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5화 (9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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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 헬리오스가 어떤 질문을 할진 몰라도 나는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내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 끝나서일까. 원하는 대답은 못 들었으나 헬리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리엘에게 열이 나는 건 금제의 영향일 가능성이 컸다. 그녀가 황후와 어떤 거래를 하다가 금제를 걸린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그녀에게 큰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조급했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무사히 깨어난 후에 대화 내용을 물어도 늦지 않을 테니.’

금제에 걸린 것 자체가 큰일이긴 하나 아카데미 테러 사건 때도 시리우스가 두 번이나 금제를 풀었으니 이번에도 그에게 물어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있었고.

“마지막 질문은 원래 묻던 걸로 물어봐야겠지. 앞으로 내게 진실만 말할 수 있나?”

헬리오스는 싱긋 웃으며 턱을 괴고 말했다.

앞으로라니. 그에게 평생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헬리오스가 어떤 의도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는 갔다. 스파이가 세력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 질문으로는 스파이를 전부 거를 순 없어.’

황후의 금제에 대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헬리오스라면 자신의 사람이 황후를 만나고 열이 날 경우 의심을 가질 것이다. 황후도 그걸 모를 리가 없다.

‘헬리오스가 금제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자마자 조심하기 시작했으니 금제를 쓰지 않고 다른 거래로 회유했을 수도 있어.’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당장은 헬리오스에게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생각하며 충성을 바치더라도 진실의 맹세는 금제처럼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진 않기 때문에 맹세 이후 거짓말을 하더라도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다.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배신하진 않겠지만 상황이라는 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니까.’

나처럼 진실의 맹세를 한 당사자가 아니라 그의 가족이 저주를 받거나 금제에 걸려 약점을 잡힐 수도 있고, 단순히 자신의 이득에 따라 배신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진실의 맹세를 통해 세력을 모았다 하더라도 스파이가 생기기 마련!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최선이라 생각해서 계속 이 질문을 하는 건지 문제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황후에게 대적하기 위해서는 헬리오스의 힘이 필요했기에 그의 세력에 섞인 불순물이 있다면 걸러 내야 했다.

‘일단 내 대답을 먼저 해야겠지.’

나는 질문의 문제점을 생각하며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숨기고 있는 사실도 있었고 헬리오스에게 그 정도의 믿음은 없었기에.

“솔직히 말해서 황태자님에게 평생 진실만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님이 선택을 바꾸지 않는 이상 배신하지 않고, 황태자님에게 피해를 주는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맹세 할 수 있습니다.”

손등에 있는 마지막 문장이 사라졌다.

이게 지금 내가 헬리오스에게 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 헬리오스도 내 대답에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했던 충성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지. 이제 그대의 차례군.”

처음에는 황후를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려고 했다.

친어머니인 그녀를 죽일 수 있을지 각오를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그러나 첫 번째 질문 이후 수호자 쪽이 더 신경 쓰였다.

‘변수는 없는 편이 좋아.’

비밀에 싸여있는 ‘수호자’의 존재는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나 이외에 원작을 비틀고 있는 사람. 원작에서 헬리오스의 과거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그가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수호자라는 언급도 없었다. 데이지의 시점에서 서술된 소설이었기에 가려진 존재라 할지라도 수호자가 존재했더라면 에리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왔어야 했다.

‘반란 에피소드에서 한 줄이라도 언급은 있어야 했어. 이 정도로 믿고 있다면 더더욱.’

에리얼이 반란을 일으켜 사병을 이끌고 황궁에 쳐들어왔을 때, 헬리오스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데이지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에리얼과 맞서 싸웠다. 데이지는 자신만 도망갈 수 없다며 죽더라도 헬리오스의 옆에서 죽겠다는 맹세를 하고 끝까지 남았다.

‘엘이 강하더라도 비슷한 무위를 가지고 있는 그렌드윈과 마법,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는 데이지가 합공을 하면 질 수밖에.’

개인 사병을 끌고 왔다지만 황실의 병력이 더 컸다. 애초부터 질 수밖에 없던 싸움! 나는 당연히 소설의 클리셰를 차근차근 밟고 있다고 생각해서 넘겼으나 다시 생각하면 에리얼도 이상했다. 아리엘의 복수나 데이지를 갖고 싶다는 독점욕이 강하더라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아무리 공작의 명령이라지만 반란을 일으키는데 주위에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것도 이상해.’

서술되지 않은 이면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말렸다가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반란이었다. 가담하면 일반 사병이라 할지라도 가족 전체가 죽는다. 차라리 명령에 불복종해서 내 목만 내놓고 말지 가족까지 위험에 빠트리는 선택을 할 리 없었다.

‘일단 엘의 반란에서 이상한 점은 나중에 생각하고, 수호자에 대해 물어보자.’

그녀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원작에 없었던 사람은 아닐까. 어쩐지 그녀가 열쇠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환생한 이유를 알고 있거나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일 것 같았다.

‘뭐라고 질문해야 하지?’

수호자에 관해 물어봐야겠다고 결정했으나 막상 질문하려고 하니 헬리오스가 수호자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헬리오스가 그녀와 10살 때 헤어졌고 4살쯤 만났으니 6년의 시간을 함께했을 것이다.

“뭘 물으려고 이렇게 뜸 들이는 거지. 기다리다가 해가 지겠어.”

내가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기다리다 지친 헬리오스가 핀잔을 줬다. 정신을 차리자 세 쌍의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너는 정말 못 말리겠군. 황태자를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다니.”

“세르니아 누님은 앞에 누가 있든 어떤 장소든 상관하지 않고 자주 상념에 잠기시곤 하지요.”

“신기하군요.”

헬리오스와 그렌드윈은 내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이 반응했고, 헤르세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질문이니 신중하게 묻고 싶어서 고민이 깊어졌네요.”

“하하. 물을 게 산더미인가 보군. 네가 어머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 진실의 맹세가 아니더라도 궁금한 점이 있다면 대답해 줄 테니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헬리오스의 말에 복잡한 생각을 종이 접듯이 깨끗하게 접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처럼 진실의 맹세를 통해 헬리오스가 진심으로 황후를 적대시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의 기 싸움은 무의미했다. 황후를 잡으려면 힘을 합쳐야 했으니.

“수호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수호자의 목적이나 정체 같은 것들이 제일 궁금했으나 헬리오스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수호자를 만난 사람도 헬리오스뿐이니 그녀와 관련된 주제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주관적일 거 그냥 헬리오스가 수호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나 알자 싶어서 한 질문.

“흐음, 의외군. 마지막 질문인데 괜찮나? 너에게 도움 안 되는 질문 같은데.”

“괜찮습니다.”

내겐 헬리오스처럼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질문이 더 도움 안 됐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보!

“수호자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필요할 땐 반드시 나타나 줬지. 그녀는 내가 죽지 않길 바란다고 했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를 돕고 싶다고 했어. 그랬기에 나는 그녀가 해준 말들을 믿기로 했다.”

그는 창밖을 응시했다. 황궁의 풍경이 아니라 그곳에 묻어 있는 추억에 잠겨 있는 것이리라.

“추측이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목소리밖에 못 들었지만 6년 동안 그녀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변화가 없었거든.”

“인간이 아니라면…….”

“글쎄. 드래곤이나 정령이려나. 어쩌면 내가 모르는 종족일 수도 있고.”

마법이나 정령이 있는 판타지 세계였으니 드래곤도 있을 것이다. 다만 소설에는 한 번도 나온 적 없었고, 여기서조차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였기에 아닐 가능성이 컸을 뿐. 그런 존재의 개입이라면 내가 환생한 것에 대해 알 것 같긴 하나 나를 알고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겠지.

‘드래곤이 헬리오스를 지켜줄 이유도 없고.’

아슬란데 제국의 초대 황제는 인사말에 나오는 것처럼 ‘태양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드래곤의 핏줄이라고 전해지는 건 다른 왕국이었다. 그러니 인외의 존재일지라도 드래곤은 아닐 것이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으나 그의 손등에 빛이 나자 헬리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걸로 진실의 맹세가 끝났군. 원래 ‘프레세스’의 통과의례였지만 세르니아는 마지막 대답에서 진실만 말한다는 대답을 못 했으니 탈락이려나?”

헬리오스의 세력 이름인가. 그가 헤르세를 향해 물었다. 대화의 화살이 돌아오자 대기하고 있던 헤르세가 헛기침을 하며 상황 정리했다.

“애초에 세르니아 님은 프레세스에 들어오려고 했던 게 아니었지만요. 부기사단장님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진실의 맹세를 해야 한다고 반강제적으로 시키셨죠.”

헤르세는 빙긋 웃으며 말했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렌드윈은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피웠고, 그 모습에 헬리오스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가 헤르세의 헛기침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세르니아 님, 혹시 아리엘 님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헤르세에게 오늘 아침에 봤던 아리엘의 상태를 소상히 알려줬다. 어제 황후를 만났고, 저녁에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과 발열은 새벽부터 있었다는 의원의 말까지 전했다.

“저희도 아직 그 현상에 관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발열은 보통 하루에서 이틀 정도 지속되고 따로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후 깨어났을 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열이 나기 전과 달라진다고도 합니다. 소심한 사람이 당당해진다든가, 멍청한 사람이 똑똑해지는 식으로요.”

드란과 레베카의 경우와 똑같았다. 역시 금제가 맞구나. 나는 헤르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아마 아리엘 님도 곧 깨어나실 겁니다.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깨어나신 후 어떻게 변하냐는 거겠지요. 괜찮으시다면 이후 아리엘 님의 변화를 보고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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