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0화 (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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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은 시리우스와 같으리라. 자신 때문에 상대가 위험에 빠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시리우스에게 다가갔다.

무지개 색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마치 달빛으로 실을 뽑아 만든 것 같았다. 나는 문스톤처럼 부드럽게 빛나는 은발을 쓰다듬었다. 시리우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서 기분은 좋지만 그대로 내색 할 수 없어 참는 표정. 그 모습이 귀여웠다.

“기억하고 있어?”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어느새 전부를 적시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형태의 비는 그 날부터 시작됐을지도. 나도 모르는 사이 젖어 든 빗물을 깨달았을 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 날을 떠올렸더니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약속해줘. 앞으로도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겠다고. 약속을 지키면 나도 네가 그때 했던 부탁 들어줄게.”

“그때 했던 부탁이라니…….”

얌전히 내 손길을 받던 시리우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분홍색 눈동자에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너무하네. 그 날은 나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약간 억울한 감정이 불쑥 솟았다.

“기억 안나? 네가 무릎 꿇고 내게 애원했잖아. 도망가지 말아달라고.”

“아…….”

나는 시리우스의 옆 머리카락을 잡았다.

남자치고는 긴 편이었으나 목덜미를 살짝 덮는 길이였기에 내가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그날 시리우스가 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은 시리우스의 머리카락의 촉감이 좋았다.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 도망 안 갈게.”

“…….”

나는 앉아 있는 시리우스의 눈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일부러 귓가에 속삭였다. 시리우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뭐지, 모자란가? 나는 분홍색 눈동자 앞에서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순해 보이는 얼굴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린 미소!

‘이 정도면 넘어와 줄 만한데.’

그랬다. 의도한 행동이었다. 정령과 계약을 위한 미인계!

내가 시리우스에게 무른 것처럼 시리우스도 나를 좋아한다면 통할 거라 생각했기에. 아니 왜 반응이 없지?

“시…….”

“시?”

겨우 입을 여는가 싶더니 다시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평소에는 서늘한 손끝에 옅은 열기가 감돌았다. 그는 내가 예전에 했던 대로 살며시 볼을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열기는 손끝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눈을 다시 마주본 순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에 해롭습니다. 유혹을 하시려면 각오를 해주세요. 다음에는 못 참을 수도 있습니다.”

“각오라니?”

미인계를 쓰는데 무슨 각오를 해야 할까.

볼을 만지작거리는 시리우스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서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가 뺨을 계속 만지니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아서. 심장에 해롭다는 건 나도 몇 번 느낀 적 있어서 이해할 수 있지만 뜬금없이 각오 타령 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시리우스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 타이밍에 키스야?’

각오는 키스를 말했던 건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부끄러워서 피하고 싶으나 아까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사실 조금 좋았고.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시리우스의 입술은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

“침대에서 제게 안길 각오 말입니다.”

“!”

“세르니아 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으나 지금 키스를 하면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서요.”

차, 창피해!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을 읽고 있는 거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내가 미인계를 사용했는데 어째서 역으로 당하는 걸까.

“세르니아 님이 그토록 정령과 계약을 원하신다면 더 이상 막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최선을 다해 세르니아 님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저를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그러니 세르니아 님도 약속을 지켜주세요.”

할 말을 마친 시리우스는 상큼하게 웃으며 텔레포트 했다. 아, 졌다. 원하는 것은 이뤘으나 결과적으로 진 느낌이었다. 또 할 말만 하고 사라진 시리우스였으나 지금 심정으로는 그래줘서 다행이었다. 이 상태로 더 같이 있는 건 무리!

“착한 인간 괜찮아?”

괜찮지 않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더니 정령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이 녀석 분위기 파악 못 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중요한 부분에서는 얌전히 있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부끄러움을 밀어냈다.

“그래서 계약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이름을 말해줘!”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야.”

“나는 최상급 정령 히프노스. 그대의 부름에 따라 여기에 왔다. 조건은 성립됐으니 그대는 나의 계약자임을 인정한다.”

장난기 많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 복잡한 문양이었으나 예전에 정령술과 관련된 고서적에서 봤던 소환진이었다. 너무 복잡해서 정확한 모양은 기억 못하지만 느낌상 그렇지 않을까.

“히프노스……?”

소환진에서 나던 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눈앞에 있는 존재가 시야에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정령은 반인 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에 가까웠으나 등에 달린 천사 날개나 새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비둘기?’

머리카락이 회색인 것도 한몫했다.

얼굴은 볼 살 통통한 어린 천사 같은데. 땅에 끌릴 만큼 긴 회색 머리카락에 새카만 눈동자는 비둘기를 연상시켰다.

“세르니아! 드디어 내가 보이는구나. 너무 기뻐!”

“으응, 신기하네. 나는 정령은 요정 날개나 아니면 날개 없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기억을 잃기 전 데이지가 소환했던 운디네는 작지만 성인 여성의 외형이었다. 몸 물로 이루어진 운디네는 피부나 머리카락 전부 파란색이었다. 불의 정령이나 바람의 정령도 각각 자연물로 이루어진 외형이 특징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너는 무슨 정령이야?”

당연히 바람의 정령이라고 생각했는데 묘하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잠의 정령!”

“뭐?”

그런 정령이 필요해?

내 귀를 의심하고 다시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잠의 정령이라니 그게 뭐야.

‘아니야. 진정하자. 그래도 최상급 정령이니 강할 거야.’

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히프노스에게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누구든 재울 수 있어! 불면증에도 좋고! 잠이 안 오는 밤엔 나를 불러줘!”

희망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리우스에게 미인계를 펼쳐가며 계약한 보람이 없잖아. 오늘 흑역사 하나가 또 늘었는데 대가가 이거라니. 이제 내 무덤을 너무 파서 내핵까지 뚫을 기세였다.

“나쁜 인간도 사라졌고, 세르니아랑 계약도 했으니 나는 잠깐 정령계에 갔다 올게. 내 쌍둥이 동생이 걱정하고 있을 거 같아서!”

“그래. 천천히 갔다와.”

“필요할 때는 내 이름을 불러! 마음속으로 외쳐도 괜찮아. 나를 이미지 하며 부르면 내가 소환되니까!”

“알겠어.”

부를 일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힘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 히프노스도 사라지자 방 안은 고요해졌다. 허탈했다. 무슨 함정카드도 아니고, 최상급 잠의 정령이라니 들어본 적 없다고!

‘잠이나 자자.’

현실도피에는 잠이 최고였기에.

***

어젯밤, 정령의 등장 탓에 피곤했는지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나를 깨우러 온 데이지가 공작과 공작부인은 이미 아침 식사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피곤해.’

그녀가 준비한 은 대야에서 세수를 하고 겨우 잠기운을 몰아낼 수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아침을 거르고 잠을 더 자고 싶었으나 아리엘의 얼굴을 봐야 했다. 나는 잠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리엘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잘 돌려 말하기 위해 이것저것 생각하며.

‘어제도 못 봤으니 오늘은 꼭 대화를 나눠야지.’

억지로 카나린의 사정을 이해시키거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왜 탐탁지 않아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처음에는 카나린이 나를 밀었던 사건 때문에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건가 싶었지만 아리엘은 뒤끝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카나린을 용서한 시점에서 그녀의 감정도 풀려야 했다.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독점욕이었다. 아리엘에게 나는 큰 존재였으니. 어릴 적부터 에리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내가 친하게 지내면 질투를 하곤 했었다.

‘음, 하지만 이것도 아닌 느낌.’

내 눈엔 아직 아이 같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호자의 마음이었고, 그녀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정신적으로도 성장했다. 예전엔 언제나 내게 의존했다면 이젠 그녀가 내게 의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렇다면 대체 이유가 뭘까.

‘무작정 말을 꺼낼 경우, 카나린을 감싸고 아리엘을 나무라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에 들어섰으나 아리엘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아리와 엘은?”

“에리얼 도련님은 아침 훈련이 늦어져서 아침을 거르셨고, 아리엘 아가씨는 몸이 아프셔서 방에 계십니다.”

“아프다니……. 어디가? 많이 아파? 의원은?”

아리엘이 아프다는 소리에 나는 속사포로 질문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입맛 없다고 저녁을 안 먹었었는데. 어제부터 상태가 안 좋았던 걸까.

“아침에 의원님이 진찰하셨고, 감기 증상 같다고 합니다. 열이 많이 난다고 들었습니다. 세르니아 아가씨 일단 식사 먼저 하시고 아리엘 아가씨 방으로…….”

데이지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나는 데이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을 돌려 아리엘의 방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올라간 아리엘의 방문을 열자 마리가 물수건으로 아리엘의 땀을 닦고 있었다.

“약은?”

“방금 복용하셨습니다.”

누워있는 아리엘은 열이 높은지 잠든 상태에서도 끙끙거리며 가쁜 숨을 뱉었다. 두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식은땀을 흘렸다. 가벼운 감기가 아니었다.

“아리…….”

겨울도 다 갔는데 독감이라니.

아리엘에게 다가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정리했다. 최근 카나린이나 시리우스 때문에 아리엘에게 신경을 못 쓴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이리도 심한 감기라면 분명 전조증상이 있었을 텐데.

‘아리는 아파도 내게 내색하지 않으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래 튼튼한 아이라 크게 아픈 적이 거의 없었기에 더 걱정됐다.

‘아, 혹시라도 열이 나시거나 어디 아프시면 말씀해주세요.’

문득 귓가에 그렌드윈의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황후 폐하와 티타임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해서요.’

설마. 아닐 것이다. 아리엘이 황후를 만났다니. 아무 접점도 없었는데 갑자기 황후를 만났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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