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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4화 (9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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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수정구가 살짝 떠 있었고, 그 아래로 나무 받침이 있었는데 받침에는 회색 가루들이 쌓여있었다. 수정구는 신기하게도 종이를 빨아들였고 순식간에 불에 탔다. 수정구는 회색 연기로 가득 찼으나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리고 수정구 밑으로 눈처럼 재가 떨어졌다.

‘눈구름 같네. 저것도 마법 아티팩트인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파쇄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헬리오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은 누구누구 알고 있는 거지?”

“세 번째 질문인가요?”

아직 이쪽 전력을 정확하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대답하지 않고, 헬리오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받아쳤다. 싱긋 웃으며.

“아니다.”

헬리오스는 인상을 구기며 부정했다.

대화가 끝나자 손등에 있던 획 하나가 빛을 내며 사라졌다. 심장 날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통과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원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황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카데미 테러 사건 때문에 황후를 의심했다고 하면 거짓이 된다.

‘그러나 헬리오스가 황후의 편지 때문에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앞부분에 잘린 전제가 있었으나 질문이 ‘아카데미 테러 사건’에만 국한됐기 때문에 통과된 것이리라.

두 번째 질문도 무사히 넘겼다!

나는 옅은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첫 번째 질문은 괜찮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심장을 걸고 도박하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넘겨서 다행이야. 나는 뭘 물어볼까.’

종이를 읽은 헬리오스의 표정으로 봤을 때 그는 아라네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의 연기에 한 번 속은 적 있으니 방심할 순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라네아가 아니었다.

‘내게 아라네아는 어디까지나 황후에 닿기 위한 끈일 뿐. 혹시나 헬리오스의 세력에 숨어 있는 아라네아가 루카리온 님의 계획을 알아차리지만 않으면 된다.’

내가 생각했을 때 아라네아는 황후의 눈과 귀이며 손과 발이겠지. 정보를 수집하고, 모종의 계획을 꾸밀 때 편하게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검성은 아라네아의 배후를 파헤치기 위해 그들을 조사하는 것이지만 내 입장에서 아라네아는 황궁에 묶여있어야 하는 황후를 대신해 움직이는 수족에 불과했다.

오히려 수호자가 더 신경 쓰였다.

헬리오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황후가 ‘절대’ 헬리오스의 편이 아니라고 했는데, 대체 무엇을 알고 있기에 절대라고 단언했을까.

‘하지만 그건 헬리오스가 모를 수도 있어.’

기껏 물어봤는데 모른다는 대답은 사양이었다. 차라리 수호자를 신뢰하는 이유를 묻는 편이 이득이었다. 다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헬리오스가 황후보다 수호자를 더 믿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질문의 가치가 없었다. 수호자의 정체는 왠지 제대로 모를 것 같고. 알았다면 수호자라고 자신이 지칭했다는 말은 없었겠지.

‘수호자가 거슬리긴 하나 아리엘이 우선이야.’

내게 지금 제일 중요한 사안은 아리엘의 상태였다. 진실의 맹세의 위력이 발휘되는 동안에는 거짓말도 불가능하고 무조건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헬리오스의 의중도 파악하지 못했고, 나중에 질문했다가 아리엘의 상태를 알려주는 대가로 다른 것을 요구할 수도 있어.’

내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정보라든가 아르덴타인가의 힘 같은 것들.

아리엘의 상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쪽은 헬리오스였으니 그런 요구를 한다면 거절할 수 없었다. 옆에 있는 헤르세도 얌전히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완벽한 갑과 을의 관계! 동등한 위치에서 질문을 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아리엘이 황후 폐하를 만나고 난 후 열이 납니다. 이 현상에 대해 아주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당연히 해결방법도 포함해서요.”

나는 작은 꼼수를 썼다. 혹여나 증상에 대한 설명을 물었다가 해결방법을 알려주지 않을까 봐, 설명 안에 해결방법까지 포함했다. 두 개의 질문을 쓸 수 없었기에. 헬리오스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문양에선 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 질문이 성립됐다는 뜻이었다.

“어머님은 사교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시지만 가끔 귀족을 따로 불러 티타임을 나누시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홀로 황궁에서 적적하니 대화상대가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헬리오스는 진실의 맹세에 따라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10살 때부터 황후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헬리오스는 별거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일조차도 유심히 봤다. 그 결과 이상한 공통점이 발견된 것이다.

“티타임을 가진 귀족들은 어머님과 친하게 지냈다. 나는 단순하게 티타임을 가지면서 모종의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어느 날 티타임을 가졌던 귀족의 다른 가족에게 그의 안부를 물었더니 열이 나서 쉬고 있다고 하더군.”

문제는 그날 티타임을 가진 귀족들이 여럿 있었는데 동시에 열이 났다는 점이었다.

그 후 헬리오스는 과거에 황후와 티타임을 가진 귀족들에게도 물었었다. 황후와 티타임을 가지고 열이 난 적 있냐고. 신기하게도 모두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조사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어머님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열이 나는 사람이 줄었어. 티타임을 5번을 가진다면 1명 정도의 확률로. 나는 그것을 토대로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아차렸다. 열이 난 귀족은 묘하게 맹목적으로 어머님을 지지하고, 열이 나지 않은 귀족은 평범하다는 것을. 음…….”

길게 말을 이어가던 헬리오스가 내 눈치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어딘가 난감해하는 얼굴이었다. 한 템포 쉰 헬리오스는 느릿하게 마지막 말을 뱉었다.

“다만 해결 방법까진 알아내지 못했다. 솔직히 알아낸 것은 ‘티타임을 가진 뒤 열이 난 사람은 어머님을 지지한다.’뿐, 어째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헬리오스의 손등이 빛났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했기에. 좀 더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이 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설명 덕분에 나도 알아낸 것이 있었다.

‘헬리오스가 알아차리자 5분의 1 확률로 바꿨다는 것은 그의 주위에 황후의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열이 나는 이유도 대충 추측이 갔다.

헬리오스의 말대로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드란과 레베카는 황후를 만나고 마력이 늘었다. 그렇다면 다른 귀족들도 무언가를 받고 금제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금제에 관한 것은 헬리오스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해서 내가 추측한 정보를 꺼냈다.

“드란과 레베카도 건국제 준비를 위해 황궁에 갔다 온 후 갑자기 마력이 상승했다고 했습니다. 열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관계있지 않을까요? 그들이 황후 폐하에게 마력을 받았고, 그 대가로 금지 마법을 받아들인 걸 수도 있습니다. 헤르세님은 마법사신 거죠?”

“네.”

“금지 마법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금지 마법은 일반 마법책에 나오지 않는 고위 마법이었다.

시리우스가 간단하게 설명해줬으나 기본적인 것이었고, 열이 나는 것처럼 특징적인 현상이 발생하는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있는 유일한 마법사인 헤르세에게 물은 것이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금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많은 양의 마력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으음, 이 부분은 나중에 한 번 더 확인해야겠으나 아마도 열은 금제와 관련된 현상이라 추측됩니다. 따라서 열이 났던 귀족들은 전부 금제가 걸려 있고, 황후 폐하의 세력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좋겠지요.”

나는 다음에 시리우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금제에 걸린 귀족들을 어떻게 할지 갈등에 휩싸였다. 그들의 규모가 얼마일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만약 제국 귀족의 반 이상이 금제에 걸려 있다면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황후의 마음대로 금제를 발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수십 명의 뇌를 터트릴 수 있어.’

어떻게 보면 금제에 걸린 귀족들은 인질이었다. 여차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담보. 그건 곤란했다.

“황후 폐하의 세력부터 명단을 따로 정리하는 건 어떨까요? 황후 폐하가 금제를 통해 무언가 계획을 세웠다면 금제에 걸린 귀족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크니까 그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본다면 황후 폐하의 움직임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음…….”

황후가 나중에 인질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빼고, 황후의 계획을 알아낼 때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를 들며 말을 이어갔다. 내 주장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헬리오스는 진지한 얼굴로 ‘그것도 괜찮지’라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라 생각될 정도로 작았으나 그의 중얼거림에 헤르세가 얼굴을 구기며 반발했다.

“황태자님, 이건 과거에서부터 긴 시간 동안 이어온 계획일 겁니다. 양은 물론이고, 자료 조사를 하는데도 엄청난 인원이 들어갈 겁니다. 그 인원은 현재 저희로선 감당할 수 없습니다. 괜히 그것 때문에 일을 빠졌다가 다른 중요한 일에 못 들어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우선은 진정하시고 다음에 다시 생각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블레닌의 밤 때문에 3일이나 밤새고 있는데 명단 작업까지 더하면 다들 과로로 쓰러질 겁니다.”

어쩐지 회사에서 야근한 직장인 모습이라더니 진짜였다. 그리고 앞부분 말보단 뒷부분 말이 본심처럼 느껴졌다.

“뭐, 지금 당장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 방법도 괜찮다는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네.”

헬리오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헤르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헤르세의 표정은 전혀 펴지지 않았으나 헬리오스는 신경 쓰지 않고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 마지막 질문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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