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6화 (9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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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아리가 깨어나면 다시 오겠습니다.”

어차피 헬리오스와 나눠야 할 대화도 있어서 또 오려고 했었다.

프레세스나 아라네아에 대해서. 아까 진실의 맹세 문제점도 있었고, 이것저것 공유해야 할 정보가 많았기에. 대화를 끝내고 일어서자 그렌드윈이 따라 일어섰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 시리우스 궁에 잠시 들렀다 갈 거라서.”

미리 연락 안 해서 궁에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황궁에 왔으니 들러 볼 생각이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멈춘 그렌드윈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알겠……습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어. 다음에 보자.”

헤르세의 말에 따르면 그렌드윈의 부탁 덕분에 헬리오스를 만났을 수 있었던 것 같으니. 다음에 그렌드윈에게 감사의 편지와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헬리오스와 헤르세에게도 차례로 인사했다.

‘아, 오늘 안으로 갈 수 있겠지?’

헬리오스 궁에서 빠져나와 시리우스 궁 쪽으로 걷다 보니 관리가 안 된 길이 나왔다. 그 길을 보고 있으니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본궁에서 시리우스 궁까지의 거리. 최근 갔을 때는 텔레포트로 이동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예전에 걸었을 때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리였다.

‘날씨가 포근해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덥거나 추웠다면 포기했을 거리!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다는 것을 깨닫자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히프노스를 부르기로 했다. 히프노스는 오랜 시간 동안 시리우스의 몸에 갇혀 있어서 그의 마력을 금방 찾을 수 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기에. 이 거리를 걸어갔다가 시리우스가 궁에 없다는 헛수고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령을 부르는 방법은 간단했다.

“히프노스!”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뿐. 오솔길 위에 환한 빛이 떠오르며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세르니아!”

“오랜만이라니 우리 어제 계약했는데?”

“인간계와 정령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거든!”

히프노스의 발랄한 목소리를 들으며 왜 소환했는지 설명했다. 히프노스는 날개를 파닥이며 쉽다고 대답했다.

“이쪽으로 가면 나쁜 인간이 있어!”

시리우스의 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멈췄던 발을 옮겼다. 히프노스가 옆에서 나쁜 인간을 만나러 가냐고 재잘거렸다. 기운 넘치는 히프노스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걷고 있는데 문득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히프노스, 시리우스가 있는 곳까지 최고 속력으로 날아가면 얼마나 걸려?”

“인간의 시간은 잘 몰라. 하지만 금방이지! 내가 얼마나 빠른데!”

“그럼 네가 시리우스에게 가서 내가 부른다고 전해주면 안 될까?”

예상대로 히프노스는 빨랐다. 내가 걸어서 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시리우스를 만날 수 있다는 뜻.

“싫어!”

“왜!”

그러나 히프노스는 격하게 머리를 흔들며 거절했다.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것처럼 행동하더니! 단호한 거절에 당황한 나는 그를 붙잡고 재촉하려고 했으나 히프노스는 내 손을 요리조리 피하며 날아다녔다.

“혼자 갔다가 나쁜 인간이 나를 잡아넣으면 세르니아랑 다시 못 만나는걸.”

그러고 보니 새장에 갇혀 있었다고 했었지. 이젠 그럴 것 같진 않으나 싫다는데 무작정 강요할 수도 없었다. 결국 히프노스를 보내서 시리우스를 불러오는 계획은 포기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형제는 잘 만나고 왔어?”

“응! 그 녀석 내가 없어서 외로워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세르니아가 부르기 전까지 계속 이야기하다가 왔어.”

“미안. 괜히 불렀네.”

“괜찮아. 이제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재회의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사과했더니 히프노스는 개의치 않아 했다. 잠의 정령이라기엔 너무 활발한 히프노스는 오랜만에 정령계로 돌아가서 만난 친구들 이야기를 열심히 늘어놨다.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어?”

“응!”

히프노스의 재잘거림을 배경음악 삼아 걸었더니 시리우스 궁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시리우스 궁에 처음 갔을 때는 키가 작을 때여서 오래 걸렸던 것이었다. 체력은 여전히 저질이었지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잡초 뒤덮인 정원이나 칠이 벗겨진 벽이나…….

‘뭐지?’

변함없는 시리우스의 궁을 감상하며 문고리를 잡았는데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엄청 많이! 분명 그의 궁에는 아무도 없었을 텐데.

“히프노스, 여기 시리우스가 있어?”

“응! 안쪽에 있어!”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이 궁이 바뀐 건 아닌가 싶어서 히프노스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했다. 저주도 풀려서 황제가 궁을 옮겨 줬을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히프노스가 여기에 있다고 확신하며 말했기에 나는 의문을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고, 끼익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안쪽을 살폈다.

“어이 그거 조심해서 옮겨!”

“아까 남는 방 어디였는지 아는 사람?”

“중력 조종기 누가 쓰고 있어?”

열 명? 아니 그 이상이었다. 예전에 감사 인사를 하러 왔을 때 겉치레 식으로 파견했던 시종들보다 많아 보였다. 하지만 메이드복이 아니라 로브를 입고 있었다.

“세르니아! 마법사가 많다!”

“아…….”

히프노스도 열린 문틈 사이로 안쪽을 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지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로비에 있던 모든 마법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들켰는데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쨌든 시리우스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시리우스 황자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

나는 침묵 속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나 다들 눈빛을 교환하기만 할 뿐 먼저 입을 여는 마법사는 없었다.

‘블레닌의 밤을 준비하기 위해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 같은데 왜 이렇게 많지?’

마법사가 시리우스의 궁에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마탑에 들어갔다고 했으니 블레닌의 밥을 위해 초청된 마법사들이 시리우스의 궁에 묵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행사에 필요한 마법사는 마탑주를 포함해서 4명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건 뭐 마탑에 있던 마법사 반 이상이 있는 느낌이었다.

‘시리우스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마법사는 신분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다. 마법사 자체가 희귀하고 한 명이 수십, 수만 명의 힘을 내기 때문에 군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모든 나라에서 마법사를 환영한다. 그래서 황족이라 하더라도 대마법사나 마탑주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나도 이곳에 있을 정도면 높은 지위에 있는 마법사들일 것 같아 일부러 귀족의 인사를 했는데…….

‘누가 대답 좀 해줘!’

눈치 게임도 아니고,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여기서 그냥 ‘저는 그럼 시리우스를 찾으러 갈 테니 여러분도 하시던 것 마저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할 일이 많은데 다들 안 움직이고 뭐 하는 거냐!”

정적을 깨는 노성이 들렸다. 복도 안쪽에서 나온 노인이 로비에 있던 마법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러자 제일 가까이 있던 마법사 한 명이 다가가서 작게 속삭였다.

“장로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뭐? 여기 그런 게 찾아올 리가 없잖아.”

장로라 불린 노인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더니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마법사의 눈이 내게 향했고, 그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린 노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인사해야겠지. 장로라고 하니 여기서 제일 높을 것 같고.

“안녕하세요.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시리우스 황자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

처음보다 매끄럽게 소개를 했다. 마법사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내 노력이 무색하게 노인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게 쏠려있던 시선이 노인에게로 조금 분산됐다는 것 정도.

“아, 죄, 죄송합니다. 마탑주님과 만날 약속을 하셨는지요?”

“네?”

다짜고짜 화만 내던 노인의 목소리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으며 뱉은 질문에 나는 되물었다. 이 사람은 또 무슨 소리인가. 소개할 때 시리우스를 만나러 왔다고 했는데. 뜬금없이 마탑주라니.

‘잠깐. 이 사람 어서 봤지?’

갑자기 노인이 언급한 마탑주라는 단어가 내 기억을 자극했다. 묘하게 익숙하다고 했더니 꿈에서 봤었다!

‘분명 데이지가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아니 이 사람이 마탑주잖아!’

시리우스가 죽어서 안타까워했던 마탑주였다. 데이지의 꿈에 자주 등장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마탑주와 약속을 했냐고 묻는거지? 나는 질문의 의도를 도통 이해 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세르니아! 나쁜 인간이 가까이 온다!”

노인이 뭐라 하기 전에 히프노스가 끼어들었다. 시리우스가 가까워지는 게 싫은지 날개를 파닥이며 빙글빙글 날더니 내 머리카락 사이로 숨었다.

“방금 그 정령…….”

“맞아. 새장에 갇혀 있던…….”

침묵하던 마법사들이 히프노스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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