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16화 (1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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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숲속. 나는 여전히 데이지의 몸에 있었다. 정신을 잃은 뒤에도 꿈은 이어지는 걸까. 어째서 데이지의 꿈을 계속 꾸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이 세계에 환생한 것과 큰 연관이 있는 느낌이었다.

“엘리사!”

데이지는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엘리사를 불렀다. 계약한 정령은 언제 어디서든 소환이 가능했으니 엘리사를 불러 상황을 파악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데이지의 외침에 엘리사는 부응하지 않았다.

“엘리사?”

아무리 불러도 엘리사는 소환되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낯선 환경에 혼자가 됐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녀는 계약했던 다른 정령을 불렀다. 하급 정령인 운디네가 그녀의 부름에 소환이 됐다. 그 밖에도 그녀가 계약했던 정령들은 전부 소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라면 평상시에도 보였을 정령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계약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에 존재하는 정령들을 언제나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데이지는 많이 당황했다. 그녀가 계약했던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했고, 좀 더 높은 급의 정령을 소환하려고 했으나 소환이 되지 않았다.

“대체 여긴…….”

데이지는 정령에게 물어보는 방법은 포기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황궁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엘리사가 정말 뭔가 했다면 리오가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엘리사가 했던 말을 떠올린 데이지는 망설임 없이 황궁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의 운명도 바꾸길 바란다고 했었다. 그럼 죽기 전으로 돌아왔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엘리사는 무슨 정령이었지? 최상급 정령이라고만 말했지 정작 무슨 정령인지 소개된 적은 없었다.

“어째서 아무도 없는 거지?”

황궁에 도착한 데이지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과거에 헬리오스는 데이지에게 황족만 다닐 수 있는 비밀통로를 가르쳐줬었다. 어차피 결혼할 예정이었으니 미리 알려주겠다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머금고. 그 통로로 황궁에 도착한 데이지는 곧장 헬리오스의 궁으로 갔다. 그러나 궁은 비어있었다.

‘엘리사가 실수라도 한 걸까?’

시간을 되돌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때 엘리사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던 것 같았으니까 시간을 돌린 건 아니라는 건가. 내가 고민하는 동안 데이지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녀는 기척을 죽이고 본궁으로 향했다. 황후가 황제가 되었다면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동하던 데이지는 앞에서 다가오는 인기척 때문에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내일 브릴리언 왕녀님이 도착한다더라.”

“엄청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지금 있는 황비님은 어떻게 되려나.”

“글쎄.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시녀들이 잡담을 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말하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데이지도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발걸음을 돌려 시녀들을 따라갔다. 이후 별거 아닌 잡담이 이어졌으나 대체로 그녀들의 대화 주제는 곧 있을 황제의 결혼식이었다.

‘아직 황후가 결혼도 하기 전이라고? 보통은 자신이 어릴 적이나 사건의 큰 분기점쯤으로 돌아가지 않나? 이렇게나 과거로 돌린 이유가 뭐지?’

나는 갑작스럽게 변한 시간의 흐름 때문에 혼란스러워했으나 데이지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마음속 소리가 들렸기에 알 수 있었다. 정령들이랑 이야기할 때처럼 머릿속에서.

[황후가 되기 전에 죽이자. 그럼 아무도 죽지 않을 거야.]

짧지만 강렬한 말이었다. 다만 나는 속으로 그녀를 말리고 있었다. 내 말은 데이지에게 전혀 닿지 않았지만.

‘아니 황후가 되기 전에 죽이면 헬리오스는 못 태어나잖아!’

***

길게 이어지던 데이지의 꿈은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처럼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황후가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인적이 없는 숲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어느새 잠들어 있는 황후가 눈앞에 있었다.

‘뭐야. 언제 황후를 죽이러 온 거지?’

깜깜한 밤이었다. 어떻게 황후의 방까지 들키지 않고 왔는지 궁금했으나 눈앞에 보이는 광경 때문에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단검을 들고 있던 데이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황후의 목을 향해 내리그었으나 검날은 목표물에 닿지 못했다.

[어째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지?]

나는 데이지가 스스로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다해 검을 황후에게 검을 꽂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데이지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황궁을 탈출했다. 어떻게 들어왔나 싶었는데 황족만 아는 비밀통로를 통해서 황후가 머무는 방까지 왔던 것도 덤으로 알게 됐다.

‘실패해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덕분에 헬리오스는 무사히 태어날 수 있을 테니.’

나는 암살 실패에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헬리오스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데이지는 성인인 채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만약 엘리사가 시간을 되돌렸다면 데이지도 지금 태어나선 안 됐다. 성인의 모습인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됐고. 데이지만 시간의 축을 벗어난 걸까? 아니면 데이지가 태어나면 성인인 데이지가 사라지는 걸까? 내가 복잡한 고민에 잠긴 사이 데이지도 복잡한 심경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가 끼어들 수 없는 거야? 그렇다면 어째서 엘리사는 내게 운명을 바꾸라고 한 거지? 엘리사…… 대답해줘.]

그녀는 달을 보며 아련하게 엘리사를 불렀다.

그리고 또다시 장면 전환. 어두웠던 하늘은 한낮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 마주 보고 있는 눈동자는 순도 높은 금물을 발라 놓은 색이었다. 헬리오스. 어린 모습이었으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급한 마음에 몸이 먼저 움직였어.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나는 어떤 상황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았다.

헬리오스가 진실의 맹세에서 말했던, 수호자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거기서 시작된 헬리오스와 데이지의 만남은 꾸준히 이어졌다. 데이지는 언제나 헬리오스의 곁을 맴돌았다. 몇 번이고 미래에 황후가 그를 죽인다고 말하려 했으나 황후를 죽일 수 없었던 것처럼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미래를 바꿀 수 없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미래에 관한 사건을 말하지 않고 리오의 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데이지도 나름 열심히 분발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 갔고, 미래에 일어났던 일은 말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참견은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시리우스가 황후 때문에 궁에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이건 어차피 리오가 곧 알게 될 거니까 내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잊고 있었던 건가? 너무하네.’

데이지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혼자 속으로 핀잔을 줬다. 그러다 헬리오스가 시리우스의 궁을 발견하는 것은 10살 때 일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어이가 없었다.

‘그럼 10년 동안 헬리오스의 주위만 맴돈 거야? 미래를 바꾼다더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나야 중간중간 시간이 스킵 되면서 10년이 아니라 10분처럼 느끼고 있지만 이게 데이지의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10년 동안 제자리 걷기만 한 것이다. 나는 고구마 백 개라도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3인칭 시점으로 바꿨다. 들리진 않겠지만 얼굴을 보고 한소리 해야지 속이 풀릴 것 같았기에.

‘아니, 아무리 행동에 제약이 있다지만 10년 동안……. 어?’

원래 데이지의 얼굴은 검은 물감으로 덧칠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데이지의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굳이 3인칭으로 바꾸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검은색 부분이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도 알고 있는 얼굴.

‘데이지잖아!’

소설의 데이지를 부른 게 아니라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만났던 기억을 잃은 여자를 말한 것이었다. 동일 인물이었다니.

‘그래! 뭔가 미심쩍긴 했어. 딱 봐도 데이지 같았는데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깊이 추궁하진 않았지만. 설마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나?’

내가 어이없어 하는 사이에도 장면은 계속 바뀌었다.

시리우스 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데이지는 헬리오스에게 황후를 믿지 말라고 했다. 원래 일어날 시기에 말하는 것과 정확한 사건, ‘황후가 헬리오스를 죽인다.’ 같은 것이 아니라 ‘황후는 너의 편이 아니다.’ 정도로 순화해서 말하는 것은 허용되는 것을 깨달은 데이지는 황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눈을 떼면 리오가 죽을까 봐 걱정되어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머물렀어. 신경이 온통 리오에게 쏠려서 생각이 짧아졌네. 거기다 지금부터는 리오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할 때. 계속 곁에 있어도 나는 도움이 안 돼. 차라리 외부로 나가서 황후의 수족들을 조사하는 편이 나을지도.]

눈앞에서 헬리오스가 죽는 모습은 데이지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나 보다. 그래도 10년은 좀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헬리오스에게 ‘힘을 키우라’는 충고를 하고 황궁을 나섰다.

[부모님은 괜찮으시겠지. 나는…… 어떻게 됐을까.]

황궁을 나오자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올렸다. 현재 헬리오스가 10살. 데이지도 원래라면 루테란 영지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시기였다. 데이지의 생각은 멈추지 않고 흘러들어왔다.

[나는 인간이 아닌 걸까.]

싫어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을 잘 필요도 없었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10년이나 흘렀음에도 외형변화가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언제까지 데이지의 회상이 이어지는 거지.’

그것과 별개로 나는 답답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전부 데이지의 기억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과거.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보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됐는지, 어째서 죽었어야 할 내가 데이지의 기억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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