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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멈춰라. 상태를 보아하니 세르니아가 말했던 저주와 연관 있어 보인다.”
네르메스가 아리엘에게 다가가려는 마리아나를 잡았다. 그의 손짓에 시녀들도 물러섰고, 자유가 된 아리엘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흰자까지 검게 물든 아리엘의 모습은 기괴했다.
“……에스 님이…… 황궁에…… 해…… 에레…… 이…… 부르…….”
에리얼의 설명처럼 아리엘은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숨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으나 소드마스터인 네르메스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리엘의 말을 들은 루카리온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젠장! 선수를 뺏긴 건가. 일단 나는 아카데미에 연락해서 올 수 있는 제자들을 모아보겠다.”
말을 마친 루카리온은 대답도 듣지 않고 공작가를 빠져나갔다. 무표정으로 있던 네르메스는 흐느적거리며 복도를 걷고 있는 아리엘의 급소를 가볍게 가격해서 기절시켰다.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 아리엘을 받아 들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리아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네르메스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기절한 아리엘을 보고 있었다. 잠시의 정적 끝에 네르메스는 품에 안긴 아리엘을 꽈악 안으며 무거운 숨을 뱉었다.
“수호의 심판을 사용한다. 당장 병력을 모아라.”
그의 명령에 공작가는 부산스러워졌다. 공작가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출전 준비를 마쳤다.
“에리얼, 너는 공작가에 남아 있어라.”
“저도 가겠습니다!”
에리얼은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전력에서 제외됐다는 생각에 주먹을 말아 쥐며 외쳤다. 네르메스는 그런 에리얼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에리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리엘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러니 너는 공작가에 남아있는 사람을 지켜라.”
“……알겠습니다.”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은 에리얼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네르메스가 말하지 않은 또 한 가지의 이유를 알아챘기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네르메스가 죽더라도 아르덴타인을 이을 에리얼을 남긴 것이었다. 에리얼의 어깨에 전해지는 무게가 무거웠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갑자기 일어난 반란이라 준비가 부족한 상황. 그러나 마리아나가 의연한 표정으로 배웅했다. 네르메스를 선두로 기사단이 황궁으로 출발했다. 공작가에 남아 있는 일꾼들은 출전하는 기사단을 보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마리아나는 어수선해진 공작가를 수습했고, 에리얼은 아리엘의 곁에서 대기했다.
“그런데 데이지 못 봤어?”
“아니. 아침에 보고 못 봤는데.”
“그래?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어디 갔지?”
시녀들의 작은 사담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
시리우스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그의 궁으로 돌아갔다. 세르니아가 시킨 일을 빨리 처리하고 황후궁으로 가야 한다는 사명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마탑주님 결재 서류…….”
“나중에. 그보다 라칸은 어디에 있지?”
“부마탑주님이라면 결계 쪽 마력 수복하고 계십니다.”
“당장 불러와라.”
“……네.”
시리우스의 단호한 명령에 아주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이 스쳤으나 서류를 들고 왔던 마법사는 재빠르게 사라졌다.
“거기, 너 영상구 하나 준비해서 서재로 가져와.”
“네.”
블레닌의 밤 준비로 바쁜 마법사들이었으나 시리우스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눈도 못 마주친 채 모습을 숨길 뿐. 시리우스도 자신을 두려워하는 마법사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만 보이는 또 다른 시야로 정신이 쏠려 있었기에. 황후궁에 도착한 세르니아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영상구 가져왔습니다.”
“마탑주님, 저를 부르셨다고…….”
시리우스가 서재에서 마법진을 그리는 사이 부탁했던 영상구와 부마탑주 라칸이 도착했다. 심부름 온 마법사는 시리우스 앞에 영상구를 놔두고 자리를 떴고, 라칸은 눈을 도르르 굴리며 시리우스의 눈치를 봤다.
“황궁의 결계 수복은 어느 정도 남았지?”
“80% 완료했습니다.”
블레닌의 밤은 단순히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가 아니었다.
정말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였다면 마탑주보다 교황이나 대주교를 불렀을 것이다. 숨겨진 진실, 블레닌의 밤은 축제를 가장한 결계의 정기 점검일이었다. 과거에 대마법사가 황궁에 걸었던 결계 마법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년 한 번씩 마력공급이 필요했고, 다른 왕국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축제로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황족과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나머지는 내일 내가 하겠다. 우선 연결해 놓은 영상구의 저장을 시작해라.”
“수복을 중간에 멈추면 물리적인 충격에 약해집니다.”
“하루쯤은 괜찮을 텐데.”
“그건 그렇지만…….”
결국 라칸도 시리우스의 말을 거스르지 못했다.
직접 영상구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시야를 영상구에 연결해서 저장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마법이기에 이 마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시리우스를 제외하면 라칸뿐이었다. 시리우스는 영상구에 저장을 시작한 라칸을 확인하고 황후궁으로 텔레포트를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이룰 수 없었다.
“마, 마탑주님! 결계가 흔들립니다!”
라칸이 호들갑 떨지 않더라도 시리우스는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결계의 중심부를 건드렸다. 아직 정비하는 도중이라서 결계가 약한 상태였는데 침입자가 건드린 덕분에 더 약해졌다. 내부에서 한 번이라도 마법을 사용할 경우 바로 결계가 깨질 정도로. 시리우스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일어섰다. 결계고 뭐고 당장 세르니아에게 가야 했다. 그에게 최우선은 세르니아였기에.
“결계 때문에 영상구 연결이 불안정해졌습니다!”
이 타이밍에 황후가 황궁의 결계를 건드릴 줄이야. 시리우스는 결계 수복을 미리 끝내 놓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있었는데 도망치려던 세르니아가 붙잡히는 모습이 보였다. 헬리오스 때문에. 헬리오스와 황후의 감각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곤 시리우스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걸어놓은 마법이었기에 그도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가 빠득 갈렸다. 자신의 형이 악의를 가지고 세르니아를 위험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원인이었으니.
“마탑주님, 황태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때마침 한 마법사가 헬리오스와 함께 서재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급한 얼굴이었다.
“시리우스 비상이다. 황후의 세력이 황궁으로 쳐들어 왔고, 기존에 있던 자들 중에서도 배신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렌드윈을 아버님의 호위로 붙여놨으나 반란군의 숫자가 너무 많다. 너의 힘이 필요해. 마탑주로서 마법사들을 이끌고 황궁을 호위해다오.”
시리우스 궁은 본궁과 거리가 가장 멀어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거기다 궁에 있는 사람들도 마법사밖에 없었기에 금제가 발동한 사람도 없었다. 헬리오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뒤늦게 소식을 접했으리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시리우스는 제일 보고 싶지 않았던 낯짝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에 분노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헬리오스에게 성큼 다가가서 멱살을 틀어쥔 시리우스는 최대한 감정을 억눌러 말했다.
“너, 때문에 세르니아 님이 황후에게 잡혔다.”
“그게 무슨 소리지?”
헬리오스는 시리우스 궁에 오기까지 정신없이 움직였다. 세르니아와 대화가 끝난 후 프레세스를 모아 블레닌의 밤에 있을 계획을 설명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금제에 걸린 사람들이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반란군이 황궁에 들이닥쳤다. 그나마 프레세스에는 금제에 걸린 사람이 없어서 역할을 분담해서 황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서 뜬금없이 세르니아가 자신 때문에 황후에게 잡혔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네 녀석과 황후의 감각이 연결되어 있어서 계획이 전부 다 샜다. 그리고 세르니아 님이 인질로 잡혀있지. 하…….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금 당장 지휘에서 손 떼고 방에 들어가서 눈감고 귀를 막고 있어라.”
시리우스는 부글거리는 화를 삼키고 냉정해지려 했다. 세르니아와 연관된 일엔 좀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으나 지금은 화를 내는 것보다 상황을 수습하고 세르니아를 구하러 가는 게 먼저였다.
“감각이 연결됐다니…….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전부 어머님에게 전달 됐다는 건가.”
헬리오스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혹여나 숨어있을 스파이를 그렇게나 견제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 때문에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었다니. 헬리오스는 큰 충격에 잠깐 말을 잃었다. 그와 중에도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몸이 속박된 세르니아를 지키기 위해 시리우스는 자신의 마력을 밤이에게 보냈다. 밤이는 평범한 개가 아니었다. 그의 마력을 먹고 자라는 사역마였다. 시리우스의 마력을 받고 몸집을 키운 밤이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세르니아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시리우스는 텔레포트를 사용하려 했다.
“마탑주님 여기서 텔레포트를 사용하시면 황궁의 결계가 깨집니다!”
영상구를 붙잡고 있던 라칸이 시리우스를 말렸다. 그는 전 마탑주였기에 황궁의 결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정작 시리우스는 차라리 결계가 깨지더라도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해서 황후궁으로 이동하려고 했지만. 시리우스를 막은 것은 라칸이 아니라 황궁 쪽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지축이 흔들리자 시리우스 궁에 있던 마법사들도 소란스러워졌다.
“후, 이런 말 하는 건 좀 뻔뻔하지만 마법으로 감각이 연결된 것이라면 네가 끊어 줄 순 없는 건가?”
헬리오스가 받은 충격은 컸으나 반란이 일어난 상황에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었다. 시리우스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르니아를 구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생각이 짧아졌다. 헬리오스의 말대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그와 황후의 감각을 끊어 놓는 것이었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을 테니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았다. 냉정함을 되찾은 시리우스는 헬리오스의 머리 위에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