘의 방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할 때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오늘따라 유독 굳어있던 아리엘의 모습을 떠올리며 노크를 했다.

‘없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오늘 아리엘은 특별한 일정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근처에 있는 시녀 마리에게 아리엘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아리엘 아가씨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마리는 목적지까진 알지 못했다.

아리엘이 내게 말하지도 않고 외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예전이었으면 ‘내게 의존하는 경향이 줄었구나.’라고 가볍게 넘겼겠지만 최근 아리엘의 상태를 생각하니 조금 꺼림칙했다.

‘데인이나 엘은 아려나?’

아리엘의 행방을 찾기 전에 카나린이 먼저 공작부인과 인사를 마치고 왔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 그녀의 배웅을 해야 했다.

“카나, 편지 자주 해요!”

“네. 마차까지 태워줘서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을게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죠! 은혜까지는 아니에요.”

가벼운 포옹을 하고 카나린이 마차에 올랐다. 나는 마차가 공작가를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쨌든 카나린의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가씨. 편지가 왔습니다.”

“데인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로비로 들어가자 데인이 나를 불렀다.

그도 나를 찾고 있었는지 손에는 편지가 들려있었다. 아카데미 인장이 찍혀있는.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아리가 외출했다고 하던데 어디 갔는지 알아?”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황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황궁?”

예상외의 목적지였다.

아리엘이 황궁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나는 일단 데인이 전한 편지를 받아 들었다. 아카데미에서 온 편지에 발신인은 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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