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너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신분 때문에. 검성이 테러 조사를 할 동안 고위귀족이 몰려 있던 룬반을 맡는 역할에 네가 딱이었으니. 하지만 내 예상을 깨고 너는 아카데미 테러 사건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지.”
당시 헬리오스의 의심을 지우려고 거짓말을 했었다. 테러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공작의 추천을 받고 아카데미 임시 선생님으로 왔다고.
“그리고 어제 두 번째 대답을 듣고 너는 그때부터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너는 테러 사건으로 추리 능력이 증명된 꽤 괜찮은 인재니까 당연히 프레세스로 끌어드리려고 했는데…….”
헬리오스가 갑자기 자신의 심경 변화를 줄줄 뱉었다.
예상하고 있었다. 헬리오스가 나를 프레세스로 끌어드리려 했던 것은. 나를 잡으면 아르덴타인도 따라올 거라는 계산까지 했을 테니. 그러나 날카롭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는 동료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헤르세가 너를 너무 믿지 말라더군. 어제 했던 진실의 맹세로 어머님의 세력이 아니라는 건 증명했지만 다른 꿍꿍이를 가진 제3의 세력일지도 모른다고.”
팔걸이를 톡톡 내리치던 검지가 멈췄다.
제3의 세력이란 황후와 황태자가 서로 물고 뜯는 사이 그들을 잡아먹고 황권을 잡을 외부의 세력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아니었으나 황후와 황태자의 사이를 잘 아는 귀족이라면 충분히 그런 세력이 힘을 모으고 있을 법했다.
내가 헤르세를 믿지 못했던 것처럼 헤르세도 나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난 지 고작 하루도 안 된 사이. 아무리 진실의 맹세로 서로의 속내를 파악하려 했으나 세 가지 질문으로 전부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나도 다시 진실의 맹세를 원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방금 네 질문은 나의 의심을 키웠어. 너의 목적은 뭐지? 뭘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냐?”
“저는 황태자님을 배신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르덴타인은 긴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정점을 탐낸 적 없죠. 제 목적 역시 제국을 지키는 것.”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
말은 그럴듯하게 했으나 뭔가 거창한 목표나 숭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헬리오스가 말했던 것처럼 태평하고 단순한 목적이다.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을 치우기 위해 움직입니다.”
손등에 있는 문양이 빛을 내며 사라졌다.
이걸로 내려간 신뢰가 회복됐을까. 나는 헬리오스의 의심 가득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말없이 이어지는 눈싸움에 헬리오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가. 의심해서 미안하다.”
“아니요. 타당한 의심이었습니다. 다짜고짜 세력을 숨김없이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라도 의심했을 겁니다. 조금 해명하자면 황태자님을 못 믿은 게 아니라 황태자님의 세력에 배신자가 숨어 있을까 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너는 내 세력에 세작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13명. 소수정예였으나 반대로 한 명이라도 배신할 경우 많은 정보를 빼갈 수 있다. 소수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끼리 공유하고 처리해야 할 정보가 더 많을 테니. 헬리오스의 금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후……. 복잡한 고민은 대화가 끝나고 해야겠지. 자, 다음 질문을 해라.”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는 그를 방해해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헬리오스가 먼저 말해줘서 다행이었다.
“제가 제3의 세력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루카리온 님은 황태자님의 세력도 황후의 세력도 아니니까요.”
“검성의 세력이라.”
“아카데미 테러 사건 이후 루카리온 님은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을 포섭해서 ‘아라네아’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의 거점을 찾았습니다. 오늘 루카리온 님이 공작가로 찾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죠.”
“검성이 말해준 정보를 전하기 위해 나를 확인하려고 한 건가. 쯧, 검성보다 신뢰도가 낮다는 거군.”
빈정 상한 듯이 말했으나 그는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뼈있는 농담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황후가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을 해서 제국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는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만약 황후가 먼저 움직인다면 우리에겐 엄청 불리해지겠죠. 황태자님도 아시다시피 금제가 걸린 귀족은 황후의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목숨이 걸려있으니까요.”
“그 수조차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지.”
“그래서 위험한 겁니다. 황후가 귀족들의 목줄을 쥐고 제국을 흔들어서 내란을 일으킨다면, 그 순간 브릴리언 왕국이 빠르게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
두 글자에 담긴 무게는 무거웠다. 수천, 수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엇보다 추악한 재난. 찌푸려진 헬리오스의 미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래. 수호자의 말도 그런 뜻이었겠지. 어머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긴 시간을 들여 촘촘히 계획을 세웠을 거야. 그 아라네아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어머님의 계획을 막지 못할 터.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황후가 세운 계획에 비하면 조잡하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 쪽이니까요. 제 두 번째 질문입니다. 황태자님은 루카리온 님의 계획에 협조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사실 헬리오스의 협력은 중요했다.
내가 황후에게 직접적으로 물었으나 실패했을 경우의 보험. 수호의 심판을 못 쓰게 되면, 그때 황후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헬리오스밖에 없다.
“계획을 설명하지도 않고 묻는 건 협력하지 않으면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건가?”
나는 헬리오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협력할 시 계획을 말해주려고 했었다. 다만 내려간 신뢰도를 쌓기 위해선 미리 말하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해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제가 황후를 만나서 직접 물을 겁니다.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 중이냐고. 그 대답을 마법 아티팩트로 저장할 겁니다.”
“풉, 아니 그게 계획이라고? 너무 허술한데?”
무거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헬리오스는 웃음을 꾹 참고 재차 물었다. 나도 민망했으나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알고 있습니다. 기습 날짜를 맞출 수 있는 다른 계획이 없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기습 날짜도 벌써 정해진 건가? 언제지?”
“그건 대답 후에 말해드리겠습니다.”
“불 속으로 직접 들어갈 만큼 급박한 상황이라는 건가. 그래서 어머님이 순순히 말해주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마…… 죽거나 금제에 걸려 황후의 꼭두각시가 되겠죠.”
도 아니면 모라고 생각하는 계획이었으나 실상은 조금 달랐다. 계획이 잘 풀려서 황후가 내게 속내를 밝히고, 그걸 마법 아티팩트로 촬영하더라도 내 목숨이 무사할 거라곤 장담할 수 없다. 진실을 들려준 황후가 나를 쉽게 풀어줄 리 없을 테니. 이 위험성에 대해서는 일부러 공작이나 검성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세르니아 님은 절대 안 죽습니다.”
“……아, 응. 그래. 네가 지켜줄 거라 믿고 있어.”
잠자코 있던 시리우스였다. 진득한 눈동자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데 부담스러워. 나는 상승하는 심박수를 진정시키려 했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군.”
헬리오스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나는 뺨을 살짝 꼬집었다. 심장이 문제가 아니라 표정 관리부터 망했군. 나는 올라가려는 광대를 애써 누르며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둘 사이가 이렇게나 좋은 줄 몰랐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넘어가겠다.”
“흠흠, 감사합니다.”
“협력하지. 어머님과 제대로 대립을 하기엔 내 세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거든.”
헬리오스의 손등에 있던 문양이 사라졌다.
긴장했던 몸이 풀렸다. 이로써 필요한 사람은 다 모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헬리오스에게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증거를 찾을 경우 수호의 심판을 써서 아라네아와 함께 황후를 한 번에 잡을 거라고.
“결전의 날은 블레닌의 밤인가. 이것 참, 행사를 무사히 끝내더라도 뒤처리가 산더미 같겠군.”
“무사히 끝난다면 말이죠. 반대로 실패의 경우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실패할 경우까지 생각해뒀나?”
“수호의 심판을 못 쓰게 된다면 황태자님이 나서 셔야죠. 아마 몸을 사리거나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세력을 드러낼 테니 황후의 움직임에 맞춰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보다 황태자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실패할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리며 내가 황후를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어머님께 티타임을 요청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수락하실지 모르겠군.”
“일단 내일이나 모레쯤 한번 물어봐 주시겠어요? 만약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블레닌의 밤 당일에 직접 황후가 계신 곳으로 가서라도 대화를 해야겠지만요.”
“설마 진짜 당일에 파티 중간에서 물을 건 아니지?”
“고민하고 있어요.”
헬리오스가 제발 그런 짓만은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극단적으로 말하긴 했으나 나도 블레닌의 밤까지 못 만날 경우 계획을 새로 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라네아 공격을 포기하고 수호의 심판을 쓰기 위해 다른 증거를 찾아야 했다.
“차라리 좀 더 시간을 가지는 건 어때? 네 마음이 조급한 건 알겠는데 네 계획은 그냥 자살행위잖아.”
헬리오스의 펙트 폭력에 대미지를 받았으나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맞아요. 자살행위에 가까운 계획이죠. 황태자님의 말대로 시간을 들여서 아라네아를 다시 찾고, 금제 증상이 일어났던 귀족들을 파악하고, 황후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본 후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조사하고 새로 계획을 짜더라도 황후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듭니다.”
꼬리가 있었다면 진작 잡았을 것이다.
과연 이 상태에서 시간을 더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내 대답은 ‘NO’. 평범한 계획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시간을 더 끌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