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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 시리우스와 만났어!]
히프노스의 발랄한 목소리 때문인지 시리우스의 이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머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안심이 됐다. 황후는 여전히 밤이와 대치하고 있었기에 나는 히프노스에게 외부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물었다.
‘반란군은 어떻게 됐어?’
히프노스는 황후궁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줬다. 아라네아만 처리하면 진압이 거의 끝난다는 것까지. 연속해서 마법을 사용하던 황후도 외부전황을 듣고 있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결계를 해제하려면 시전자를 죽이거나 스스로 풀도록 해야 한대. 시리우스가.]
히프노스가 나쁜 인간이 아니라 시리우스라고 말했다!
약간 감동하며 황후의 기색을 살폈다.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진 황후는 자포자기한 듯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정령과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 세르니아 양도 소식을 들었겠죠?”
“당신도 들었나 보군요. 이제 그만 포기하세요.”
“정말……. 제가 공들여 준비해 온 계획들을 이리도 허무하게 망쳐버리다니. 이 정도면 대단해서 존경심마저 들 정도예요. 어째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저를 방해하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독기가 누그러진 얼굴이었다.
황후가 이렇게 순순히 포기할 리 없는데. 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당신의 개인적인 복수에 제국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브릴리언 왕국에 대한 복수에 아슬란데 제국을 끌어들여서라는 건가요. 하지만 이전에는 제 복수에 대한 건 몰랐을 텐데요. 세르니아 양은 그 전부터 방해해 왔죠.”
“그건…….”
소설을 읽었기에 운명을 틀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태껏 보여줬던 황후의 성격상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시간을 벌기 위해 이런 주제를 꺼낸 것 같았기에.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소중한 존재라. 제게도 그런 게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요. 그리고 세르니아 양의 말이 맞네요. 제 복수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브릴리언 왕국. 지금이라면 오직 저의 힘만으로 브릴리언 왕국에 복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너무 늦은 거겠죠. 세르니아 양, 이리 오세요. 제 피가 필요하잖아요?”
아리엘의 저주를 풀기 위한 황후의 피. 필요하긴 했으나 일부러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방심을 유도해서 다른 것을 노리는 거 같아서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어머, 아직도 경계하는 건가요. 이미 흐름은 그쪽으로 기울었는걸요. 아라네아까지 제압되는 건 시간문제겠죠.”
“그럼 결계부터 풀고 이야기하죠.”
그녀가 정말 포기했다면 외부와 단절시킨 결계도 필요 없으리라. 황후는 내 요구에 묘한 웃음만 띄웠다.
“다른 속셈이 있었군요.”
“음, 너무 티가 났나요? 그래도 제 피가 필요한 것은 변함없죠.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어떻게 받아갈 건가요?”
나는 타나토스에게 황후를 제압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곳에서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능력을 가진 건 타나토스뿐이었으니.
[글쎄. 내가 잡는 순간 생명체는 죽음에 이르지. 저 인간은 꽤나 강해 보이니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만 제압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그건 곤란했다. 황후에게 접근하지 않고 그녀의 피를 어떻게 취할 수 있을까. 단 한 방울만 있어도 괜찮다고 했던 시리우스의 말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그녀가 바로 반란을 일으킬 줄 알았으면 테이블에 앉자마자 포크로 찔렀어야 했는데 하는 작은 후회를 하며.
“크르릉!”
황후와 대치하고 있던 밤이가 돌연 앞발을 휘두르며 그녀를 위협했다. 나와 대화하던 황후도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고, 그 틈에 밤이는 황후의 자리에 있던 뭔가를 들고 내게 왔다. 황후가 결계를 만들 때 손목을 그었던 단검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나 검 날에는 아직 응고되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
“밤아 잘했어!”
황후도 잊고 있었는지 내 손에 들린 피 묻은 단검을 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황후를 공격할 수 있는 순간은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한 지금이었다.
“타나토스!”
내 외침에 타나토스는 황후의 목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스멀스멀 나오는 어둠이 황후에게 스며들었고 그녀의 피부에서 생기가 빠져갔다. 마력으로 젊음을 유지하던 그녀는 점점 주름이 많아졌고, 이내 그녀의 몸은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까맣게 변색한 곳은 재가 되어 부서졌다.
“크윽!”
그녀는 타나토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단단하게 그녀를 잡은 손은 풀리지 않았다. 황후도 느꼈겠지. 다가오는 죽음을.
‘그런데 바로 죽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타나토스에게 잡혀 꼼짝 못 하는 황후를 보며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아리엘의 저주를 풀기 위한 피는 얻었으나 다른 사람 중에서도 황후만 풀 수 있는 금제를 걸어놨다면? 거기다 이번에 일어난 반란에 대해 따로 조사하기 위해서도 그녀의 진술이 필요할 수도. 차라리 제압한 상태에서 감옥에 가두고…….
“망설이면 안 되죠.”
아주 잠깐. 황후의 처분을 고민하는 사이.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은 그녀는 발끝부터 시커멓게 썩어가는 와중에도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 게…… 무슨…….”
깨어있던 수잔이 어느새 내 뒤로 와서 가슴에 검을 꽂은 것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가슴을 뚫고 나온 날카로운 검날이 보였다. 동시에 왈칵 피가 솟았다.
[세르니아!]
황후를 잡고 있던 타나토스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나는 역류하는 피를 한 움큼 뱉으며 황후를 노려봤다.
“세르니아 양이라면 저를 죽이기 전에 한 번쯤 망설일 거라 생각했어요. 제 예상이 맞았네요.”
“혼자는 죽을 수 없다는…… 건가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으나 몸에서 힘이 빠졌고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는 죽지 않아요. 육신은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만 영혼의 일부를 다른 육체에 이식해뒀거든요.”
목까지 재가 되어 부서지는 순간에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 재가 바람에 날려 가는데 희미한 목소리가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 잘 있어요. 마음이 넓은 세르니아 양.”
정말 철두철미했다. 끝까지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뒀다니. 나는 타나토스에게 안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잘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황후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까지 꼭 말해달라고 당부했다.
‘소설에 서술됐던 사건은 어떻게든 일어나는 거였나.’
두 번째 죽음. 인생의 주마등 대신 내가 읽었던 소설이 떠올랐다. 발버둥 쳤으나 바뀌지 않았던 운명에 대해서. 아리엘이 저주로 쓰러지고, 에리얼 대신 황후가 직접 반란을 일으켰고, 나도 결국은 죽게 됐으니.
세르니아 님.
아, 시리우스는 죽지 않았구나. 환청일까.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등나무 아래에서 고백할걸. 왜 그때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서서히 다리가 풀려서 그대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시리우스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울겠지.’
내 앞에만 서면 유독 눈물이 많아지는 아이였으니. 숨 쉬는 것이 힘겨워졌을 무렵, 얼굴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세르니아 님! 지금 바로 치유하겠습니다. 조금만 버티세요!”
환청이 아니었구나.
시리우스의 따뜻한 눈물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역시 울고 있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으나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무거운 손은 시리우스에게 닿지 못했고, 힘없이 떨어지려는 순간 시리우스가 내 손을 잡았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상처가 벌어집니다.”
마지막. 내가 그에게 감정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지금 전해야 하는 말은 한마디였다. 다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사랑해.’
나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닿았을까. 내 감정이 제대로 전해졌을까. 그러나 깊게 생각할 순 없었다. 마지막 말에 시리우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