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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니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의 몸 안에 있는데 누가 나를 찾는 거지? 의문을 가지는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울창한 숲속에서 하얀 공간으로. 천장도 바닥도 없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건지 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세르니아.”
“너는…… 데이지?”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온통 하얀 공간에 사람이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 데이지였다. 나는 그녀의 몸 안에 있었을 텐데.
“그래. 이미 내 기억은 전부 봤지? 네가 봤던 건 내 과거였고, 이후에는 아라네아를 추적하다가 아카데미 근처에서 쫓기게 되고 널 만나지.”
마주 볼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내가 잘 아는 모습이었다. 기억을 잃은 채 2년간 공작가에서 시녀 일을 했던 데이지. 역시 그녀는 내가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이 맞았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계속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
“정말 기억을 잃었었어?”
“아니.”
“왜 거짓말을 했지?”
데이지의 기억을 보며 줄곧 답답했다. 어째서 나를 만났을 때 이야기하지 않을까. 황후가 반란을 일으켜서 황제가 되려 한다는 걸 말 못 한 것은 제약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헬리오스에게 황후를 믿지 말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내게도 자신이 회귀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없었어. 너는 내 기억 속에 없던 인물이었으니까.”
아, 확실히 데이지는 ‘세르니아’를 본 적 없다. 원래 10살쯤 죽었으니. 잠깐, 소설이 데이지의 기억이라면 외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세르니아’는 본편에서 한 번도 서술되지 않았다. 외전에서 아리엘과 에리얼의 과거를 다루며 처음 나온 캐릭터였다.
“대체 어떻게 외전이……. 아니지. 그보다 내가 읽은 소설이 너의 기억이라면 왜 나를 세르니아로 환생시킨 거야?”
“너를 환생시킨 건 내가 아니라 엘리사야. 네가 읽었다는 소설도 그 소설의 외전도 전부 엘리사가 만들었겠지. 내 기억에서 봤다시피 나는 10년 동안 황궁에 있었어. 큰 이유는 리오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황후에 대해서도 제대로 조사했어.”
데이지는 자신이 10년 동안 황궁에서 숨어 살면서 황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한다. 황후의 세력이 아무리 제국 전체에 넓게 퍼져있더라도 결국엔 그녀에게 모든 정보가 모이게 돼 있으니 그 부분을 역으로 이용했다고. 제국에 퍼져 있는 아라네아가 어떤 주기로 거점을 이동하는지나 10년 동안 황후와 거래를 한 귀족과 다른 왕국과 닿은 인물까지. 의외로 많은 것들을 조사한 상태였고, 반란을 수습할 때 도움 될 자료였다. 기억은 자동으로 스킵 됐으니 내가 못 본 건가.
“그리고 네가 내 기억을 본 것처럼 나도 네 기억을 봤어. 이수연.”
“뭐?”
정말,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다시 누군가에게 불릴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전생의 이름.
“너는 아직도 이 세계를 책 속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처음이라. 과연 그럴까? 너는 아직까지 은연중에 이 세계가 책 속이라는 인식이 있지.”
데이지는 푸른 눈동자는 나를 전부 꿰뚫고 있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무의식에 그런 생각이 남아 있는지 나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유모가 너를 죽이려 했을 때 너는 온정을 베풀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네가 망설임 없이 황후를 죽였다면 너는 무사했을 거야. 왜 그랬을까. 정말 네가 마음이 넓어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어? 두 번째 인생이라 미련이 없어서?”
“…….”
“그럴 리가. 그건 네가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야. 자신조차도 등장인물 취급했기에 가볍기 넘길 수 있었던 거야. 마치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처럼. 제3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거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으나 꽉 다물린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있어. 왜냐하면 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네가 내 기억을 전부 봤던 것처럼. 너의 과거, 네가 느꼈던 감정들까지 나는 알 수 있어.”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됐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흐릿해지던 원작이 갑자기 뚜렷하게 다시 기억나기 시작한 시기. 확실하게 인식한 것은 아카데미 테러 사건 때문에 검성을 만났을 때였으나 정확히는 데이지가 공작가에 일하기 시작할 때쯤부터였다. 그때는 소설과 상관없이 공작가에서만 지냈기에 티가 나지 않았을 뿐.
“어떻게? 뭐 너랑 내가 사실은 같은 영혼이었다던가 그런 거야?”
다른 차원의 나, 이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데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봤던 소설은 내 기억. 정확히 이미 소멸해서 사라진 시간의 편린이야.”
“소멸했다고?”
“그래. 엘리사는 과거를 되돌린 게 아니야. 내가 존재했었던 시간 자체를 지운 것이지.”
그게 가능해?
상상치도 못한 답이었다. 나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시간을 되돌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지웠다니. 전제를 깨부수는 이야기 때문에 머리가 따라가기 힘들었다.
“하급 정령은 5대 원소 정령밖에 없고 중급 정령부터는 자연물의 특성을 가진 정령이 있어. 그리고 상급 정령부터는 자연물에 한정되지 않고 속성의 폭이 넓어지지. 그중 가장 특이한 정령이 최상급 정령이야. 최상급 정령은 하급 정령과 반대로 자연물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정령이 없지.”
“이론은 알고 있어.”
일단 나도 이것저것 주워 읽은 것들이 많았다.
마력이나 정령 친화력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했을 뿐, 마법 지식이나 정령 지식은 꽤나 자세히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내가 소환했던 쌍둥이 정령처럼 잠이나 죽음 또는 생명이나 희망 등 관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엘리사는 기적의 정령이었어. 그녀는 그리 대단한 정령이 아니라고 했지만 내게는 구원 같았지. 내가 정령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녀 덕분이었고.”
기적의 정령이라니. 타나토스보다 거창해 보이는데. 거기다 데이지가 정령을 볼 수 있는 게 엘리사 때문인 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나는 데이지의 말을 끊지 않고 묵묵히 경청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아련해 보였기에.
“네가 있던 세계에는 마력도 없고, 정령도 없고, 신도 없었지만 이곳은 엄연히 창조신이 존재하는 세계. 그렇기에 신관이 있고,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유를 할 수 있지. 기적은 말 그대로 신의 힘. 엘리사는 신에 가장 근접한 정령이야.”
“하지만 최상급 정령 위에 정령왕이 존재하잖아. 정령 중에서 가장 강한 건 정령왕 아니야?”
“정령왕은 정령계를 다스리는 왕. 가장 강한 건 맞아. 다만 정령왕의 강함은 신과 방향성이 달라. 신의 힘이 기적을 일으키는 일. 즉, 순리에서 벗어나는 창조의 힘이라면 정령왕의 힘은 자연계를 유지하는 일. 순리를 따르는 힘이지.”
“잠깐, 말이 너무 어려운데. 그냥 새로운 걸 만드는 능력이랑 원래 있는 걸 유지하는 능력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응.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중요한 게 아니면 굳이 설명 안 해도 되는데. 목 끝까지 차오른 태클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
“아마도 엘리사는 내가 존재했던 시간을 지웠을 거야. 그렇지만 인간을 탄생시키고 영혼을 부여하는 건 신의 영역. 내가 사라진 자리를 다른 영혼으로 메꿔야 했어. 엘리사는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신이 영혼을 관리하지 않는 너의 세상에서 영혼을 데려온 거지.”
“지구에 신이 없어서 마음대로 영혼을 빼 올 수 있다는 건가?”
“아마도. 진실을 알려줄 엘리사가 없기 때문에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 뿐이지만.”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엘리사는 사라졌다. 엘리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데이지의 추측이었으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단 진실에 가까우리라.
“원래 차원을 이동시키는 것은 신의 고유 능력이지만 정령은 차원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내 기억을 ‘소설’로 만들어서 차원과 차원을 잇는 매개체로 사용한 거겠지. 최상급 정령의 힘을 대가로 해서.”
“왜 하필 나야? 그 소설은 꽤나 인기가 많았고,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읽었을 텐데.”
내 질문에 고민하던 데이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널 선택한 건 내가 아니라 엘리사니까.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으론 너의 마지막과 관련 있지 않을까. 너는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생명을 살렸어. 그리고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따졌을 때 네가 적임이라고 판단했겠지. 결과적으로 엘리사의 선택은 옳았어. 너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모두를 살려냈지. 너는 운명을 바꿨으니까.”
기뻐해야 하나. 솔직히 찝찝한 기분이었다. 약간 이용당한 느낌이랄까.
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데이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 들었던 의문.
“그럼 어째서 루테론 자작가의 장녀가 아니라 아르덴타인 공작가에 태어난 거지? 그것도 모르는 건가?”
“아마도…… 엘리사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네가 내 자리에 태어났어도 같은 운명을 반복했을 수 있으니까…….”
이번 질문은 데이지도 자신 없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녀도 모르는 건가.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생각을 정리했다. 원래 세르니아였던 영혼이 데이지 대신 태어난 거고, 나는 그런 세르니아 대신 태어난 거겠지. 어쩌면 세르니아의 자살이 나비효과처럼 번져 황후의 계획에 도움 됐다는 걸지도. 그걸 막지 않는 이상 미래를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해서 엘리사가 바꾼 거라고 생각했다.
“엘리사는 운명을 바꾸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안배를 만들어놨어. 네가 가끔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안감, 꺼림칙한 느낌은 이미 일어났던 시간에서부터 전해지는 일종의 경고 같은 거였어.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며 네가 피해갈 수 있도록 한 엘리사의 안배.”
경고라니.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데이지의 말은 이해가 됐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높은 확률로 안 좋은 일이 닥치기 전에 느껴졌으니까. 문제는 황후의 반란 때도 느꼈지만 시리우스와 함께 있을 때도 그런 불안감을 종종 느꼈었다. 그것도 경고였을까? 나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밀어두고 데이지에게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그래. 우린 운명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아까는 기억을 공유한다더니 이번엔 운명인가.
회귀하고 10년 동안 헬리오스의 곁에서 맴돌면서 하는 것 없어 보였는데 언제 이렇게까지 알아낸 거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는 붙잡고 제발 길게 풀어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