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화.
“정말이지 더는 참아 줄 수가 없군.”
한 달 만에 마주한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늘하기만 했다.
창백한 안색의 아내를 보고도 냉담하기만 한 남편의 반응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님, 괜찮으세요?”
불안정한 앤시아의 상태를 걱정한 건 남편이 아닌 그의 품에 안긴 여인이었다.
“나, 나는…….”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몸뚱이를 양팔로 끌어안으며 버티는데도 남편은 걱정 한 줌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냉담한 반응에 악으로 가득 차 있던 앤시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작 남편의 시선은 앤시아가 아닌 품 안의 여인에게 향해 있었다. 항상 무표정하던 남편의 얼굴에 안쓰럽다는 듯 걱정이 깃들었다.
“비앙카.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챙기지 않는 건가.”
찰나의 기대조차 남편의 입에서 나온 여인의 이름에 산산이 부서졌다.
“아, 네. 전 괜찮아요.”
비앙카의 팔에 조금 전 앤시아가 물건을 던지며 생긴 상처가 선명했다. 길게 패인 상처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앙카의 발밑에는 보석 박힌 화려한 오르골이 부서진 채 떨어져 있었다. 남편이 선물해 준 몇 안 되는 소중한 물건임에도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던지고 말았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 시선을 주고 있자니 한숨 섞인 남편의 핀잔이 들려왔다.
“그대는 사과조차 하지 않는 건가. 뻔뻔하군.”
“아니에요. 마님이 편찮으신데 제가 더 신경 써야 했어요.”
비앙카는 자신을 탓하라는 듯 앤시아를 옹호했다. 그런 비앙카의 호의는 앤시아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보다 남편이자 공작인 리샤르에게 바싹 붙어 선 비앙카가 몹시도 거슬렸다. 당장에라도 떨어져라 소리치고 싶은 걸 참느라 앤시아는 입술만 짓씹었다.
두 사람의 대조되는 반응에 리샤르의 한숨이 짙어졌다.
“비앙카. 그대는 너무 상냥하구나. 내가 보았으니 그리 두둔할 필요 없다.”
앤시아에게는 차갑던 리샤르의 시선이 비앙카에게 향할 때는 더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비앙카를 향해 왜 네가 그에게 안겨 있냐며 악을 쓰며 소리치고 싶었으나 리샤르의 서늘한 시선에 앤시아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저 새하얀 러그 위로 점점이 떨어져 내린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앤시아에게 잠시나마 시선을 두었던 리샤르는 제 품 안에 있던 비앙카의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치료부터 하지.”
“전 괜찮아요, 리샤르 님. 그보다 마님을…….”
앤시아를 걱정하는 비앙카의 호의 가득한 목소리보다 그 입에서 나온 남편의 이름 석 자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 결국 앤시아의 인내심이 무너졌다.
“네가 감히!”
“마, 마님?”
리샤르를 향해 수줍게 웃고 있던 비앙카는 비명과도 같은 앤시아의 분노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앤시아를 돌아보는 비앙카의 선량해 보이는 녹안이 앤시아의 눈엔 가증스럽기만 했다. 같은 녹안임에도 비앙카의 눈에 깃든 맑은 선량함과 달리 자신의 색은 추악한 질투심으로 어두워진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너, 어디서 구르다 온지도 모를 평민 주제에. 감히 공작님의 이름을 입에 담아?”
자신도 부르지 못하는 남편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다니.
앤시아는 차마 질투심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못한 채 평소 신경쓰지도 않던 비앙카의 출신을 입에 담았다.
그 결과 리샤르의 인내심 역시 끊어지고야 말았다.
“하……. 그대야말로 신분을 논할 입장은 아니지 않나.”
가끔이기는 하나 꼬박꼬박 부인이라 불러 주었던 리샤르의 냉정한 호칭에 앤시아는 또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대 역시 본질은 평민이 아니던가.”
그대라는 말이 비앙카를 향할 때와 앤시아를 향할 때의 온도 차이가 극명했다.
“저는,전 레슬리 백작가의”
“양녀이지. 그 전에는 랜피스자작이었고, 그마저도 돈으로 산 것 아닌가?”
공작가에 새 사람을 들이는 일에 이 정도도 조사하지 않았을까.
단지 결혼 후 한 번도 앤시아의 핏줄이나 가문에 대해 언급한 적없었기에 알고 있는 줄 몰랐다.
“그저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시간을 주면 적응하리라 짐작했건만. 이리 뒤틀린 속내를 감추고 있는 줄 몰랐군.”
리샤르의 서늘한 시선에 경멸이 섞여 들었다.
남편의 더없이 차가운 눈빛이 앤시아에게 지독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두려움과 서운함에 온몸을 덜덜 떨던 앤시아의 무릎이 꺾였다.
“마님!”
“피가 멈추질 않으니 의사를 만나는 게 좋겠군. 가지.”
부드러운 러그에 무너져 내린 앤시아를 둔 채 리샤르는 비앙카와 함께 뒤돌아섰다.
가지 말아요.
날 혼자 두지 말아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목 안으로 삼켜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몇 번이고 내밀었으나 리샤르의 등은 점점 멀어질 뿐, 뒤돌아보는 건 비앙카였다.
결국, 남편과 함께 멀어지는 비앙카를 보며 고였던 눈물을 흘려냈다.
아무도 제 편이 없는 공작가에 시집와 유일한 구원 줄이던 남편마저 냉정하게 등 돌려 버린 순간.
앤시아 그윈티드로 더는 이곳에서 버틸 수 없음을 깨달았다.
***
“그렇게 남주에게 외면받은 악녀 앤시아는 소설에서 퇴장하는 거야.”
“아가씨, 또 자기보고 악녀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꺅! 메, 메리?”
폭신한 이불 위에서 뒹굴뒹굴하던 앤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저도 모르게 구겨 버릴 만큼 당황했다. 정작 하녀인 메리는 앤시아가 구긴 종이보다 구겨진 드레스 자락이 더 신경 쓰이는 듯 손놀림이 바빴다.
“천사같이 사랑스럽고 예쁜 우리 아가씨가 뭐가 못나서 악녀라는 거예요?”
“그냥 혼잣말이야. 그보다, 오라버니는?”
“안 그래도 지금 나가시면 시간이 딱 맞을 거 같아 알려 드리려고 왔어요.”
“벌써?!”
메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앤시아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뛴다고 해 봤자 툭하면 쓰러지는 연약한 몸뚱이다 보니 실제는 약간 빠르게 걷다가 종종걸음을 치는 정도였지만,
“아가씨,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넘어지시면 큰일 나요.”
“오라버니가 빨리 보고 싶은 걸.”
“어머, 아침에도 보고 또 보고 싶으세요?”
“응. 너무 보고 싶어.”
외모만 두고 보더라도 한없이 들여다보고 싶을 만큼 빼어난 미모의 앤시아가 환하게 웃자 각자 바삐 움직이던 사용인의 걸음이 멈췄다.
“오늘도 너무너무 예쁜 우리 아가씨.”
“도련님과 언제 약혼식을 올릴까?”
“두 분의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울 거야.”
들려오는 사용인들의 한결같은 호의와 당연하다는 듯 미래의 마님으로 여기는 태도에 앤시아는 더욱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다들 그렇게 오해해 줘.
그래야 억지로 타지에 시집간 앤시아를 불쌍하게 여기고 소문을 내 주겠지.’
앤시아 랜피스.
백작가 사용인들의 기대와 달리 미래 공작 부인이 될 존재였다.
(공작의 첫사랑)이라는 소설 속 조연 중 하나로 공작 부인은 되지만 공작의 첫사랑은 아니었기에 어설픈 악녀 노릇을 하다가 퇴장하게 될 운명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미래를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지.’
김시아는 오 년 전 앤시아의 몸으로 눈을 떴을 때 이곳이 책 속세상임을 자각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으나 자신이 소설 속 악녀가 될 운명임을 알게 된 이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미래를 대비했다.
그래 봤자 툭하면 픽픽 쓰러지는 폐기물 수준의 몸뚱이를 연약하다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게 최선이었지만.
김시아는 거울 속 사랑스러운 앤시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매번다짐했다.
이 예쁜 얼굴을 적절히 이용하겠다고.
어설픈 악녀로 끝나지 않게 해줄 거라고.
최소한 무일푼으로 도망치듯 떠나게 하진 않을 거라고 매번 다 짐했다.
“그러니 항상 웃어야 해.”
그 첫걸음은 원작이었다면 양부모를 잃은 슬픔으로 우울증에 빠졌을 앤시아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
처음에는 슬픔을 머금은 젖은 눈으로 미약한 미소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을 열 듯 점점 밝아지는 웃음을 보이며 걱정하던 백작 부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꽃처럼 아름다운 앤시아의 웃음은 원작과 달리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나단 레슬리의 미래도 바꿔 놓았다.
나단은 원작이었다면 작년에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원작 앤시아의 끝없는 우울에 밀려 허무하게 사라졌을 생명.
“오라버니~!”
“앤시아.”
마차에서 내리는 나단을 향해 인사하던 사용인들은 달려오는 앤시아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나단을 발견한 앤시아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나단 오라버니 ~!”
정원을 가로지르는 앤시아의 청아한 목소리에 정원사의 가위질이 멈추고 짐을 끌던 하인의 걸음도 멈췄다.
드레스를 붙잡고 팔랑거리며 달리는 건 성인식을 코앞에 둔 레이디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앤시아의 격 없고 자유분방하며 귀족적이지도 않은 행동 하나하나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누구도 말릴 생각을 못했다.
“앤시아, 천천히 와. 그러다 넘어질라.”
하늘하늘한 숄을 팔락이며 품으로 떨어지듯 안겨 오는 앤시아를 밀어내기는커녕 나단은 기꺼이 팔을 벌려 맞이했다.
“오라버니, 보고 싶었어요.”
하루 한 번, 소가주인 나단 레슬리를 맞이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인 귀족 소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나도 보고 싶었단다.”
황궁 출입을 위해 부족함 없이 차려입은 나단의 정복 위로 얇은 숄이 부드럽게 휘감겼다. 지켜보던 이들 대부분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시선을 떼지 못할만큼 친밀하고 다정한 포옹이었다.
급히 달려오느라 살짝 흐트러진 앤시아의 빛을 머금은 듯 화사한 백금색 머리카락을 나단은 익숙한 듯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 해 주는 나단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앤시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나오래도.”
“조금 추운 것보다 오라버니 마중이 더 중요해요.”
“앤, 너를 내가 어찌 이기겠니.”
나단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직 약혼식도 치르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백작저에서 앤시아와 나단이 결혼할 것임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 앤시아에게 꼭 필요한 오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