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화.
“아가~”
“어머니!”
나단을 마중 나왔던 앤시아는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백작 부인을 보고 곧장 품으로 뛰어들었다. 앤시아를 마주 안는 백작 부인, 힐다 레슬리의 행동은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이런, 아가. 볼이 차구나. 어떻게 알고 마중을 다 나왔니?”
“흠흠, 절 마중 나온 겁니다.”
“어머, 아들도 있었구나. 우리 아가가 너무 빛이 나서 아들이 안 보였지 뭐니.”
다분히 장난기 섞인 푸근함이 힐다의 웃음에 배어 있었다. 그런 힐다를 보며 마냥 기쁘다는 듯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리는 앤시아의 행동은 순진무구해 보였다.
“아가, 맨날 보는 아들 마중은 집 안에서 해도 된단다. 이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래도 밖에 나온 덕에 이렇게 어머니도 맞아 드릴 수 있어서 좋은걸요.”
애정 가득 담긴 예쁜 눈으로 웃는 앤시아를 코앞에서 본 힐다는 더는 참지 못하고 앤시아를 꽉끌어안았다.
“아유, 예쁜 것. 어쩜 이리 예쁜 말만 골라 할까.”
순간 숨이 턱 막힐 만한 힘이었으나 앤시아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힐다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비벼 댔다.
“헤헤, 어머니. 정말 좋아해요.”
“나도 우리 앤을 너무너무 좋아한단다.”
후견인일 뿐인 백작 부인을 향해 거리낌 없이 어머니라 부르며 친밀감을 보이는 앤시아나 그런 앤시아를 아가라 부르며 제 자식보다 귀히 여기는 힐다의 행동은 사용인들에겐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아가.”
“네, 어머니.”
대답만 해도 사랑스럽다는 듯 앤시아를 보는 힐다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앤시아를 향한 죄책감과 부채감으로 시작된 감정이 애정으로 변모해 더욱 크기를 키웠다.
과거 앤시아는 백작가의 초대를 받고 이곳으로 오던 중 사고로 인해 양부모를 잃었다. 백작 부부는 무척이나 괴로워했고 부모를 잃게 한 것에 대한 보상 중 하나로 앤시아를 양녀로 들이려 했다.
그래서는 원작처럼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황제가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쓸모없는 신부로 보내지게 되는 운명을 조금이라도 비틀어야 했다. 자작이라는 낮은 귀족 신분을 유지하는 편이 예정된 불행한 미래를 피하기에 유용했다.
다행히 양녀 제안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백작 부부 앞에서 나단과 묘한 기류를 풍기는 것만으로도 양녀가 아니더라도 가족이 될 길이 있음을 인식시켰다. 앤시아의 의도대로 백작 부부는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양녀는 보류, 후 견인이지만 한 가족처럼 친밀하게 대해 주었다.
‘그건 정말 잘한 거야.’
원작을 비틀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앤시아의 몇몇 노력으로 인해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처럼 백작부인에게 사랑받지 못했을 터.
그랬다면 지난 오 년간 병든 몸으로 환한 웃음을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마님.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품에 안은 앤시아를 놓지 않을 것처럼 꽉 끌어안고 있던 힐다는 어느새 다가온 하녀의 작은 속삭임에 냉큼 손을 풀어 주었다.
“아가, 그이가 나를 찾는구나.
왜 오지 않고 부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금방 오마. 너희 먼저 식당으로 가 있거라.”
“네, 어머니. 빨리 오셔야 해요?”
“그럼. 우리 아가가 배를 곯으면 안 되지.”
앤시아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가라 불리는 건 무리였으나 몸이 아픈 탓에 더디게 자란 작은 체구와 사랑스러운 외모 탓에 어색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게 아쉬운 듯 손까지 한번 꼭 잡은 후 배시시 웃는 앤시아의 사랑스러운 웃음에 힐다는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팔랑거리듯 가벼운 몸짓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조차 사랑스러운 앤시아를 바라보며 힐다는 한숨처럼 걱정을 흘렸다.
“저리 예뻐서 어디 바깥에 나가게 둘 수가 있나.”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앤시아는 몸이 약해 여간해선 백작가를 나서지 않았다.
거기에 어릴 적 마차 사고로 부모를 잃은 영향 탓인지 마차에 타는 걸 꺼렸다. 외형은 물론 성격까지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깊은 상처가 남아 있음을 상기할 때마다 힐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앤시아의 가족을 백작가로 초대 하지만 않았어도 부모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매해 기일이 다가올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앤시아. 그런 앤시아를 볼 때마다 그녀가 안타깝고 사랑스러워 힐다의 가슴은 항상 아려 왔다.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백작 부부 중 누구도 식당에 내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이 생기신 듯하니 하녀를 보내야겠구나.”
나단이 한쪽에 서 있던 하녀를 부르는 사이 앤시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시기에 백작 부부가 아들인 나단과 아끼는 앤시아를 방치한다?
고작 식사 한 번이라고 해도 사용인조차 보내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래도 슬슬 시기가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제가 모시고 올게요.”
혹시라도 엿들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천진한 미소를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같이 가자꾸나.”
당연하다는 듯 나단이 팔을 들어 보이자 앤시아는 주저 없이 냉큼 팔짱을 꼈다.
나단이 있다고 한들 엿듣지 못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들키더라도 나단까지 있으니 면죄부가 되는 셈. 다정한 남매이자 연인 같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용인들 사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건 덤이었다.
곧장 백작의 서재로 향한 앤시아는 살짝 열린 문을 보며 절호의 기회임을 확신했다. 팔짱을 풀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는 앤시아를 나단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조용히 따라갔다.
앤시아는 살짝 열린 서재 앞에 바싹 귀를 대고 엿듣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지켜보던 나단의 눈에는 그 모습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아이 같아 마냥 귀엽게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의 대화를 엿듣는 걸 말려야 하나 나단이 망설이는 사이 앤시아가 손짓했다.
얼결에 앤시아가 부르는 대로 다가서자 살짝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백작 부부의 대화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이런 무례가 어디 있는가. 어릴 적부터 한가족처럼 지내 온 약혼자가 있건만!”
“여보. 몇 번이나 말하지만, 약혼은 안 했어요.”
“그거야 앤시아가 아직 너무 어려서 식만 치르지 않았다 뿐이지.”
“우리 앤이 어려 보이는 건 맞지만 몇 달 뒤 성년식 치르는 건 아시죠?”
“흐흠, 알다마다. 성년식을 치른 후 앤시아가 원하면 언제든 진행할 수 있도록 결혼식 장소까지 모두 정해 두지 않았는가.”
안주인인 힐다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주장하는 백작의 손에 빳빳하고 비싸 보이는 종이가 들려있었다.
‘결혼식 장소까지 다 정해 두셨다고?’
엿듣고 있던 앤시아는 진심으로 놀랐다.
양녀가 아닌데도 공작가에서 청혼서가 날아든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건 원작 비틀기에 실패한 것 뿐이니까.
그보다 약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천진한 웃음으로 답을 회피하던 앤시아에게 의견을 묻는 대신 언제든 추진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었음이 놀라웠다.
나단을 돌아보자 결혼식 장소라 든가 앤시아의 성년식만 들렸는지 얼굴을 붉히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궁금했는지 슬쩍 문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며 귀를 기울였다.
점잖아 보여도 은근 앤시아의 투정이나 장난은 다 받아 주던 나단다웠다.
“그러니까! 길을 막고 물어보면 모두 인정할 만큼 우리 애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는데! 실질적 부부로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꼿꼿이 허리를 편 채 흔들림 없이 선 힐다를 향해 백작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전형적인 문관 느낌의 깔끔하고 온화한 외형의 백작은 전에 없이 흥분한 상태였다. 그 덕에 오히려 힐다는 침착할 수 있었다.
“그렇지요. 우리 앤은 이미 제겐 딸이자 며느리와 다름 없어요.
내 아가를 데려가다니. 목을 내놓아야 할 거예요.”
“그렇지! 감히 누구 딸을 건드리려고!”
딸이 아니었다. 양녀조차 아니었으나 이미 흥분한 백작의 입에선 본심이 터져 나왔다.
백작 부부의 진심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앤시아는 격하게 뛰는 심장을 누르려는 듯 지그시 손을 얹었다.
흥분한 백작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바닥에 내던졌다. 고작 종이 한 장이었기에 힘껏 내던졌음에도 가볍게 팔랑이며 열린 문쪽으로 흘러왔다.
앤시아가 종이를 집어 들고 그것을 함께 확인한 나단은 순간 숨을 들이켤 정도로 놀란 반응을 보였다.
“내 당장 궁으로 가 봐야겠소.”
“공작가로 가시는 게 아니고요?”
“황제의 명이니 황제께 물어야지. 우리 가문과 약혼한 것과 진배없는 딸 같은 아이를 그런 야만인에게 내던지시겠다니. 이유를 듣기 전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소.”
후견인일 뿐임에도 친자식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듯 백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렇다면 저도 돕지요. 제 검은 아직 녹슬지 않았으니.”
반역을 저지르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백작 부인. 실제로 검을 들고 황궁으로 향하지는 않겠으나 그만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힐다의 침착해 보였던 눈빛은 실은 터질 것 같은 불길을 감추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기껏 양녀가 되는 길을 피했는데 결과는 오히려 더 격렬했다.
앤시아에게 있어 공작가의 청혼서란 예정된 미래가 확정된 것뿐이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을 흔들기 위해 부모처럼 여겼고 그리 불렀던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이 보여 줄 애정은 이혼 후 되돌아왔을 때 최소한 내치지만 않으면 되는 정도로 충분했다.
“어머니, 아버지.”
잠시의 침묵 후 언제 흥분했냐는 듯 상냥한 힐다의 미소가 앤시아를 맞이했다.
“아가, 식사를 먼저 하고 있…. 앤!”
혹시나 들었을까 싶어 말을 돌리려던 힐다는 이미 울먹이고 있는 앤시아를 보고 당황했다.
다행히 백작 부부의 호의와 애정을 직접 느낀 앤시아는 눈물을 만들어 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슴 위에 조심스럽게 올린 손끝을 의도적으로 떨리게 하고 억지로 웃어 보이려는 듯 간신히 호선을 그린 입술 끝을 바르르 떨었다.
결정적으로 두 눈 가득 고였던 눈물을 떨구기 위해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순식간에 넘쳐 뽀얀 두 뺨을 흠뻑 적시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