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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견제하는 이유를 물어볼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까?’
질문할 수 있는 횟수가 더 많았다면 차례대로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세 번. 두 질문은 같은 맥락이지만 조금 달랐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경우 의심하고 있다거나 적대하고 있다는 식으로 축약해서 말하면 두 번째 질문에 이유를 물어야 했다. 그렇다고 견제하는 이유만을 물었을 때는 견제하고 있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질문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같은 맥락의 질문으로 두 개를 날리느냐 아예 잘못 짚어서 한 개의 질문을 날리느냐. 고민은 짧았다.
“황태자님이 황후 폐하를 견제하는 자세한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개수가 정해져 있으니 하나를 날리는 게 나았고, 정황상 헬리오스가 황후를 견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질문에 ‘자세한’을 덧붙여 두루뭉술한 대답을 못 하도록 미연에 방지했다. 헬리오스의 금안이 흔들렸다. 그도 내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거라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후…….”
헬리오스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마주 보던 금색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깊은 회상에 잠긴 것처럼.
“이런 질문을 할 줄이야. 그대는 역시 재밌어.”
“…….”
“자세히라고 했으니 꽤나 긴 이야기가 되겠군.”
헬리오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된 과거의 일이었다.
“내가 4살쯤이었다. 한창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흐르던 시절이었지. 시종들의 눈을 피해 혼자서 황궁 탐험을 하다가 창문 밖으로 떨어졌었다. 기억이 흐릿해서 몇 층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떨어지는 나를 받아서 조심하라고 알려준 사람.”
로브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고 한다.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색조차 알 수 없었으나 목소리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어쨌든 그녀는 헬리오스가 곤란하거나 위험할 때마다 그를 구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수호자라고 불렀다.”
이번에도 내가 모르는 인물. 머리카락 색이나 얼굴도 모르니 도저히 유추할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수호자라……. 황후 쪽 사람일 수도 있지 않나?’
의문은 들었으나 헬리오스의 말에 끼어들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수호자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0살, 시리우스의 궁을 발견한 다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리우스 궁을 알려준 사람이 수호자였지.”
그의 말을 듣자 묘한 감정이 들었다. 뭐라 콕 집어서 명칭 할 수 없는 감정이었으나 황후를 떠올렸을 때 드는 불안함과는 조금 달랐다. 황후와 관련된 불안함은 뒤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불안함, 반면 수호자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감정은 불편함에 가까웠다.
“시리우스의 존재를 알려준 수호자는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님을 믿지 말라고 말했지. 어머님은 절대 나의 편이 아니니 자신을 지킬 힘을 키우라고 당부하고 사라졌다. 나는 그때부터 황궁에 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녀를 그렇게 믿는 이유가 뭔가요? 만약 수호자라는 사람이 황후 폐하와 당신을 이간질하려는 세력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두 번째 질문인가?”
“…….”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수호자와 헬리오스의 관계가 궁금하긴 했으나 두 번째 질문을 쓸 정도로 가치가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하지만 이해가 안 돼. 아무리 어릴 적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라지만 그렇게 신뢰할 수 있나?’
보통은 신분도 알 수 없는 사람보다 어머니 쪽을 더 믿을 텐데. 수호자라고 칭한 자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축약한 걸까? 헬리오스의 본심을 읽기 위해 금안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사실은 없었다.
“음, 일단 황태자님이 두 번째 질문을 해주세요.”
수호자에 관해 궁금한 점이 많았으나 질문은 신중하게 해야 했다.
어쨌든 내게 중요한 것은 ‘헬리오스가 황후의 꼭두각시가 아닌지’와 ‘그가 황후를 얼마나 견제하고 있는가’이다. 나는 황후가 최종 흑막이고, 제국을 브릴리언 왕국에 넘기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판단을 내린 상태다. 그러므로 나는 황후가 국외로 추방되길 바란다.
‘그 과정에 폐위당하겠지.’
친어머니가 그렇게 되는 것을 순순히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황후의 편으로 돌아설 것인가. 남은 두 질문으로 꼭 알아야 할 문제였다.
“원래 진실의 맹세를 하면 묻는 말은 정해져 있지만 너에겐 다른 것을 묻겠다. 헤르세, 상관없지?”
“황태자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헤르세가 참모 역할인가.
생각보다 헬리오스의 세력에서 그의 지분이 큰가 보다. 나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세 가지 질문을 정한 사람이 헤르세라는 것도.
“너는 아카데미 테러 사건이 황실과 연관 있다고 했었지. 나는 당시 학생이라서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아카데미 측에서 공식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뭔가 찝찝했거든. 내가 모르는 뭔가 더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 아카데미 테러 사건에 관해 내가 모르는 모든 것들을 말해줘.”
그는 아카데미 테러 사건에 대해 물었다. 그 사건의 진실은 나와 원장님, 검성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시리우스도 알고 있었지만 그건 일부분에 불과했다. 잠깐. 헬리오스의 말대로 그가 10살 때 수호자의 말을 믿고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면 아카데미 테러 사건 때 그는 이미 황후를 견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 내가 배후에 황실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떡밥을 던질 때 기분 나쁘다는 듯이 반응한 것은 연기였던 거야?’
소름 돋았다. 내가 그에게 힌트를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내가 헬리오스에게 시험당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가늠하고 있었을 테지. 황후의 편지를 받고 움직였다고 했던 말은 진짜였을까. 그의 질문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원작에 가려진 부분이 너무 많았다. 헬리오스가 황후를 견제한다지만 내가 믿어도 되는 걸까. 수호자가 또 다른 흑막일 가능성은? 상념에 잠긴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헬리오스가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땐 너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나도 연기를 한 거였다. 어머님의 편지를 받고 움직인 것도 사실이었고. 혹시나 네가 어머님이 보낸 감시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도 들었거든. 편지와 동시에 네가 아카데미로 왔으니 의심할 만한 상황이지 않은가?”
“아…….”
확실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납득은 가지만 믿음은 가지 않았다. 검성에 대한 건 아직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심장이 걸려있어서 뺄 수도 없었다. 다만 그의 질문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테러 사건’이라는 범위. 원작이나 현재 검성이 아라네아를 쫓고 있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아라네아의 존재는 말해야겠지만.’
문제는 헤르세이다.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만약 아라네아 소속일 경우 그들의 존재를 밝힘으로써 경계심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헬리오스를 100% 믿는 것도 아니었지만 앞의 질문을 통해 그가 진심으로 황후와 척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아라네아의 존재 정도는 말해도 될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뭐지?”
“그때 알아낸 사실은 꽤나 중요한 사실이라서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겐 발설할 수 없습니다.”
“음, 그건 곤란하군. 서로 신뢰를 다지기 위해 진실의 맹세까지 해서 속내를 떠보고 있는 건데 여기서 신뢰가 없어서 말 못 한다고 하면 오히려 불신을 키우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금 진실의 맹세를 하고 있는 황태자님에게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종이에 적고, 바로 태우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여기 있는 둘도 너와 같이 진실의 맹세를 하고 내 측근으로 있는거다만 네가 불안하다면 그렇게 하지.”
헬리오스는 내 요구를 수락했다. 헬리오스는 책상에 있던 빈 종이와 깃펜을 내게 건넸다. 내가 깃펜을 들고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하자 집무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사각거리는 깃펜의 소리만 들릴 뿐. 나는 잡설이나 주관을 제외하고 최대한 간략하게 써 내려갔다.
[드란과 레베카는 ‘아라네아’라는 조직 소속. 금제에 걸려있는 상태였음. 당시 아카데미를 침입했던 복면인을 생포해 알아낸 정보. 그들이 아카데미를 테러한 목적은 루카리온 님의 국외 추방이었던 것으로 추정.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갑자기 아카데미로 내려온 트룩 후작가의 차남을 의심.... 황후 폐하의 편지를 받고 트룩 후작가의 차남을 보러 왔다는 황태자님의 이야기를 듣고 황후 폐하가 의도적으로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고 확신]
아카데미 테러 사건의 모든 것이라고 했기에 결계 관리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나 황실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검성이 반납했다는 것 같은 자잘한 내용도 전부 적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 한 장을 빼곡히 채워서 황태자에게 건넸다.
‘아이고 글 쓰는 것도 힘드네.’
나는 깃펜을 내려놓고 헬리오스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의 금안은 빠르게 종이를 훑었다. 눈동자가 아래로 갈수록 그의 얼굴은 침중해졌다. 무거운 숨을 뱉은 헬리오스는 말없이 일어나서 책상에 있는 신기하게 생긴 물건에 종이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