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몸이 무겁다.
익숙한 감각. 죽었을 텐데 어째서 의식이 있는 걸까. 죽었을…… 텐데? 망막에 빛이 들어왔고 고막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심장이 뚫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당신은 특별히 살려드릴게요.”
이상했다.
분명 황후는 죽었다. 내 심장이 뚫리는 순간, 그녀의 죽음도 확실히 봤었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겨우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꿈이었다. 가끔씩 꾸던 데이지의 꿈.
‘하지만 소설에는 이런 장면은 없었어.’
황후와 데이지가 만난 것은 블레닌의 밤 준비로 황궁에 왔을 때 딱 한 번. 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황후 옆에 쓰러져 있는 헬리오스를 늦게 발견했다.
“리오!”
그것도 데이지가 헬리오스를 향해 부르짖는 목소리를 듣고서.
쓰러진 헬리오스 주위에는 피가 흥건했다. 데이지의 목소리에 반응 없는 헬리오스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아, 데이지의 감정이 전해졌다. 분노, 슬픔, 절망. 다양한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황후를 노려봤으나 황후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데이지 양은 제 예상보다 훨씬 도움이 됐거든요. 덕분에 아르덴타인도 카일렌도 쉽게 치울 수 있었어요. 감사한 마음을 담아 목숨은 살려드리죠.”
황후의 듣기 좋은 부드러운 미성이 노래하듯이 이야기했다. 그녀의 거대한 계획을. 내게 했던 것보다 간단한 설명이었다.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서겠지.’
황후는 데이지가 아카데미에서 헬리오스와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의 계획에 방해될 거라 판단하고 제거하려 했었다. 데이지를 질투하는 아리엘을 이용해서. 그러나 시리우스가 그녀를 대신해 죽는 것을 보고 살려두기로 했다고.
“방해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도움이 됐어요. 거슬리던 아리엘과 시리우스를 한 번에 치울 수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헬리오스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그렌드윈까지 손쉽게 죽일 기회를 만들어 줬죠. 정말 데이지 양에게 고맙다고 생각해요.”
내가 마주 봤던 눈동자였다. 광기에 물들어 번들거리는, 독을 품은 채 만개한 꽃처럼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였다. 정작 데이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내가 그녀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내가 느끼는 것처럼 바로 전해져 알 수 있었다.
“왜……. 대체 왜 리오를 죽인 건가요! 황후 폐하의 아들이잖아요!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거리낌 없이 죽일 수가 있죠?”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원작에 나오지 않은 장면, 그러니까 완결 후의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니. 그거야 제가 황제가 되는 데 헬리오스가 방해가 되기 때문이죠.”
모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황후가 우아하게 손짓하자 그녀의 곁에 있는 수잔이 데이지의 몸을 거칠게 당겼다. 데이지는 수잔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녀의 악력이 너무 세서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해요! 리오는 당신을 어머니로 여겼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어머, 저도 아들로 여겼답니다. 제 배에서 태어나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걸요. 그랬기에 직접 죽인 거죠. 제가 낳은 생명이었으니 제가 거두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서요.”
시야가 뿌예졌다.
눈물이 차올라서 뺨을 타고 흐르는 촉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데이지는 끝까지 몸부림쳤다. 자신이 사랑한 헬리오스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헬리오스…….”
그녀는 황궁에서 내쫓겼다. 수잔에게 끌려가는 동안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싸늘한 시선이나 무심한 외면만이 그녀를 향했다. 입구에 내팽개쳐진 데이지는 자신을 가로막은 경비병들을 보며 허탈하게 헬리오스의 이름을 불렀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황후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사실이, 자신이 선택하고 개척했다고 믿어왔던 운명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데이지, 일어서.]
물처럼 차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허망하게 주저앉은 데이지에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걸었으나 멈추지 않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충격에 휩싸여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데이지는 사람이 없는 골목길에 주저앉았다.
“엘리사…….”
작고 힘없는 목소리. 그러나 엘리사는 그녀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데이지의 주위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어두운 뒷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자 그녀를 지탱해주는 존재가 나타났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리오가 죽었어.”
데이지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울먹이며 말했다. 슬픔에 가득 찬 데이지의 곁을 지키는 엘리사는 그녀의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진정해.]
엘리사는 성인 여성의 키와 비슷했고, 유령처럼 반투명했다. 그리고 데이지와 닮은 푸른 눈동자를 제외하곤 전부 하얀색이었다.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면 달랐을까? 리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리오는 죽지 않았을까?”
[아니. 네가 헬리오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는 죽었을 것이다. 네 탓이 아니야.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지 마.]
“하지만! 하지만 나 때문에 전부 죽었어. 다시 생각해보니 나와 관련된 사람은 다…… 죽었어. 아리엘과 에리얼, 시리우스, 벨라와 그렌드윈도…… 리오까지…….”
[모두 그들의 운명이었다. 네가 관여하지 않아도 그들은 그 여자에게 죽었을 거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했잖아! 네가, 내게 늘 해왔던 말이잖아.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그러니 포기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어떻게 엘리사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파묻었던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드러난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으나 데이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리사에게마저 배신당한 기분이었기에. 소설에서 데이지는 자아가 뚜렷한 여성으로 나온다.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인물. 그 버팀목이 엘리사였다.
최상급 정령인 엘리사는 데이지와 계약을 맺고 그녀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어떤 일이 닥치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주던 엘리사가 운명이라고 단정 지으며 단호하게 말하니 배신감은 더욱 컸다.
[맞아. 운명과 미래는 바꿀 수 있어. 다만 과거는 바꿀 수 없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어. 네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운명과 미래뿐.]
엘리사의 말은 무거웠다.
데이지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엘리사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건가.’
엘리사의 말대로 데이지가 헬리오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황후에게 죽는 것은 변치 않았을 것이다. 시기가 조금 미뤄질 순 있으나 결정적으로 헬리오스가 황후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죽는 것은 똑같을 테니.
‘소설의 결말이 앞으로 행복하게 살 거라는 암시만 있었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아니었어.’
내가 읽었던 소설을 되새기고 있었다.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지 않는다.’는 역시 소설이 아니라 데이지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던 것도 서술트릭이 발생한 것도 데이지의 기억이라는 전제를 하면 앞뒤가 맞았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리오를 지키겠다고 했는데. 차라리 나도 황후의 손에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데이지…….]
데이지는 살아있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죽어있었다. 삶의 의미를 잃은 눈. 엘리사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데이지가 다시 얼굴을 무릎에 묻자 침묵에 잠겼다.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긴 정적이 이어졌고, 엘리사는 무언가 결심이 선 목소리로 데이지를 불렀다.
[만약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수 있어? 네가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게 될지라도?]
데이지는 엘리사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떤 대가라도 상관없어. 리오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좋아. 나도 마찬가지야. 데이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지. 그러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운명도 바꾸길 바랄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데이지는 엘리사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너무 두루뭉술한 말이라 어려웠다. 데이지가 엘리사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려는데 엘리사의 모습이 이상해졌다. 그녀의 형태가 점점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사?”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만 너는 마지막까지 나를 기억해줘.]
데이지는 끝내 엘리사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기에. 시야를 앗아간 빛은 데이지를 감쌌고, 나도 그녀와 함께 의식이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