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89화 (8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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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미약한 양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결국 저주는 대가만 지불하면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잖아.’

빙빙 돌려 말한 이야기는 들을 필요 없었던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저주의 이론을 거창하게 말했으나 굳이 모르더라도 상관없는 사실 같았다.

“그런데 가끔 코털만 한 마력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는 인간이 있어. 코털만큼 가지고 있든 완전히 안 가지고 있든 인간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별로 차이가 없겠지만 그런 인간은 저주가 안 통하는 특이한 체질인 거지.”

“저주가 통하지 않으면 좋은 거잖아.”

코털만 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완전히 없어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똑같다면 완전히 없는 편이 이득이었다. 적어도 저주가 안 통하니까.

“그래. 저주를 받는 입장에서는 좋을 거야. 근데 거는 쪽이라면?”

“안 좋아하겠지.”

“맞아.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저주가 통하지 않는 체질을 가진 인간에게도 저주를 걸려 했어.”

“설마?”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했던 설명이 이야기의 ‘전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령이 진짜 하려고 했던 말.

“착한 인간 기억력은 나쁜데 이해력은 좋네! 그 눈을 보아하니 내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렸군!”

“정령을 이용한 저주는 그 때문인 거야?”

구하기도 힘든 정령을 굳이 저주의 매개체로 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정령을 이용하더라도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그대로였기에. 나는 황후가 황비에게 정령을 이용해서 저주를 건 것이 소설 속 서브 남주에게 특별함을 부여하기 위함이거나 시리우스가 데이지에게 끌릴 개연성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다.

‘아니면 해주를 어렵게 하기 위해라거나.’

전부 틀렸다. 소설적 요소를 위한 작가의 안배가 아니라 그저 황비가 저주가 통하지 않는 체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여자가 노린 건 내가 아니라 타나토스였지만.”

“타나토스는 누군데?”

두 번이나 언급된 이름.

그의 정체도 궁금했으나 황후가 어떤 함정을 팠는지도 궁금했다.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불러낼 수 있었나?

“내 쌍둥이야!”

“정령인데 쌍둥이라고?”

“정령도 형제나 자매가 있다고! 착한 인간은 정령을 너무 모르네!”

정령을 잘 모르는 부분은 인정.

그렇지만 정령의 제일 위에는 정령왕이 있고 그 아래로 등급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힘이 달라지는 것도. 저번에 내 정령 친화력을 확인하러 왔던 정령술사가 말해준 사실이었다.

‘그때 정령술사가 정령은 자연물에서 태어난다고 말했었는데.’

내 의아한 시선을 눈치챈 시리우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령의 말이 맞다고.

“흥. 하급 정령들이야 자연물에서 태어나지. 나같이 최상급 정령은 왕이 직접 힘을 하사하신다고!”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보이진 않았으나 왠지 허리에 팔을 올리고 가슴을 내밀며 말했을 거 같은데.

“너 최상급 정령이었어?”

“그래! 굉장하지?”

의외네.

하는 짓이 영, 최상급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하급 정령은 대부분 자연물에서 태어난 사대 정령이었다. 빛이나 어둠 속성을 가진 정령은 그보다 한 단계 위인 중급 정령. 최상급 정령은 자연물에 국한되지 않고, 각각 고유의 특성을 가진 정령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역사 속에도 기록을 찾아보기 힘든 최상급 정령. 가장 유명한 최상급 정령이 쾌락의 정령 ‘아타락시아’다. 30년 전에 한 정령술사가 소환해서 계약에 성공했다고 전해지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

‘그러고 보니 원작에 등장했던 데이지와 계약한 정령 ‘엘리사’도 최상급 정령이었어.’

무슨 정령이었지?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생각나지 않았다. 엘리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 정령이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라며 말을 덧붙였다.

“붉은 눈의 여자는 내 쌍둥이 정령인 타나토스를 소환하려고 했어. 정령을 매개로 저주를 걸 땐 상성이 중요하거든! 예를 들어 시야를 차단하는 저주를 걸 때는 어둠의 정령을 매개로 해야 하거나 귀를 먹게 하는 저주를 걸 때는 바람의 정령이나 음파의 정령을 매개로 해야 하지! 뭐, 가벼운 저주는 상성을 안 따져도 되지만 그 여자가 거는 저주는 영혼을 속박하는 저주. 고서클 마법이라서 상성이 중요했는데 내가 소환돼서 엄청 당황했다니까!”

그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라며 까르륵 웃는 정령.

이 이야기는 시리우스도 처음 듣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정령과 대화가 먼저였다.

“어쨌든! 그 여자가 어쩔 수 없다며 타나토스 대신 나를 저주의 매개로 사용했고 나는 긴 시간 동안 저주 때문에 나쁜 인간의 몸속에 있었어. 아마 내가 타락해서 완전히 소멸했으면 저 인간도 죽었겠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시리우스뿐만 아니라 정령도 같이 죽는 거였다니.

“그런데 나를 묶고 있던 저주가 풀리면서 이상하게 너와 연결된 거야!”

“뭐가 연결됐는데?”

“마력이! 저주가 계약 마법이라고 했잖아. 보통은 저주가 풀리면 저주에 사용됐던 마력은 대기 중에 흩어지는데 어째서인지 그 마력의 일부가 너에게 들어갔어!”

“저주에 사용된 마력을 내가 흡수했다고? 그거 나쁜 거 아니야?”

저주면 왠지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 황후의 마력이라면 더더욱!

나는 팔을 들며 이곳저곳을 훑었으나 흡수됐다는 마력이 내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거기다 마력이라니. 황비가 마력이 없는 체질이라 정령을 이용했는데 마력이 있나? 나는 새로운 질문을 하려고 했으나 나보다 빠르게 정령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아니야! 인간이 저주라고 부르는 것뿐 그냥 계약 마법이라고! 그 여자의 마력이었지만 저주가 성립되면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될 평범한 마력!”

“아까 마력이 없는 체질에 저주를 걸기 위해 정령을 매개로 한다고 말했잖아. 그럼 마력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저주는 쌍방! 나는 마력이 없는 인간의 마력을 대체하는 부품이고 저주를 걸었던 그 여자는 자신의 마력을 소모했어.”

“만약 둘 다 마력이 없다면 정령이 두 명이나 필요한 거야!?”

“그렇게 되겠지. 그렇게 해서 저주를 걸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지만.”

거참 복잡하구만!

마법 기초 이론이 인수분해였다면 정령이 설명해주는 저주 이론은 미적분 같은 느낌! 그래도 몇 번의 반복된 설명 끝에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내가 시리우스와 육체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저주가 풀려서 공기 중에 흩어져야 했을 마력 일부가 내게 흡수된 건가?’

어디까지 추측이었으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 하필 지금 그걸 떠올려서. 시리우스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어두워서 빨개진 내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세르니아 님 왜 그러십니까? 얼굴이 빨갛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시리우스가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착한 인간 어디 아픈 거야?”

“아, 그, 나는 저주를 풀어줘서 착한 인간이라 부르는 거지? 시리우스는 왜 나쁜 인간이야?”

나는 황급히 주제를 바꿨다.

원래 궁금하긴 했으나 진지한 이야기의 연속이라 쉽사리 던지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다급하게 대화의 흐름을 바꾸려다 보니 말이 막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나쁜 인간이 나빠서다!”

정령이 순수한 존재라 감사합니다.

내가 유도한 대로 간단하게 넘어온 정령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티 안 나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령의 조잘거림을 경청했다.

“저주가 풀리고 바로 착한 인간을 찾아가서 은혜를 갚으려고 했는데 나를 가뒀다! 새장에! 최상급 정령인 나를 고작 새장에! 심지어 감금 마법까지 걸어서!”

많이 화났나 보다.

악센트가 강, 강, 강, 강인데. 정령이 쌓아뒀던 화를 터트렸으나 시리우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선이 내게 고정된 채로.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맥박이 빨라졌다. 심장아 나대지 마. 아직 아니야. 나는 정령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계약하자.”

시리우스에 관한 불평을 속사포처럼 뱉어내던 정령의 말이 뚝 끊겼다.

“좋아!”

“세르니아 님!”

밝아진 정령의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나를 말리려던 시리우스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시리우스, 나는 너무 약해. 어제 티타임 때도 너와 헬리오스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하지만 제가 가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알고 있다. 시리우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자신과 엮여서 내가 위험에 빠질까 봐 계약을 말리는 것이다. 정령도 황후도 모두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리우스 혼자 모든 문제를 짊어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도 그럴 거라는 확신은 할 수 없어.”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르니아 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정령과 계약은 재고해주십시오.”

“예전에도 말했지? 자신을 좀 더 소중하게 여겨달라고.”

그때는 직업병에서 비롯된 의무감과 작은 동정에서 뱉은 말이었다. 그저 제자를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됐네.’

시리우스가 나 때문에 다치지 않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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