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85화 (8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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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고 싶은 사람…….”

그렌드윈도 뭔가 걸리는 상대가 있는지 작게 웅얼거렸다.

나는 그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내 심란한 마음을 들키지 않았기에.

“언제가 그렌드윈에게도 나타날 거야. 그런 상대가.”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아직 상념에 잠겨 있는지 푸른 눈동자가 심해처럼 깊은 색을 띠었다. 나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데이지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상대가 나타나겠지.’

시리우스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생각해보니 분명 나의 연애 상담이었는데 이번엔 그렌드윈의 상담으로 변해있었다.

‘별거 아닌 농담이 불러온 파문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

좋은 아빠가 될 거라는 농담에서 시작된 연애 이야기가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이어질 거라 예상도 못 했었다.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즉시 화제전환을 했을 테지만, 그렌드윈이 묘하게 집착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보통은 좀 더 의식의 흐름 따라 주제를 바꿔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렌드윈이 주제를 물고 늘어진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어쩌면 휩쓸린척하며 그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거였을 수도.

“그게 사랑입니까?”

“확신할 순 없지만 그게 사랑일 가능성이 높지.”

충성심이랑 사랑도 착각하는 마당에 다른 감정과 착각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확신을 담지 않았다.

“…….”

또 침묵.

이젠 그렌드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됐다. 나는 생각에 잠겨 있는 그렌드윈을 불렀다. 티타임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질 것 같아서.

“오늘 공작가에 방문해줘서 너무 고마웠고, 도와준 은혜는 잊지 않을게.”

뜬금없이 연애 이야기로 샜으나 어쨌든 오늘 그렌드윈이 공작가에 방문한 목적은 황후와 티타임을 가진 내가 걱정되어서였으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파하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티타임을 끝내겠다는 인사에 정신을 찾은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 없는데.

“들어보고.”

바로 거절하진 못하고 질문부터 듣겠다고 하자 잠깐 뜸 들이던 그렌드윈이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응.”

침묵해봤자 아까처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즉답했다. 그렌드윈의 무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황태자님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지.

헬리오스와 나 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그가 무슨 근거로 헬리오스를 들먹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 질문은 아까 끝났지?”

그렌드윈의 마지막 질문에 이미 대답했으니.

단호하게 선을 긋자 호수처럼 잔잔한 눈동자에 얕은 파문이 일어났다. 왠지 내 표정을 읽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건 간단했으나 그렌드윈과 내가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 중에서 헬리오스를 빼면 내가 좋아할 상대가 금방 들통날 것 같아서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그렌드윈이 다른 곳에서 떠들고 다니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시리우스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내가 시리우스에게 가진 감정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사람은 시리우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금 더 집요하게 캐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서자 그는 괜찮다며 나를 만류했다. 어제부터 정신없이 몰아닥치는 일 때문에 피곤했기에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 혹시라도 열이 나시거나 어디 아프시면 말씀해주세요.”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렌드윈은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스쳐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왜? 요즘 감기가 유행이래?”

독감 철은 아닐 텐데.

겨울도 다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하다고는 하나 감기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렌드윈은 문 앞에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의 시선에 내게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황후 폐하와 티타임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해서요.”

자신의 할 말을 전부 했는지 그렌드윈은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 망설임 없이 나갔다. 나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봤다. 어쩌면 그렌드윈이 걱정한 ‘별일’이 이거였을까?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대답을 들을 방법은 없었다.

‘치사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냐.’

그래도 그렌드윈이 황후의 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황후 쪽 사람이었다면 굳이 나를 걱정해서 공작가에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였겠지. 황후와 연관되지 않은 척하며 나를 불러 다시 금제를 걸려고 했을 테니.

‘그리고 그렌드윈은 황후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면 나를 찾아와서 저런 언질을 줄 리 없으니.

거기다 그렌드윈이 독단적으로 황후를 조사하는 건 아닐 것 같았다. 아마 헬리오스와 관련됐겠지.

‘헬리오스가 황후를 의심하고 있다는 건가.’

아카데미 테러 사건 때, 헬리오스는 황후의 편지를 받고 움직였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헬리오스는 황후의 계획을 알든 모르든 그녀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정해야겠군. 헬리오스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황후를 조사하고 있다면 그와 한번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었다.

“새로 차를 준비해드릴까요?”

내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대기하고 있던 마리가 다가와서 식어버린 차를 치우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일어섰다. 피곤하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

“아리엘 아가씨가 돌아오셨습니다.”

방에서 검성의 편지를 읽고 있었는데 데이지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아리엘이 돌아오면 알려달라고 해놨기 때문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오늘 아리엘과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다짐했으나 편지까지 읽고 나자 그녀와 대화까지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아라네아의 점이 모이는 곳을 찾아냈다니.’

조직의 크기도 조직원들의 신분도 전혀 알 수 없는 점조직이지만 통솔하는 관리자는 반드시 있었다. 나는 당연히 황후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라면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관리할 거라고 추측했으나 틀렸다.

[슈델리안 거리에 위치한 꽃집 ‘테라리움’사장이 아라네아 관리자라 판단됨.]

나보고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검성의 편지는 아라네아에 관한 보고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아라네아의 대략적인 규모와 위치, 그리고 그들의 정보가 모이는 곳까지. 그가 어떤 정보망을 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태도 알 수 없도록 퍼져있는 조직을 이 정도까지 파악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원작엔 없던 내용.’

꽃집은 물론이고 아라네아조차 등장한 적 없었다.

그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여태껏 원작의 정보에 편승해서 결론을 유추했다면 이제는 검성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생각해서 결론을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라네아를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조직은 아마도 황후의 눈과 귀.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베스트이다. 그러나 점조직이 왜 점조직이겠는가. 다른 세력이 아라네아를 알아내더라도 조사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검성이 찾은 꽃집 사장도 아라네아를 전부 관리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지부장쯤 되겠지. 수도 쪽 아라네아를 관리하는 관리자.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지역마다 한 명 정도 관리자가 배치되어있고, 그들의 정보가 황후에게 전달될 것이다.

‘전면전도 힘들어.’

검성이 보낸 정보들을 봤을 때 그가 조사한 아라네아의 조직은 제국 전체가 아니라 수도에 국한됐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게 다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렌드윈이 던지고 간 말도 의미심장했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그럴싸한 해결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루카리온 님에게 답장을 하자.’

나는 아라네아의 위에 황후가 있을 거라 예상하지만 검성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위에 황실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한다면 황후를 조사하는데 수월해질 테지만 내겐 아직 황후를 콕 집어서 흑막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심증뿐.

‘금제에 당할 뻔한 것도 확정적인 물증은 아니지. 심증에 가까운 증거. 하지만 루카리온 님이라면 믿어주지 않을까.’

안 믿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에게 황후가 흑막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괜찮겠지. 나는 황후와의 독대 내용을 상세하게 적어 내려갔다. 이 편지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정보라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아가씨, 저녁 시간입니다.”

“알겠어. 내려갈게. 그리고 이거 아카데미로 붙여줘.”

아라네아와 황후에 대한 생각을 하며 검성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사라진 저녁이었다. 나는 때마침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러 온 마리에게 편지를 부탁했다.

‘과연 황후를 의심 할까?’

검성이 내 편지를 보고 황후를 의심한다면 앞으로 조사 할 때 범위가 줄어들어 수월해질 것이다. 황실 전체의 연관성이 아니라 황후와의 연관성 위주로 조사하면 될 테니. 나는 식당으로 내려가며 조만간 공작과 이 주제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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