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 공작의 우울-
“……넬. 가문을…… 아르덴타인을 부탁…… 한다.”
악몽을 꾼다.
한낮임에도 검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진한 회색 구름에 가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
“형님.”
“…….”
목이 멨다. 잠긴 목소리로 형님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싱그럽게 빛나던 연두색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데도 그는 마지막까지 웃고 있었다.
“형님.”
네르메스는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형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
사고는 급작스러웠다. 네르메스의 결혼식을 위해 수도에서 아르덴타인 영지로 오던 중에 발생한 마차 사고였다.
공작부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공작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었다. 하지만 응급조치가 늦어져 영지로 왔을 땐 손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형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르덴타인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네르메스에겐 족쇄이자 삶의 이유였다.
“공작님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
그는 언제나 공작가를 위했다. 부인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것도 가문을 잇기 위해서였다. 다만, 자신에게도 자식이 생겼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형님의 자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님은 요양 차 영지로 내려가신다고 하십니다.”
“알겠다.”
데인은 그런 네르메스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봤다.
예전부터 감정 기복이 크지 않고, 무뚝뚝한 편이긴 했으나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차 사고 이후 감정을 도려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웃음은 물론이고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 할 말 있나?”
“아닙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데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그의 옆을 묵묵히 지키는 것뿐.
***
삭막하던 공작가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세르니아가 처음으로 네르메스를 마주한 날이었다.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네르메스가 아이들과 만나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끔씩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에게 너무 이질적이었다. 그들과 자신의 사이는 절대 연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은회색 눈동자를 보기 전까지는.
“아리엘과 에리얼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제넘은 참견이라.”
7살밖에 안 된 아이는 자신의 형수를 쏙 빼닮았었다. 스스럼없이 똑바로 마주 보는 눈과 당돌하다 생각할 만큼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부딪쳐오는 모습이.
“에리얼과 아리엘의 사촌이며 나의 조카. 인 관계에서 주제넘은 참견을 하려면 어떤 건지 궁금하군.”
솔직히 그녀를 일부러 무시한 것도 맞았다. 세르니아를 보면 형님이 생각날까 봐. 죄책감이 짓눌렀다. 네르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은 왠지 악몽을 꿀 것 같았다.
“흠, 다름이 아니라 아리엘과 에리얼은 아직 5살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필요할 시기죠. 공작가의 일로 바쁘시다는 것은 알지만 가끔씩은 아이들과 티타임이라도 가졌으면 합니다.”
네르메스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어린아이답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요구를 할 거라 예상도 못 한 네르메스는 세르니아의 심중을 읽기 위해 그녀의 표정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니 생각이 표정에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네르메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형수를 쏙 빼닮았다고 생각했던 세르니아는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서 형님이 보였다. 형님처럼 선홍색 머리칼도 아니었고, 연두색 눈동자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는데도 형님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까지 웃고 있었던 자신의 형님이.
“……너는.”
‘너는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거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도저히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을 뺏은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쌍둥이가 시킨 건가? 사랑을 받고 싶다고?”
네르메스는 몇 번 본 적 없는 쌍둥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쌍둥이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니요. 저 스스로 판단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겐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주위에 아이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부모님에 비교할 바는 아니죠.”
세르니아의 한마디, 한마디가 네르메스의 마음을 찔러왔다. 그녀가 하는 말이 전부 그를 공격했다.
“그 아이들은 장차 아르덴타인을 이어받을 아이들이다. 어리광을 받아줄 수 없다.”
세르니아가 받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자식들에게만 줄 수 없었다. 그녀가 강경하게 말할수록 네르메스의 마음은 아이들과 ‘단절’하는 쪽으로 굳어졌다. 적어도 공평하게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도 부모님과 잘 지내지 못했었다. 네르메스를 챙겨준 사람은 언제나 형님이었다.
“단순히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게 아니에요. 씨앗이 발아할 때 토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영양이 풍부한 토지에서 자란 식물은 건강하게 자라고, 황폐한 토지에서 자란 식물은 약하죠. 부모는 아이들의 토지입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릴 양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과한 영양분은 식물을 썩게 만들지.”
그는 토지가 될 자격이 없다. 어린아이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녀의 의견을 부정했다.
“좋아요. 그럼 거래를 해요.”
“거래?”
“네. 공작님은 가문을 이을 쌍둥이가 다른 귀족들보다 현명하고 똑똑하고 강하게 자랐으면 하겠죠.”
“…….”
네르메스는 어이가 없었다. 7살짜리 아이가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대체 뭘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교육에서 중요한 건 당근과 채찍! 공작님처럼 채찍만 휘두르면 언젠가 망가질 거예요.”
“…….”
역시 이 아이는 자신을 비난하기 위해 온 것인가. ‘망가진다.’는 말은 마치 자신에게 내뱉는 말 같았다. 한편으론 흐릿해진 추억이 떠올랐다.
‘네르메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않으면 나중에 슬퍼도 어떻게 울어야 할지 잊어버리게 돼. 그러니까 웃고 싶을 땐 크게 웃고, 울고 싶을 땐 펑펑 울어!’
‘맞아. 언제나 너의 옆에 있어 주는 든든한 형님도 있잖아.’
‘모르스는 감정 숨기는 법 좀 배워.’
온실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로엔과 같은 말을 하는군.”
무의식적으로 나간 말이었다. 처음이었다. 세르니아에게 형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그 정도에 망가질 만큼 약한 녀석을 필요 없다.”
네르메스는 자신의 말을 수습하기 위해 주제를 돌렸다.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세르니아의 눈동자에 실망감이 스쳤다. 그는 그제야 세르니아가 순수하게 쌍둥이를 위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한 가지. 네르메스는 자신이 세르니아에게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에게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뺏었기에.
‘고작 어린아이의 미움을 살까 봐 피해 다녔던 건가.’
약한 것은 자신이었다. 어떠한 증오도 미움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르니아는 역시 그들의 자식답게 강했다.
네르메스는 세르니아가 뭐라고 하는지 듣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신념을 담아 자신에게 부딪쳐오는 그녀가 유쾌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었다. 아니 형님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네르메스가 죄책감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낀 것은. 거래하자더니 자신의 이득은 쌍둥이가 잘 자라는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즐거워졌다.
“너는 괜찮은 건가?”
“네? 뭐가요?”
네르메스의 물음에 세르니아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너의 부모님을 내가 뺏었는데 원망하지 않는 거냐.’라든가 ‘너는 부모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거냐.’ 등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으나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됐다. 데인에게 말해놓겠다.”
“정말요? 공작님 감사합니다.”
네르메스의 앞까지 달려와서 고개를 숙이는 세르니아를 보자 무심코 손이 나갔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세르니아는 잽싸게 나가버렸다. 허공에 있는 손을 움켜쥐었다.
‘형님, 제가 잘하고 있는 걸까요.’
여전히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네르메스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이들은 눈 깜짝할 새 자랐다.
네르메스는 여전히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서툴렀다. 세르니아가 없었더라면 쌍둥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몰라 난감했을 것이다. 그녀는 몸소 아이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려줬다. 마치 그에게 이렇게 하라는 듯이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끔 자신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쌍둥이와 고작 2살 차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군.’
배움의 성취는 쌍둥이가 월등히 높았다. 그러나 세르니아는 배우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본적인 교양과 예절 수업만 받고, 아카데미에 가는 것도 거부했으면서.
‘종잡을 수 없다.’
세르니아의 행동은 예측불허, 기상천외 그 자체였다. 그래서 신기했다. 눈길이 가고 호기심이 생겼다. 더, 더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네르메스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삼촌으로서, 가족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것을. 유모 저주 미수사건 때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초조했었다. 여태껏 방치해 왔던 것이 그녀에게 상처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네? 공작님이 미덥지 못하냐고요? 그럴 리가 있나요. 칼보다 무섭게 일 처리 하시는 걸로 유명한 공작님인데.”
무슨 의도로 말한 걸까. 네르메스는 이어지는 세르니아의 칭찬이라는 말에 안도했다.
“다행이군.”
진심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 이후 공작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네르메스는 한 달에 한 번 함께하는 티타임에 익숙해졌고, 네르메스에게 그 티타임은 소중해졌다.
이후 황태자 탄신연회에서 사라졌을 때는 정말 놀랐었다. 아니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기사단과 연못으로 이동하면서도 불안감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오기 싫다던 아이를 괜히 끌고 왔다는 후회와 형님이 맡기신 아이마저 자신 때문에 잃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이 무겁게 짓눌렀다.
“세르니아!”
물에 푹 젖은 그녀의 안아 들었다. 네르메스는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사태를 수습하고 공작가로 돌아왔으나 소란은 가라앉았지 않았다. 쌍둥이는 세르니아가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전전긍긍했고, 의원까지 호출해 상태를 보고 나서야 세르니아는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 간호하겠다는 쌍둥이를 간신히 떼어내자 공작가는 조용해졌다.
‘너마저 잃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르메스는 잠들어 있는 세르니아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천진난만하게 잠들어 있는 조카는 네르메스에게 특별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존경하던 형님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동시에 형님이 살아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 그는 이제야 형님의 마지막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형님이 부탁한 아르덴타인은 단순히 가문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아르덴타인 전부를 말했다. 아르덴타인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과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영지민, 공작부인과 쌍둥이, 세르니아. 그 안에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해서 남긴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르메스가 세상과 단절되지 않도록.
‘강해져야 한다. 더 굳건해 져야 한다.’
사랑하는 아르덴타인을 지키기 위해서.
-Hide : 그녀는 모르는 이야기-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고위귀족은 물론이고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아카데미 원장이나 검성, 부마탑주까지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고 있었다. 거기다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아직 잎사귀가 자라지 않아 계절에 맞지 않게 이질적으로 핀 보라색 등나무꽃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계절에 맞지 않게 만개한 꽃이 결혼식을 한층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마리아나는 시리우스에게 안겨서 퇴장하는 세르니아를 보며 슬며시 물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지.”
네르메스는 멀어져가는 세르니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네르메스와 대화를 포기했다. 깊어진 미간의 주름을 봤을 때 여기서 건드려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째서 누님의 결혼을 허락하신 겁니까!”
그러나 굳이 건드리는 사람이 등장했다.
마리아나는 부채를 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자신에게 괜히 불똥이 튈까 봐.
“…….”
네르메스는 침묵했다.
사실 그도 이렇게 빨리 결혼시킬 생각은 없었었다. 그저 그가 내기에서 졌을 뿐.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에리얼은 기어코 네르메스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혹시 시리우스가 마탑주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문에 도움 될 거라 누님과 결혼시킨 겁니까! 그런 의도로 누님이 이용된 거라면 저는, 읍!”
안타깝게도 에리얼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네르메스가 커다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 확실히 에리얼이 평소보다 흥분해서 도 넘은 말을 한 것도 있으나 하필 지금 네르메스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을 했다.
“고작, 고작 마탑이 아르덴타인에 도움 될 거라 생각하는 거냐.”
솔직히 ‘고작’ 마탑이 아니었으나 활화산보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리얼을 노려보는 네르메스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 에리얼을 말리러 온 아리엘은 네르메스의 분노를 보고 마리아나 옆으로 갔다. 그녀도 괜한 불똥은 사양이었기에.
“그르므으쯔스…….”
네르메스가 에리얼의 하관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었으나 에리얼은 꿋꿋이 ‘그럼 어째서’라며 질문을 이어갔다.
“……졌다.”
“!”
“?”
에리얼은 눈을 크게 떴으나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부채를 팔랑이며 즐겁게 웃고 있는 마리아나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럼.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지.”
마리아나도 세르니아가 아르덴타인을 나가는 것은 아쉽지만 그와 별개로 재밌는 구경을 했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시리우스가 결혼 허락을 맡으러 온 날, 당연히 네르메스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카를 허여멀건 한 녀석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네르메스와 시리우스가 내기를 했단다. 세르니아의 결혼을 걸고.”
세르니아에겐 둘이서 할 말이 있으니 잠시 나가 달라고 부탁했고, 쌓인 서류를 처리하느라 시리우스가 왔다는 소식을 늦게 들은 마리아나가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내기가 시작한 상태였다.
“무슨 내기였나요?”
아리엘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마리아나를 재촉했다.
아리엘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진심으로 아쉬웠다. 미리 알았더라면 무조건 구경 갔을 텐데.
“공작가의 집무실은 지하 연무장과 연결되어 있지.”
에리얼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직접 가본 적도 있었고.
대대로 소드마스터를 배출하는 가문답게 머리 쓰다가 답답하면 몸도 좀 움직이라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공간이라 알고 있었다.
“설마 대련을 했는데 아버님이 지셨다는 건가요?”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네르메스의 패배라니.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아리엘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칙이었다.”
“읍!!!”
네르메스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는지 에리얼의 표정이 고통스러워졌다. 입이 막혀있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지만.
“계약서 쓸 때 조심하셨어야죠.”
눈을 접으며 웃는 마리아나와 대조적으로 네르메스의 얼굴은 구겨졌다.
내기의 증명을 하기 위해 마리아나를 증인으로 두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승부에서 이긴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 네르메스는 자신의 검술을 너무 믿었기에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다.
“공작가의 마법 무효 결계를 상회할 줄은 예상 못 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명색의 마탑주인데 그 정도는 예상하셨어야죠.”
“공작가에 걸린 결계는 드래곤 정도 돼야 뚫을 수 있다. 전 마탑주인 라칸도 못 뚫었지.”
“어쨌든 당신이 방심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요.”
“…….”
만약 계약서를 쓸 때 세르니아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으리라. 틈만 나면 텔레포트로 자신의 방에 드나든 시리우스의 마법을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 다만 그 사실을 모르는 편이 평화를 지키는 것이었기에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이거 언니는 모르죠?”
“그렇지.”
험악하게 구겨졌던 네르메스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씁쓸하지만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예상보다 조금 빨리 일어났을 뿐. 에리얼을 잡고 있던 손도 풀었다. 얼굴에 멍이 들 것 같다는 에리얼의 칭얼거림을 무시한 네르메스는 아리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좀 천천히 하거라.”
목적어가 생략된 단어였으나 아리엘은 금방 이해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듣는 날이 올 거라 예상도 못 했기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아리 결혼은 꼭 할 필요도 없단다.”
심지어 옆에 있던 마리아나가 한술 더 떴다.
“너를 데려가는 남자가 불쌍하니 그냥 있어도 돼. 너 하나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딱히 결혼 생각이 없던 아리엘이었으나 에리얼까지 잡는 것을 보니 자신의 결혼은 어쩌면 세르니아보다 더 순탄치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