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무슨 날인가.’
아리엘은 갑자기 황궁에 가질 않나, 검성은 뜬금없이 편지를 보내지 않나. 나는 편지를 뜯으려고 했다. 오늘은 무조건 아리엘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미리 오겠다고 연락한 사람은 없었는데.
카나린에 이어 연락도 없이 공작가에 찾아올 사람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시리우스라면 정문이 아니라 마법으로 들어왔을 거니까 아닐 거고. 그나마 가능성 있는 사람은 벨라?
“그렌드윈 님입니다. 우선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예상외의 인물.
이상한 일은 꼭 한 번에 몰려오는 것 같다. 나는 들고 있던 검성의 편지는 데이지에게 맡기고 마리와 함께 응접실로 이동했다. 편지 내용도 궁금하긴 했으나 그렌드윈의 방문목적도 궁금했기에.
“세르니아 누님!”
제복을 입은 그렌드윈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성큼 걸어왔다. 커다란 녀석이 예고도 없이 다가와서 살짝 뒷걸음쳤으나 내 당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우악스럽게 내 손을 덥석 잡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어젠 별일 없으셨습니까?”
“어제?”
그렌드윈의 물음에 어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별일’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시리우스가 먼저 떠올라서.
“네. 황후 폐하께 갑자기 초대받으셨잖습니까. 혹시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도 없이 방문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아……. 아니 무례까진 아니고.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길어질 것 같으니.
나는 그렌드윈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내며 자리를 권했다. 그제야 진정한 그렌드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뒤에서 대기하던 마리에게 홍차를 부탁하고 잠시 멈췄던 주제를 다시 꺼냈다.
“어제 놀라긴 했지만 별일 없었어. 시리우스 님과 헬리오스 님이 와서 티타임도 금방 끝났고.”
황후와 티타임은 평범하지 않았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그렌드윈을 슬쩍 떠보기 위해서는 어제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시리우스 황자님과 나갔다고 하셨죠.”
“응. 헬리오스 님에게 들은 거야?”
“네. 사실 어제 세르니아 누님이 황후궁으로 가자 카나린 영애가 바로 나왔습니다. 누님의 약속대로 그녀에게 공작가로 먼저 돌아가라고 전했습니다.”
그다음 그렌드윈은 헬리오스를 찾아갔다고 했다.
어쩐지. 헬리오스의 등장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렌드윈은 자신이 황후궁에서 나를 빼내 올 수 없다고 판단해서 헬리오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걱정할 거야? 그냥 황후 폐하가 티타임에 초대한 것뿐이잖아.”
일반적인 반응.
나는 마리가 가져온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능청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내가 던진 미끼에 우물쭈물하던 그렌드윈은 시선을 찻잔으로 떨어뜨렸다.
‘말하기 곤란한 걸까?’
그렇다면 공작가에 찾아와서 안부를 묻는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 나는 그렌드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급작스럽게 황후 폐하가 티타임에 초대한다면 누구라도 당황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특히 세르니아 누님은 사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니 더욱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헬리오스 님께 부탁드린 겁니다.”
변명 자체는 그럴싸했다.
3초의 침묵과 흔들리는 동공이 아니었다면.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원래부터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편이 아니었으니. 나는 그렌드윈이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뭔가 있는 거 같긴 한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내가 걱정되어서 변명조차 생각하지 않고 공작가에 찾아 왔다는 것은 진심으로 느껴졌기에.
‘그렌드윈을 믿어도 될까?’
숨기는 것이 있는 건 맞지만 적어도 나를 걱정해서 헬리오스를 불러줄 정도면 황후의 편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를 얼마나 신뢰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됐다.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르덴타인 사람들과 카나린 그리고 시리우스뿐.
‘그렌드윈은 남을 속이는 것엔 소질이 없지.’
누구와는 달리 연기나 가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태껏 알고 지내면서 느꼈던 그렌드윈과 원작에 서술되었던 그렌드윈이라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것은 제국을 수호하는 것이고. 물론 원작의 서술 트릭으로 가려진 부분이나 내가 모르는 사이 황후의 금제에 걸렸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그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맞아. 황후 폐하와 독대라서 엄청 긴장했었거든. 도와줘서 고마워.”
그가 대답하기 힘들어하는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렌드윈이 숨기는 것이 황후와 관련됐고, 숨기는 것 때문에 내가 걱정되어서 찾아 왔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하며.
‘정보 길드에서는 황족을 조사하는 것은 무리라 했으니, 만약 그렌드윈이 황후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면 후작가의 사람을 썼을까?’
고위 귀족들은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검성이 알아서 한다고 했으나 역시 공작에게 의논하고 공작가의 정보망을 통해 황후를 조사해 봐야겠다. 그가 보낸 편지부터 읽은 후에.
“세르니아 누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렌드윈은 내가 더 이상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자 안도했는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시선을 맞춰왔다. 꼬리를 흔들며 칭찬해 달라고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대형견보다 큰 덩치를 가졌지만. 저번처럼 머리를 들이밀진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기사단 일은?”
비번이라면 제복을 입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설마 땡땡이는 아니겠지? 그의 과거 행적을 돌아봤을 때 은근히 타당성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렌드윈을 바라보자 그도 찔리는 것이 있는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제대로 허락받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미심쩍은 눈빛은 그만둬주세요.”
“그래? 난 또 아카데미 입학식 때처럼 지겹다고 농땡이 피운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제 성인이고, 아카데미 때야 제가 돈을 내고 다니는 입장이었으나 지금은 월급 받는 만큼 일해야죠.”
오, 왠지 대학생이 취직해서 할 만한 대사인데.
그렌드윈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놀리는 맛이 있는 녀석.
“성장했구나.”
“그럼요! 예전의 어린애가 아닙니다.”
예전에도 덩치가 커서 그런지 어린애 같이는 안 느껴졌는데.
뒷말은 속으로 삼키며 미소를 지었다. 뭐, 어디까지나 첫인상이었고 나중에 에리얼과 지내는 모습을 보고는 덩치만 컸지 어린애 맞구나 하고 생각을 정정했지만. 그렌드윈은 내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웃겨서 평소라면 던지지 않을 장난을 쳤다.
“이제 다 컸네. 결혼하면 좋은 아빠가 되겠다.”
“…….”
가벼운 농담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명절날 오지랖 넓은 친척이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한 느낌이었나?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을 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그렌드윈에게 빠른 사과를 했다.
“미안. 기분 나빴어?”
“아닙니다. 그저…… 아직 약혼자도 없고, 결혼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긴 그렌드윈은 데이지에게 반하기 전에는 벨라바라기였으니.
마지막까지 데이지에 대한 감정을 혼자 삭이며 죽었었다. 그가 결혼한 모습은 나도 상상이 잘 안 돼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실 나도 결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애도 못 해봤는데. 느닷없이 나온 결혼 이야기였으나 눈보다 새하얀 사람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렌드윈과 마주 보던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이미 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 속에서도 그가 생각났다.
“나도 결혼은 너무 멀게 느껴져.”
간절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나도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결혼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 시리우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어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연애의 끝을 생각하게 되면 선뜻 관계를 발전시키기 어려웠다.
‘이래서 내가 모태솔로겠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시작도 전에 겁이 났다.
“세르니아 누님은…….”
“그래도 연애는 한번 해볼…….”
말이 겹쳤다.
우리는 목소리가 겹치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조금 더 길게 말한 것 같지만. 그렌드윈은 내게 먼저 말하라고 양보했으나 멈췄던 말을 다시 하려니 민망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고.
“별말 아니었어.”
“연애를 한번 해보겠다는 말씀 아니셨습니까?”
다 들었잖아!
나는 그렌드윈이 뭐라고 하려는지 전혀 추측할 수 없었는데 내 속내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래서 생각 없이 말을 뱉으면 안 된다고. 언제나 후회하지만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 너는 무슨 말 하려고 했어?”
다 들었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순순히 인정하고 주제를 돌리려 했다.
“저도 별말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연애라니, 세르니아 누님에게 약혼자는 없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요?”
하지만 그렌드윈은 내 의도대로 넘어가 주지 않았다.
들떠 보이던 기색이 사라지고 평소보다 묵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