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84화 (84/123)

-84-

약혼자가 있으면 연애도 못 하고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거기다 내가 약혼자가 없다는 것은 사교계는 물론이고 사교계에 어두운 변방의 귀족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2년 전, 이미 한차례 제국 곳곳에서 내게 혼담을 넣어 왔기 때문에.

‘한동안 조용해서 잊고 있었네.’

쌍둥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몰려들던 혼담은 신기하게도 금방 수그러들었다. 아마 나와 결혼하더라도 얻을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게 아닐까. 자세한 내막은 공작이 처리했기에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러니까 연애해 볼까 하는 건데. 약혼자가 있었다면 벌써 결혼했겠지.”

“…….”

장난기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그렌드윈은 웃지 않았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뭔데. 불만 있으면 말로 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왜 연애 이야기나 꺼내 가지고! 이 어색한 침묵 어쩔 거야.’

이게 다 시리우스 때문이라고 탓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상하게 그와 관련되면 생각이 짧아지니. 아니다. 남 탓하지 말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탓했다. 시리우스에게 느끼는 감정 때문에 답답해서 무의식중에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쓸데없이 연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쌍둥이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상담이니.’

그들이 알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할 것이 뻔했다.

그나마 상담할 수 있는 친구는 카나린이었으나 그녀는 지금 제 앞가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태평하게 연애 상담을 할 수 없었다.

‘그렌드윈도 나랑 똑같이 모태솔로라서 상담의 의미가 없겠지만.’

가끔은 누군가 고민을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할 때가 있다. 꼭 해결책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리되는 경우도 있었고.

원작에서 데이지의 든든한 지원군이며 헬리오스의 친우였기에 그들처럼 그렌드윈이 내게 의리를 가질 거라 생각했었다. 벨라에 관한 칭찬을 나누며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만의 친목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착각이었나.

‘나 혼자 내적 친목을 쌓은 건가.’

애써 씁쓸한 마음을 숨겼다. 그래. 친구의 사촌 누나일 뿐이겠지.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나 혼자 친하다고 생각해서 꺼낸 농담 때문에 그와 껄끄러워진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나는 후회를 하며 그의 표정을 살폈고, 그렌드윈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이나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계신 겁니까?”

“어? 아니 아직…….”

사귀는 건 아니지.

시리우스는 내가 가지는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 그는 내 생각과 기분은 기민하게 읽어내면서 그에게 느끼는 호감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시리우스에게 보여주는 호의가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연민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어 보였다.

‘호감 이상인 것 같지만.’

우정이라기에는 깊었고 사랑이라기에는 가벼웠다. 아니. 사랑에 가까웠으나 시리우스의 사랑만큼 무겁지 않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내가 말끝을 흐리자 푸른 눈동자는 한층 깊어졌다.

“마음에 둔 상대는 있는 거군요.”

겨우 입을 여나 싶었더니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그렌드윈의 말에 뜨끔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아무리 표정에 감정이 잘 드러난다지만 이건 표정으로는 유추할 수 없을 텐데. 내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이 그에게 대답이 됐는지 그렌드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라며 중얼거렸다.

‘그냥 찔러본 거였나?’

나는 침음을 삼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딱 그 꼴이었다.

“그래. 조금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어.”

어차피 들킨 거 변명을 포기했다. 어쭙잖은 거짓말을 해서 신뢰도를 잃을 바에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진짜 상담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다만 시리우스에 가진 감정을 ‘조금 호감’으로 순화시켜서 말했다.

“누구입니까?”

그렌드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은 기분 탓일까.

나는 그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시리우스라고 밝혀도 될까? 하지만 당사자도 모르는데 그렌드윈에게 먼저 말하려니 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 연애 상담은 상대가 알기 전에 하는 건가?’

그런데 뭘 상담해야 하지.

구체적인 상담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최근 한꺼번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나간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벼운 농담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연애 상담까지 이어지게 될 거라 예상도 못 했고. 슬쩍 지나가는 어투로 농담처럼 던지려고 했는데 그렌드윈이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줄도 몰랐다. 여전히 무덤 파는 것이 특기라고 생각하며 그렌드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더니 이번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르니아 누님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몰아붙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사과하는 그렌드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자기도 왜 이렇게 물고 늘어졌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먼저 연애 이야기 꺼냈으니 네가 사과할 건 아니야. 그렌드윈이 편해서 나도 모르게 안 해도 될 말을 했어.”

혼자 내적 친목 느낀 내 잘못이지.

다음부터 지나가는 말로 던진 농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그는 물끄러미 내 눈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편했습니까?”

“응. 너랑 만난 지도 꽤 됐고, 엘이랑 친구라서 그런지 더 편하게 생각해서 고민이 불쑥 나왔나 봐.”

친한 척해서 미안하다는 뒷말을 생략했다. 대놓고 말하기도 애매했고, 어쩐지 ‘나는 너랑 이만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아니었구나.’ 하고 그렌드윈을 탓하는 느낌도 들었기에.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네? 아닌 줄 알았는데요.

오늘따라 유독 종잡을 수 없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방금까지만 해도 거리를 두더니 순식간에 좁혀왔다. 아니면 그렌드윈은 별생각 없었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건가.

“나 혼자만 친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 상담해드리겠습니다. 이왕 하신 거 시원하게 말씀하십시오.”

청명한 하늘을 닮은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더니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돌아왔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도울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며 말했다. 여기서 말해도 괜찮은 걸까 망설여졌으나 그렌드윈의 말대로 이왕 나온 거 끝까지 이야기했다.

“그게 어떤 사람을 조, 좋아하는 거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

그렌드윈은 내가 뭘 고민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연애 상담하기에 그렌드윈은 적절하지 않았다. 나름 용기 내서 상담한 것이었는데 기운 빠졌다.

“너도 연애 안 해봤을 텐데…….”

“그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제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렌드윈이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도움 안 되는 답을 가지고. 좋아하면 고백한다는 것이 정석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감정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니.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내가 고민할 리가 없잖아!’

목 끝까지 차오른 반론을 꿀꺽 삼켰다. 그렌드윈에게 연애 상담을 한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며.

“너는 아직 좋아하는 사람 없지?”

“어째서 그리로 주제가 튀는 건가요?”

그렌드윈은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고민하던 그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대답을 했다.

“실은 좋아한다는 감정을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시리우스야?

그와 대화를 하며 속으로 삼킨 말이 대체 몇 번째인지. 한숨을 쉬지 않으려 해도 한숨이 나왔다. 정확히 따지자면 시리우스는 저주 때문에 감정을 봉인 당한 것이었고, 그렌드윈은 그저 자신의 감정에 둔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데이지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좋아한다는 감정을 모를 만도 했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그렌드윈은 데이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처음에는 벨라처럼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이 발전해서 사랑이 된다. 다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헬리오스와 데이지가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었을 때였다는 것.

“벨을 좋아하지?”

“네. 벨은 제가 지켜야 할 혈육이니까요.”

“만약 벨을 제외하고, 그러니까 혈육이 아닌데도 지키고 싶다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게 사랑 아닐까?”

오히려 내가 그렌드윈에게 조언을 건넸다.

원작에서처럼 감정을 늦게 깨달아서 시작도 전에 포기하는 일이 없길 바라며. 그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짚어줬다.

“리오 님이요?”

“아니! 그건 충성심이고.”

얼마나 둔하면 충성심과 사랑도 구분 못 하는 걸까.

어쩌면 저주로 감정을 못 느꼈던 시리우스보다 더한 거 아니야? 나는 살짝 높아진 언성을 진정시키기 위해 식어버린 홍차를 마시며 속을 달랬다.

“어떤 사람이 계속 보고 싶고, 뭐 하는지 궁금하고, 신경이 온통 그 사람에게 쏠린다거나……. 또 얼굴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거나 맥박이 갑자기 빨라진다거나…….”

사랑의 증상은 다양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나열한 것들은 웃기게도 시리우스를 생각하는 나의 증상들이었다. 나는 그렌드윈이 앞에 있음에도 얼굴을 쓸어내렸다.

‘호감 이상은 무슨, 그냥 사랑인데.’

그렌드윈에게 충고할 입장이 아니었다.

언제는 불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더니 내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불려가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외면하기에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감정을 주체 못 할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을 줄이야.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