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01화 (101/123)

-101-

“이 계획은 배후가 황후라는 것을 몰랐을 때의 일이었고, 세르니아의 편지를 받고 우리는 골치가 아파진 거야.”

아카데미 테러사건에서 황실과 관련됐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황실에서 활동하는 귀족들이 내란을 바라고 벌인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겠지. 강력해진 황권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리기 위해!

‘검성의 말에 따르면 전대 황제는 귀족들의 눈치를 봤다고 하니.’

황권이 약할수록 귀족들이 살판나는 법. 그랬기에 검성은 아라네아를 기습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었다. 문제는 배후가 황후였던 것. 그들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황족을 잘못 건드리면 반란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

‘그렇다고 꽃집을 기습하며 황후와 관련된 암살 집단이 여기 있다!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믿어주지도 않을뿐더러 황후가 자신과 관련된 증거를 남겨뒀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철저한 성격상 아라네아가 암살 집단인 것이 드러나더라도 자신과 연결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으리라.

“제게 부탁하고 싶은 건 명분이었습니까.”

“그래.”

공작은 그제야 검성이 왜 자신을 찾아 왔는지 알겠다는 말투였다.

왜 저렇게 쉽게 말하는 거지? 나는 공작의 대답에 의문이 생겼다. 내가 제일 고민하던 문제. 명분이 없으면 반란이 되기 때문에 황후가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에 집착한 것이다. 그러나 공작은 당연히 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직 황후가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한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는데 명분을 만들 수 있나요?”

검성과 공작은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설명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기에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공작에게 물었다.

“너, 아르덴타인 맞는 거냐?”

내 질문에 오히려 검성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르덴타인이 왜 나오는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검성은 진심으로 어이없어 했다.

“아르덴타인은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이다.”

그건 알고 있었다. 소설에서도 그렇게 서술 됐고, 에리얼도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그 말을 했으니. 하지만 그게 황후를 칠 수 있는 명분과 무슨 상관인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검성을 바라봤다.

“아르덴타인은 아슬렌데 제국과 처음을 같이한 유일한 귀족. 초대 황제는 아르덴타인에게 특권을 하나 주셨지.”

“특권이요?”

검성 대신 설명을 시작한 사람은 공작이었다.

제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문이 사라지거나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중 아르덴타인이 특별한 것도 초대의 황제부터 쭉 공작가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인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특권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수호의 심판. 황제를 제외하고 황제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신분과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심판할 수 있는 권리다.”

“평민들도 알고 있을 기본 상식을 아르덴타인이 모른다니…….”

검성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도 약간 억울했다.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다들 너무 당연한 상식이라서 생략한 걸까. 어쨌든 공작의 설명은 멈추지 않았고 그 내용은 입을 떡 벌리게 만들었다.

‘황제만 아니라면 다른 황족도 가능하다는 뜻이잖아!’

거기다 신분과 명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건……. 내가 머리 아프도록 했던 고민이 헛수고란 말이었다.

‘잠깐, 그럼 소설에 에리얼이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수호의 심판을 사용한 거야?’

또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 원작에서 사병들이나 기사들이 도망가지 않고 황궁에 쳐들어갔는지. 애초에 반란이 아니었다. 수호자의 심판이라는 프리패스권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데이지는 어째서 반란이라고 오해한 걸까?

‘이것도 서술트릭? 아니야. 분명 에리얼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있었어.’

기본 상식이라 할 정도니 모르진 않았을 텐데. 그럼 단순히 착각한 걸까? 의문이 하나 풀렸더니 다른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뭘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국의 긴 역사 속에서도 고작 세 번밖에 등장한 적 없는 것도 그 때문이지.”

데이지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다르게 받아들인 검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거 아닌데요.’라 해명하고 싶었으나 검성은 쉬지 않고 뒷말을 이어갔다. 수호의 심판 리스크에 대해서. 단순히 공작가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할 경우 공작위 회수. 즉, 한순간에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신분과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심판할 수 있으나 즉각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옥에 수감한 뒤 지목 대상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제대로 된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경우도 마찬가지로 공작위가 회수된다.

‘먼저 잡고 증거는 나중에 찾는다는 건가.’

압수수색 영장 같은 느낌!

대체로 반란이나 황제 암살정도로 급박한 상황에서 발동하는 특권이라는 말이었다. 웬만한 확신 없인 못 쓰는 최후의 수단.

“수호의 심판을 했다가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큰일이잖아요.”

“그래서 기습을 하는 거다.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단숨에 끝을 내야지.”

검성이 어째서 배후가 황후라는 것을 듣고 공작가로 찾아왔는지 이해됐다. 다만 공작가의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만약 황후가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하는 증거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면? 찾을 수 있을까? 황후가 배후라는 것은 확신하지만 잘못되면 한순간에 공작의 지위를 잃는다. 데이지에 관한 의문보다 특권의 리스크가 나를 더욱 심란하게 했다.

“사실 공격 날짜도 정했지.”

“벌써 날짜까지 잡았어요?”

“그래. 블레닌의 밤이 끝나는 날 새벽이다.”

그가 무작정 공작가로 찾아온 것도 시간이 촉박해서였다. 블레닌의 밤까지 3일 정도 남았다. 이 정도면 ‘사고 칠 건데 뒷감당할 준비하고 있어’라는 수준의 통보였다. 아직 특권을 쓸지 말지에 대한 결정도 내리지 않은 상태.

“너무 빠르지 않나요?”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아라네아의 거점은 한 달마다 바뀐다. 이번에 운 좋게 거점을 찾은 거야. 다음을 장담할 수 없어.”

검성은 아라네아를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나 나는 약간 회의적이었다. 아라네아의 소탕은 황후를 잡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라네아를 잡아 배후가 황후라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것이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했다는 증거가 되진 않는다.

‘수호의 심판을 쓸 수 없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작보다 복잡하게 꼬여버린 상황이 답답했고, 그것을 시원하게 풀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황후 폐하…… 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조금 빈약하지 않나요? 황태자님이 어째서 황후 폐하를 견제하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가만히 나와 검성의 듣던 공작부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근심이 완전히 걷힌 얼굴은 아니었으나 한결 차분해진 그녀가 이성적인 지적을 했다. 타당한 질문이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수호자’에 관한 내용을 빼고 말했으니.

‘수호자에 관한 건 말해도 안 믿을 것 같아서 빼고 말했는데.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하나?’

수호자라는 존재가 어릴 때부터 헬리오스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지켰고, 지금은 곁에 없는데 사라지기 전에 황후를 적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황후를 견제한다고 하면 쉽게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심장을 걸고 진실의 맹세를 했다지만, 판단력이 흐린 어린 헬리오스를 꼬드겨서 일부러 황족의 내분을 노린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진실의 맹세는 당사자가 진실이라 믿는다면 사실이 거짓일지라도 통과하기 때문이다.

‘나야 원작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황후에게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수호자의 존재가 이 세계에 내가 환생한 것과 관련 있을 거 같아서 믿었지만.’

공작부인은 검성에게 물었으나 검성의 시선은 내게 돌아왔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황후가 배후라는 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만약 여기서 납득한다면 특권을 쓰게 되겠지?

‘위험부담을 안고 빠르게 황후를 잡을 것인가, 빠져나갈 수 없는 물증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 고민이 깊어졌다.

리스크가 크지만 수호의 심판을 써서 황후를 감옥에 가두면 그녀의 피를 채취하기 쉬워진다. 그러나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경우 공작가는 제국에서 사라진다. 막중한 책임이었다. 나는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수호자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그렇다고 공작부인과 공작이 수긍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불확실한 추측만 있을 뿐.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

“저는 황후가 배후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섣불리 특권을 쓰자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배후는 확신한다니 그것참 모순이군.”

공작의 말이 옳았다. 모순.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모순이었다.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

“그래서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직접 황후를 만나서 증거를 확보하겠습니다. 제가 발견한다면 바로 수호의 심판을 하고, 발견하지 못한다면 한 발 물리고 다시 기회를 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들에게 나는 정치판도 제대로 모르는 햇병아리로 보일 것이다.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문제는 가문의 존속이 달린 문제였다. 당연히 느낌이나 추측만으론 움직일 수 없었다. 나도 그 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방법을 떠올렸다.

‘수호의 심판을 쓸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건 공작가를 이끌고 있는 공작이 할 일.’

스스로 미끼가 되어 선택지의 정보를 늘려주는 것.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