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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13화 (11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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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오래되어 감지하기가 어려웠을 뿐, 파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리우스의 손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이 헬리오스의 머리에 닿자 대기가 흔들렸다. 마력의 충돌 때문에 헬리오스 주위에 바람이 발생한 것이다. 이내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헬리오스에게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감각의 연결은 끊었다. 마법사들은 네가 알아서 지휘해라. 나는 황후궁으로 가겠다.”

시리우스는 헬리오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섰다. 헬리오스도 더 이상 시리우스를 잡지 않았다. 세르니아 앞에서만 ‘형님, 형님’ 하는 시리우스가 자신은 물론이고 제국이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 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거절할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현재 황궁에서 유일하게 황후의 세력에서 벗어난 이들이 마탑에서 온 마법사였으니.

“고맙다.”

헬리오스는 멀어져 가는 시리우스의 등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졸지에 중간에 끼어버린 라칸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황궁의 결계를 수복하는 것은 대마법사가 초대 황제와 했던 맹약 때문이었다. 대마법사가 세운 마탑을 독립적인 세력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제국의 결계를 유지해준 것일 뿐 그것과 별개로 마탑은 중립을 지켜야 했다. 국가 간의 정치판에 괜히 참견했다가 다른 국가에서 반발이 나오면 곤란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탑주가 까라는데. 다만 시리우스의 강함을 믿었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드래곤의 현신이라 해도 될 정도였으니. 조금 골치 아플 뿐.

***

“에레니에스 님이 부르신다! 영광을 위해 생명을 바쳐라. 에레니에스 님이 부르신다!”

아리엘의 이상 징후를 보고 바로 달려온 아르덴타인 기사단은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황궁에 도착해서 이상해져 버린 귀족들을 막고 있었다. 아리엘처럼 눈을 검게 물들인 사람들은 황궁을 지키는 황실기사단부터 경비병, 시녀나 관리들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황후의 마력 때문인지 기이할 정도로 강했다. 아리엘이 중얼거렸던 말과 비슷한 말을 주문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그들은 흡사 좀비 같았다.

현재 황실기사단 단장까지 금제 때문에 조종당하고 있어서 황궁을 지키는 병력은 거의 무력했다. 아마 아르덴타인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황제의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모두 이쪽으로 대피하십시오!”

거기다 연쇄적인 폭발 때문에 황궁이 무너지기 시작해서 더욱 난감한 상황이었다. 황궁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대피시키는 사이 황궁을 지키던 결계마저 부서졌다.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성벽을 넘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대피로까지 공격당합니다.”

상황은 계속 불리해졌다. 결계가 부서지기 무섭게 아라네아가 성벽을 넘어와서 대치는 점점 치열해졌다.

“공작님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어차피 반란자니까 그냥 죽이는 게 빠르지 않습니까?”

네르메스의 곁에 있던 기사가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황궁에 도착한 네르메스는 반란자들을 생포해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금제에 당한 사람들은 대체로 황후의 반란 계획에 동조하고 모종의 거래를 했을 테지만 아리엘처럼 협박당했거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금제를 당했을 수 있는 약자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개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 소드마스터가 천 명에 달하는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황궁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너무 넓게 퍼져있었다. 네르메스가 전부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러서세요!”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맑은 여성의 목소리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기사단이 빠르게 물러서자 거대한 물방울이 황궁 안으로 들어오던 아라네아를 집어삼켰다. 거대한 물방울 때문에 아라네아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네르메스도 쉬지 않고 조종당하는 사람들을 기절시켰고, 아르덴타인 기사들은 대피하는 사람들을 호위했다.

“운디네, 장벽을 만들어서 접근을 봉쇄해.”

갈색 로브를 써서 얼굴을 숨긴 여자의 명령에 물방울이 장벽으로 모양을 바꿨다. 위력이 약해 보이는 물의 장벽이었으나 정령의 힘으로 만들어졌기에 쉽사리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라네아가 멈춰 섰다.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그때 아라네아의 뒤에서 마법사를 이끈 헬리오스가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도주로도 막힌 아라네아는 마법사들을 공격했다. 그들이 등을 돌린 순간 물의 장벽이 사라졌고, 대피로를 호위하던 아르덴타인 기사들이 합세해서 아라네아를 잡았다. 황궁에 침입한 아라네아는 잡았으나 아직 성벽을 넘어오는 아라네아의 숫자가 훨씬 많았기에 방심해선 안 됐다.

“물의 정령이라니……. 설마 수호자님인가요?”

갈색 로브, 물의 정령. 한발 늦게 도착한 헬리오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만났던 수호자라는 것을. 다만 새로운 존재의 등장 때문에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금제에 당하지 않은 인간들은 물러서라!]

회색 머리카락에 회색 날개를 가진 정령. 크기는 작았으나 그가 내뿜는 존재감은 컸다. 네르메스는 단번에 상급 이상의 정령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급작스러운 정령의 등장에 헬리오스는 당황했다. 일단 금제를 당하지 않은 인간에게 물러서라 했으니 황후의 세력과 적대관계처럼 보였으나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마법사가 의심을 풀어줬다.

“시리우스 님이 한동안 데리고 다니던 정령입니다.”

시리우스는 히프노스가 세르니아와 계약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마탑에 끌고 갔었다. 새장에 가둬서. 만나기 힘든 정령이었고, 최근에 세르니아와 함께 시리우스 궁에 왔던 것을 봤던 마법사의 말에 금제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히프노스의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히프노스가 정령어를 중얼거렸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굉장하군.”

눈앞에서 최상급 정령의 능력을 본 네르메스의 감상이었다. 어떠한 충돌도 없이 순식간에 금제에 걸린 사람들을 한 번에 제압했다. 외부에 있는 아라네아는 계속 침입하고 있었으나 가장 골치 아픈 상대가 해결됐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너희가 처리해라.]

세르니아가 봤다면 자신의 눈을 의심하거나 히프노스가 맞는지 의심했을 광경. 어린아이 같던 히프노스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강자의 여유를 풍기고 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솔직히 아슬아슬했다. 타나토스까지 소환했기 때문에 조금만 더 강한 힘을 썼더라면 세르니아는 쓰러졌으리라.

“시리우스에게 감사하다고 전해다오.”

[나는 그 녀석의 정령이 아니다! 니아의 정령이다!]

헬리오스의 감사에 억울한 히프노스가 외쳤다. 기껏 도와줬더니 나쁜 인간의 공적으로 돌아가서. 헬리오스는 세르니아의 정령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눈을 크게 떴고,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네르메스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기사단은 황궁 밖에서 들어오는 복면인들을 막아라. 그리고 대피한 사람 중 힘쓰는 사람을 모아 잠든 이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마법사들에겐 그들의 감시를 부탁하지.”

네르메스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내렸다. 잠시 한숨 돌리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그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정령, 세르니아는 어디에 있지?”

로브를 입고 있던 여자, 수호자가 황후궁으로 돌아가려는 히프노스를 붙잡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헬리오스는 역시 자신의 감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서 어디 있었는지, 뭘 하고 있었는지, 정체가 뭔지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지금은 먼저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황후궁에 있다.]

딱히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주는 여자가 꺼림칙해서 히프노스는 조금 거리를 두고 말했다.

“너도 황후궁으로 갈 거지? 나도 동행하겠다.”

***

황후궁까지 달려가던 시리우스가 제자리에 멈췄다. 황후가 사용한 마법 때문에 결계가 깨진 것이 느껴져서. 조급함은 더 커졌다. 어차피 결계도 깨졌으니 망설이지 않고 밤이가 있는 위치로 텔레포트 했으나 실패했다. 히프노스가 나오기 전에 발동된 마법이 황후궁의 안쪽과 바깥쪽을 완전히 단절시킨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아직 밤이와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것과 타나토스라는 새로운 정령의 등장이었다. 시리우스는 우선 황후궁의 결계 부근으로 텔레포트를 했다.

‘시전자가 죽거나 스스로 해제하지 않는 이상 깨지지 않는 결계 마법인가.’

그는 반투명한 유리 돔 모양으로 생성된 결계를 분석했다. 결계를 부수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흘려 넣었으나 번번이 튕겨 나왔다. 시리우스는 반복되는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결계 앞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안 되는 걸 계속 시도해봤자 의미 없을 텐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갈색 로브를 쓴 사람과 히프노스가 있었다.

“뭐야! 나쁜 인간도 결계를 못 깨는 거야?”

히프노스는 자연스럽게 시리우스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평소라면 머리에 앉기 전에 쳐냈을 시리우스는 히프노스와 함께 온 사람을 노려봤다.

“구면이군.”

“그래.”

갈색 로브를 벗자 그와 비슷한 갈색 머리가 흘러나왔다. 시리우스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거슬렸던 여자였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역시 헛소리였나?”

“지금은 나에 관한 것보다 세르니아를 구하는 게 먼저 아닌가?”

“너를 어떻게 믿지?”

고요한 호수를 닮은 푸른 눈동자에 잔파동이 일어났다. 데이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너도 리오에게 들은 적 있겠지? 나는 수호자야. 황후를 죽이기 위해 왔다.”

“…….”

“믿든 안 믿든 상관없지만 일단 정령으로 세르니아에게 안쪽 상황부터 물어보는 게 어때?”

“물의 정령이랑 이야기해 봤는데 이 녀석이 하는 말은 진실이라고 했어! 정령은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지?”

히프노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시리우스의 머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인상을 찌푸린 시리우스는 가벼운 손짓으로 히프노스를 털었다.

“그럼 내가 니아에게 말을 걸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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