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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곁에서 지켜봤기에 그가 얼마나 아르덴타인을 소중히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르덴타인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너는…….”
짙은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한참 동안 내게 머물렀다.
무언가 말하려던 공작이 뜸 들이자 자연스럽게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게 내려앉은 침묵은 집무실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하……. 세르니아, 스스로 미끼가 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자각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마치 내가 널 사지로 밀어 넣는 것 같잖아.”
적막을 깬 사람은 공작이 아니라 검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아르덴타인입니다.”
“쯧, 방금까지 수호의 심판도 몰랐으면서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는군.”
함축적인 말이었으나 방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이해했다.
아르덴타인의 일원으로 제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위험에 뛰어들겠다는 말. 검성은 핀잔을 줬으나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공작부인은 말릴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고, 공작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봤다.
“블레닌의 밤 전날까지. 그 안에 증거를 찾아낼 만한 계획은 있는 건가?”
“도박에 가까운 계획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검성은 내가 직접 미끼가 되겠다고 나선 것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으나 말리진 않았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고, 나를 대신해서 투입할 인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미끼로 제격이긴 하지.’
황후를 대면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신분과 그녀의 방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황후를 제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나였고, 원래는 황후의 피를 얻기 위해 그녀를 따로 만나려고 했으니.
“확률은?”
“반입니다.”
50%. 이것도 운이 좋을 경우. 사실 뭔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막무가내로 부딪치고 보는 방법이라 계획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단도직입적인 도발로 황후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
철저한 황후가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 증거를 남겼을 리가 없고 있더라도 3일 안에 찾을 만큼 쉬운 곳에 놔뒀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증거를 찾는 게 불가능하다면 증거를 만들자는 결론을 내렸다.
‘직접 내통했다고 말하게 만들고 영상 녹화나 음성 녹음 할 수 있는 마법 아티팩트로 촬영해서 증거로 남기는 계획!’
그러나 황후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미치지 않은 이상 순순히 인정할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직접 말하도록 끌어내야 했다. 가능성은 검성에게 말했다시피 50%. 그저께 티타임에서 황후가 조금이나마 내게 속내를 보였기에 나는 그녀가 한 번 더 내게 금제를 걸 거라 예상하고 있다.
‘황후는 금제를 거는 대가로 언제나 당사자가 원하는 것을 쥐여줬지.’
드란과 레베카는 마력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도 뭔가 받았을 것이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것들. 아리엘이 뭘 받고 거래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내게도 금제를 걸려면 똑같이 대가를 주려 할 것이다. 내가 필요한 것은 황후의 목적.
‘과연 황후가 순순히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황후가 금제로 나를 완전히 조종할 수 있다고 믿을 경우 쉽게 털어놓을 수도 있다. 내가 그녀의 입을 여는 미끼가 되는 거고.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어떻게 포장해야 그럴듯하게 들릴지 고민했으나 검성은 깊게 캐묻지 않았다.
“좋아. 기다리지.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면 수호의 심판 없이 아라네아만 공격한다. 아라네아를 통해 꼬리를 잡을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검성과 대화가 끝나자 이 주제에 대해서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황궁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니아.”
공작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 때문에 공작부인의 눈은 조금 커졌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제나 ‘세르니아’나 ‘너’ 정도로 부르던 공작이 애칭을 부르다니. 일어서려고 엉덩이를 뗐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형님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건 제국의 평화가 아니라 아르덴타인이었다.”
아버지의 유언. 그러나 공작이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고 물을 정도로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편도 아니라 일단 가만히 있었다. 공작도 내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이어서 말했다.
“그건 단순히 공작 직위가 아니라 아르덴타인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 전부를 말한 것이지. 내게 중요한 건 직위가 아니라 너희들이다. 황실의 뜻에 반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아르덴타인을 지킨다.”
“…….”
“내가 단두대에 올라가더라도 너희들만은 지켜주지. 그러니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말을 마친 공작은 웃었다.
가끔 보여주던 희미한 미소가 아니었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려줬다. 단두대에 올라간다는 말을 하며 웃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항의하고 싶었으나 여름 햇살을 받은 나뭇잎처럼 빛나는 공작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태클을 걸 수 없었다.
‘자기가 모든 책임을 끌어안고 죽겠다니.’
반란 가문으로 지목될 경우 가문의 직계는 모두 사형이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지켜준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무력 때문일 것이다. 아마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를 다른 왕국으로 피신시킬 때까지 시간을 번다거나 그런 생각이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삼촌이 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저도 삼촌을 지키고 싶어요. 평생 삼촌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자랐어요. 이제 슬슬 저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자랐다는 걸 보여줄 때잖아요?”
나도 공작을 마주 보며 웃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소를 지우고 뭐라 말하려던 공작보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단두대에 올라갈 땐 저도 함께 올라갈 거예요. 저도 아르덴타인이니까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그 삼촌에 그 조카구만.”
검성은 진심으로 질린다는 표정이었고, 공작의 미간은 와락 찌푸려졌다. 나는 지체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삼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든든하긴 하네요. 일단 오늘 제가 황태자님과 만나기로 했으니 루카리온 님의 계획을 황태자님께 전달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오겠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황태자님에게 부탁해서 황후와 만날 수 있는지도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럼 이만.”
***
마차에 오르기 전 황궁에서 답장이 왔는지 물었으나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답장을 보내기엔 짧은 시간이니까. 거기다 내 편지보다 중요한 서류들이 태산처럼 쌓여 있을 테니 아직 읽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히프노스.”
“니아! 너무해! 너무하다구우우!”
마차에서 히프노스를 소환했더니 다짜고짜 내 머리카락을 당기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사실 다짜고짜는 아니었다. 그가 뭐 때문에 이렇게나 화내는지 알고 있었다.
“히잉. 어떻게 내 존재를 그렇게 까먹을 수가 있어! 너무해!”
“진짜 미안해!”
눈물을 글썽이는 히프노스는 정말 억울해 보였다.
어제, 시리우스를 보기 싫다고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히프노스는 등나무 숲에 도착하자 몰래 내 머리카락에서 빠져나와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고 했다.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고 했어.’
시리우스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기에 그저 시리우스랑 엮이는 것이 많이 싫나 보네. 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등나무꽃에 매달려 놀고 있었을 줄이야. 문제는 내가 히프노스를 깜빡하고 먼저 공작가로 돌아왔다는 것.
“나는 당연히 머리카락에 계속 숨어 있는 줄 알았지. 말없이 나갔는지 몰랐어. 그리고 어디 갔더라도 공작가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었는데…….”
공작가에 와서 데이지가 머리카락을 빗겨줄 때 잊고 있던 히프노스가 떠올랐다. 그를 다시 부르지 않은 건 어디 있더라도 알아서 잘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계약자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강제로 역소환 된다고!”
“뭐? 그럼 공작가에서 황궁까지가 일정 거리 이상이라는 말이야? 너무 짧은데. 음, 황궁까지 편지 전달 같은 건 무리겠네.”
황궁과 공작가 사이 거리는 마차를 타고 30분 정도. 실제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공작가에서 시리우스에게 연락할 때 히프노스에게 부탁하려던 입장은 곤란해졌다.
“아니! 그건 돼!”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일정 거리 이상이 떨어지면 정령계로 역소환 되는데 편지 전달은 된다는 건가? 나는 무슨 조건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어째서?”
“어제는 아무 부탁도 없이 그냥 있는 거였고, 니아가 부탁한다면 엄청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괜찮아!”
아하, 소환자가 정령에게 부탁이라는 ‘명령’을 내릴 경우 거리가 멀어져도 괜찮다는 건가. 인간계에 실체를 가지고 현현할 수 있는 조건이 소환자의 부탁이라는 것이겠지. 근데 거절하면 소용없잖아. 어제도 시리우스를 불러 달라는 부탁을 히프노스가 거절했었다. 내가 황궁으로 연락하는 일이 생긴다면 거의 시리우스일 텐데. 어떻게 해야 히프노스가 시리우스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음……. 히프노스, 나는 앞으로도 시리우스랑 자주 만날 거 같은데 그만 화해할 생각은 없어?”
“나쁜 인간은 나쁜걸!”
“그래도 시리우스 덕분에 우리가 만났잖아.”
“…….”
어린아이같이 단순한 히프노스에게 시리우스의 좋은 점을 열심히 늘어놨다. 그에게 어필할 장점은 몇 가지 없었지만.
“시리우스는 마법도 굉장히 강하잖아. 착하진 않지만 같은 편일 땐 든든하고, 또 뭐가 있지.”
생각보다 더 없었다.
히프노스가 시리우스를 좋게 볼 장점은. 시리우스 덕분에 만났다는 거 말고는 없는데 그마저도 중간에 말렸으니.
“……니아는 나쁜 인간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