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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우스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이내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령을 풀어주진 않았으나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의미였다. 주먹에 들어갔던 힘도 살짝 풀렸다.
“아파 죽는줄!”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지 정령은 아프다며 투덜거렸다. 그 외침에 시리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꽈악’ 하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아! 아프다고! 착한 인간! 나쁜 인간이 자꾸 나를 괴롭힌다!”
“…….”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던 정령은 의외로 영악했다. 시리우스가 내게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내게 고자질했으니.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시리우스는 내 눈치를 보며 손에 힘을 슬쩍 풀었다.
“흐응. 착한 인간이 나쁜 인간보다 강해서 여태껏 내가 착한 인간에게 가는 것을 막은 거구나! 이 간악한 인간!”
정령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나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시리우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기에. 시리우스는 고분고분히 자리에 앉았다.
“자, 정리 좀 하고 가자. 그 손에 잡힌 정령은 시리우스의 저주에 이용됐던 정령이라고?”
“네.”
“그렇다!”
그래. 그 정령이 나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계약을 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거고. 내가 그들의 대답을 이어 말하자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습은 안 보였으나 정령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겠지.
“그런데 시리우스는 왜 막은 거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의문이었다.
정령이란 본디 자연물에서 비롯된다. 마법에 비해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다양한 속성을 가진 정령들이 존재하고 그나마 흔하게 볼 수 있는 정령이 물, 불, 바람, 대지 이렇게 사대 정령이다. 그 밖에도 매우 희귀하지만 빛이나 어둠 속성 등 인간이 잘 알지 못하는 종류의 정령들도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다.
‘정령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호기심이나 장난기는 있어도 나쁜 정령은 없다.’
세상에 나쁜 정령은 없다.
정령은 순수했다. 인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 나쁜 짓을 하는 정령이 있지만 그건 인간의 기준이었다.
인간이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은 대부분 법에 어긋나는 것들이다. 공동체를 통제하기 위한 법이 정령에게 통할 리 없지 않은가. 애초에 정령에겐 옳고 그름이나 착함과 나쁨이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개념도 없었고. 그들이 인간에게 나쁜 짓을 했다면 순수한 호기심이나 가벼운 장난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정말 별거 아닌 일일 테니. 정령에게는 순수함이 힘의 원천이었다.
‘그렇기에 타락하면 이지를 상실하고 소멸한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정령이 눈앞에 있는 정령일 것이다. 직접 경험했으니. 그 때문에 내게 은혜를 갚겠다고 찾아온 거지. 즉, 정령과 계약은 내게 이로운 일이었지 절대 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전부 알고 있는 시리우스가 나와 정령이 계약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세르니아 님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
정령과 계약하는 것이 어째서 위험일까. 나는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정령과 계약하면 내게 무슨 위험에 빠지는 거야?”
“제 어머니께 누가 저주를 걸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황후겠지.
이 사실은 원작을 알고 있는 나뿐만 아니라 그 시기에 사교활동을 했던 귀족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다. 당시에도 의문스러운 황비의 죽음에 대해 다양한 소문이 궁내에서 돌았는데 그중 황후가 황비를 저주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가장 컸다고 했다.
물론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기에 소문은 금방 사그라졌고, 불길한 색을 가지고 태어난 시리우스는 황궁에서 철저하게 은폐됐다. 황비의 가문은 힘이 없었고, 태어난 황자마저 황제의 눈 밖에 났으니 더 이상 황비의 죽음을 물고 늘어질 순 없었다. 아니. 그들조차 시리우스를 버린 것이겠지.
“다들 쉬쉬하고 있으나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죠. 저도 그 사람이 저주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시리우스는 황후를 입에 담지 않았다. 보안이 철저한 공작가임에도 에둘러 말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따로 조사하고 있긴 하나 만약 정말 그 사람이라면 정령을 알아보겠죠. 자신이 저주에 사용한 정령이었다는 것을. 세르니아 님이 이 정령과 계약이라도 했다가 괜히 그 사람과 엮일까 봐 걱정됩니다.”
“아…….”
황후가 위험하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나와 정령이 만나지 못하도록 한 시리우스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내 생각이 짧았다. 단순하게 정령과 계약해서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반대로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다른 정령도 아니고 시리우스의 저주에 이용됐던 정령이니 황후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 사람이라면 붉은 눈을 한 여자야?”
“알고 있어?”
얌전히 있던 정령이 끼어들었다.
붉은 눈의 여자. 정령도 황후를 알고 있는 건가.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이 기분 좋은 정령은 흡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그 여자가 나를 가뒀는걸.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자가 노린 건 내가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말이지.”
정령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은 시리우스였다. 그는 스산한 눈으로 손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위협이었으나 전혀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정령은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풀어주면 이야기해 줄……. 아야야!”
“…….”
시리우스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자기 무덤을 파는 게 꼭 날 닮았군. 왠지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시리우스 진정해. 어차피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 놓고, 천천히 대화하자.”
“역시 착한 인간은 내 편이구나! 아야야! 아프다고!”
“…….”
내가 말리려 했으나 정령의 깐죽거림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하지만 시리우스도 계속 압박해봤자 얻는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마지막으로 힘을 꽉 줬다가 손을 풀었다. 자유를 찾아서 신난 정령이 꺄르륵 웃으며 방 안을 날아다녔다.
“그리고 너도 좀 조용히 하고. 다른 사람 깨면 안 되니까.”
“알겠어! 조용히 할게!”
대답도 조용히 해주라.
시리우스의 시선이 내 오른쪽 어깨에 향했다. 느낌은 없지만 지금 정령이 내 어깨 위에 있는 걸까. 나도 오른쪽 어깨를 봤지만 원래 정령의 모습도 안 보였고, 시선을 어깨에 두려니 목 아파서 포기했다.
“흠, 설명하자면 길고 긴 이야기야. 착한 인간! 우리가 아까 하던 대화 기억나?”
아까 하던 대화? 대화 주제가 너무 정신없이 이리저리 튀어서 기억나는 게 별로 없었다. 전제를 잘라먹은 정령의 말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는데 시리우스까지 나타나서.
“착한 인간은 기억력이 별로 안 좋네.”
너에게 지적받고 싶진 않거든!
울컥했으나 태클 걸어 봤자 쓸데없는 사담만 길어질 게 뻔했기에 나는 꾹 참았다.
“마력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아.”
그랬었다. 뜬금없이 친화력 없는 내게 특별하다며,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며 말한 정령은 내가 뭐가 특별하고 뭐가 연결되어 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궁금증만 증폭시키는 정령의 어휘력에 답답해하던 타이밍에 시리우스가 나타나서 대화마저 중단됐었지.
“인간들이 저주를 마치 마법과 다른 것처럼 말하지만 저주도 결국 마법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마력을 사용하지! 대신 대가를 통해 사용되는 마력을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것이고.”
정말 정령의 대화는 종잡을 수 없었다.
황후가 노렸던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물었는데 어째서 아까 나누던 이야기로 돌아간 걸까. 순서대로 알려주면 이해하기 편할 텐데 정령은 뒤죽박죽으로 대화를 했다. 1부터 9까지를 설명하는데 9부터 알려주는 느낌!
“그것도 저주를 거는 인간과 저주를 받는 인간에게 둘 다 있어야 해.”
그럼 저주는 일반적인 사람은 걸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평민들은 마력의 존재는커녕 마법의 존재 자체도 잘 모른다. 귀족들은 그나마 실제로 마법사를 만나거나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마법 이론 수업을 듣기도 해서 마법에 대한 기초 지식을 알고 있으나 마력을 느끼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에 정령의 말대로라면 저주는 매우 희박한 확률로 성립되는 마법이어야 했다.
‘그래서 유모도 저주에 실패한 건가?’
아닌데. 공작이 분명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가 발동되지 않았다고 했었다. 중구난방 이어지는 정령의 설명과 달리 차근차근 설명해준 공작의 설명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보통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 양의 차이는 있을 뿐, 착한 인간에게도 마력이 있어! 비록 코털보다 작지만.”
욕이지? 약간 욕 같은데. 먼지라든가 속눈썹도 있는데 굳이 코털에 비유하다니. 정령이 눈에 보였다면 딱밤이라도 한 대 먹였을 텐데.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인간들은 저주가 대가만 지불하면 마력 없이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잘못됐다는 거지!”
“시리우스는 알고 있었어?”
“어느 정도는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미약한 양이더라도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저주를 사용할 때 마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정령이 설명했던 거 전부 알고 있었다는 뜻이군.
하긴, 원작에서 아리엘은 데이지에게 저주를 걸었었다. 마력을 못 느끼고 마법사 재능도 없는 아리엘이 저주를 걸었기 때문에 저주는 마력 없이 쓸 수 있는 마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령의 설명이 진짜라면 코털만 한 마력이라도 있어야 저주를 걸 수 있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