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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11화 (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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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타나토스를 보고 당황했으나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새로운 정령을 소환하는 것까지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그녀의 대처능력은 적이지만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거기다 아직 숨겨놓은 수라도 있었는지 이번엔 단검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자살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타고 흐른 피가 땅을 적시자 붉은 마법진이 드러났다. 그녀의 발밑에서 시작된 마법진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처음 보는 마법이었으나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히프노스, 바로 나가!”

“하지만 아직 타나토스와 계약도 안 했…….”

“시간이 없어!”

“으……. 알겠어! 갔다 올게! 타나토스 제발 니아를 지켜줘!”

히프노스는 날개를 파닥이며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마법진도 빠르게 퍼져나갔으나 마법이 발동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기에 히프노스는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황후궁 끝까지 퍼진 마법진은 입구를 기준으로 반투명한 막을 생성했다. 땅에서 솟아나기 시작한 막은 유리 돔처럼 황후궁을 동그랗게 감쌌다.

“쯧, 쥐새끼 한 마리를 놓쳤네요.”

“크르릉!”

황후궁을 감싼 막의 정체를 유추하던 나는 밤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황후가 어느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는 아리엘 양과 약속했는걸요. 세르니아 양을 건드리지 않기로. 그러니 그렇게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러나 밤이는 물러서지 않았고, 황후도 더 이상 내게 다가올 수 없었다. 밤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끄는 틈을 타서 타나토스를 설득해야 했다. 어디까지나 히프노스의 도움으로 소환한 거지만 지금 황후의 마법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타나토스밖에 없었다.

‘타나토스 부탁이야. 네가 싫다면 계약하지 않아도 되니까 힘을 빌려줘.’

[음, 좋다. 히프노스의 부탁도 있었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인간은 처음 봤으니 특별히 너와 임시 계약을 맺겠다.]

임시 계약이든 뭐든 좋았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타나토스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순간 멀미가 났다. 히프노스와 계약할 때랑은 전혀 다른 느낌. 시야가 일그러지고 어둠에 잠식되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으나 타나토스가 잡아줘서 겨우 버텼다. 메마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 타나토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약한 육신이군. 정식 계약을 맺었으면 그대로 육체가 무너졌을 거다. 하긴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가 소환된 것도 거의 천년만이고.]

이야. 미리 말해줬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심호흡을 했다.

“세르니아 양, 그 정령과 계약이라도 맺은 건가요?”

타나토스와 사념으로 대화했기 때문에 황후는 내가 임시 계약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허세를 부렸다.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는 밤이와 어두운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타나토스가 옆에 있으니 정말 든든하다는 생각을 하며.

“네. 황후 폐하가 소환조차 실패했던 죽음의 정령과 계약했습니다. 제가 외부의 도움 받지 못하도록 결계 마법을 사용하셨나 본데 이거 어쩌죠? 외부의 도움 없이 당신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 정말 정체가 뭐죠?”

황후는 겁을 먹거나 놀란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최상급 정령과 계약할 정도의 친화력도 없을 텐데요. 그것도 두 번이나……. 대체 어떻게 계약을 할 수 있는 거죠?”

정령 친화력은 사실 자연 친화력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자란 아이는 바람의 친화력이 높아지고, 불을 가까이하고 자란 이는 불의 친화력이 높아진다. 그에 따라 속성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정령은 죽음을 많이 본 인간이 소환할 수 있는 정령. 평범하게 자란 사람은 절대로 소환할 수 없는 정령이었다.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나요?”

“온실 속에서 편안하게 자라온 당신이 그 정령과 계약 했을 리가 없어요!”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요. 저는 했고, 당신은 못 했으니까요.”

그녀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일그러졌다. 한껏 여유로운 척하며 황후를 자극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황후궁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알 수 없어서 초조했고, 시리우스가 오지 않는 점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보통 텔레포트를 사용해 바로 왔을 텐데, 어째서 아직 안 오는 걸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황후를 자극한 것도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서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황후가 흥분한 사이 나는 전력 파악에 나섰다.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근데 타나토스는 어떤 능력이 있어?’

[생명을 죽일 수 있다.]

역시 그렇겠지. 잠의 정령인 히프노스가 어떤 생명이든 재울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의 정령인 타나토스는 어떤 생명이든 죽일 수 있었다. 완전 치트키잖아! 라고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특히 그의 발밑에 시커멓게 죽어있는 풀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 생명을 죽이는 거라 대가가 있을 것 같았기에.

‘그…… 뭔가 대가가 필요하다거나 대상이 제한된다거나 그런 건 없고?’

[글쎄. 원래는 딱히 없지만 너의 상태를 보아하니 내 능력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군. 인간에게 내 능력을 사용한다면 한두 명 정도.]

다행이었다. 한두 명 정도면 딱 황후만 노리면 되겠다. 히프노스의 힘이 통하지 않았던 부분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녀의 행동이라도 제한해야 했다. 내가 타나토스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는 사이 황후가 먼저 움직였다.

“맞아요. 세르니아 양은 해냈군요. 제가 하지 못한 일을.”

그녀의 발밑에 새로운 마법진이 생겼다. 얼음 마법이었다. 날카로운 얼음창이 일제히 나를 향해 날아왔다.

“크왕!”

밤이가 앞발을 휘두르자 날아오던 얼음창이 반 이상 사라졌다. 밤이가 정면에 있던 얼음창을 부쉈기 때문에 나머지는 스쳐 지나갔다.

“안 건드리기로 했다더니 불리해지니까 약속을 깨는 건가요!”

“잘 생각해보니 팔다리 하나 정도는 날아가도 목숨만 붙어있으면 될 것 같아서요.”

이번엔 불덩이를 만들어낸 황후는 다시 공격해 왔다. 밤이가 그녀의 공격을 막으며 대치하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히프노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니아! 시리우스와 만났어!]

***

네르메스는 세르니아가 나간 문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에겐 처음이었다.

“나를 지켜준다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언제나 지키는 쪽이었다. 심지어 전 공작이었던 모르스조차 네르메스를 지켜준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무력이나 권력으로 네르메스를 위협할 인간은 없었기에.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조카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곤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이리도 싱숭생숭한 것이겠지. 작은 목소리였으나 집무실은 조용했기에 옆에 있던 마리아나와 루카리온이 그의 혼잣말을 듣기엔 충분했다.

“씁쓸한가요? 소중히 지켜온 조카가 둥지를 벗어나기 위해 성장한 것이요.”

마리아나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나뭇가지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세르니아와 지냈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한 네르메스였으니 허전함이 더 클 것이라 생각했다.

“…….”

네르메스는 침묵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있을 때 잘해. 쌍둥이도 그렇고 세르니아도 그렇고 이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

루카리온은 한숨이 섞인 충고를 했다. 졸업한 지 20년도 더 된 제자 녀석이 하나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중얼거림을 덧붙이며. 루카리온은 싸늘하게 식은 홍차로 목을 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수호의 심판을 사용할 수 있을지 물으러 공작가에 방문한 것은 맞지만 세르니아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었다.

“그래서 기다릴 건가?”

“아니요. 세르니아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습니다. 특권은 예정대로 블레닌의 밤에 사용합니다.”

네르메스는 공작이 된 이후 힘을 모아왔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르덴타인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차갑게 가라앉은 녹안은 여전히 문에 머물러 있었다.

“하아, 그럼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준비하고 있겠다. 블레닌의 밤에 보자.”

루카리온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각자의 생각에 오래 잠겨 있었던지라 세르니아가 나가고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저녁쯤에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루카리온은 시급히 돌아가려 했다. 블레닌의 밤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큰일입니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집무실에 들어온 사람은 에리얼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집무실을 훑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무슨 일이지?”

“아리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발작 증세를 일으켜서 의원을 불렀는데 갑자기 눈을 떴습니다.”

“아리가 깨어났니?”

마리아나는 에리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 나갈 기세였다.

“그런데 눈동자 색이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누님은 안 계신가요? 누님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부르라고 했는데…….”

“세르니아는 황궁에 갔다.”

그러나 소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위층에서 ‘아리엘 아가씨, 아직 움직이면 안 됩니다!’ 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이상함을 느낀 그들은 모두 아리엘의 방으로 향했다.

“누가 아가씨 좀 잡아봐!”

“힘이 너무 세!”

계단에 올라서자 소란의 근원이 보였다. 눈이 검게 물든 아리엘과 그런 아리엘의 몸을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시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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