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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3화 (3/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3화.

“어머니…”

“앤, 아가.”

가까이서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게 된 힐다는 숨쉬기 힘들 만큼 괴로워졌다.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단다. 어미가 자식을 지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니.”

이미 백작 부인에게 앤시아는 가족이었다. 하나뿐인 아들과 결혼한다면 영영 함께할 수 있는 완벽한 가족이 될 사랑스러운 아이가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었다.

“너희를 지키는 데 내 모든 것을 내걸 것이니 이리 울지 않아도 된단다.”

마음이 미어지고 찢어지는 것 같아 힐다는 당장에라도 검을 찾아올 기세였다.

항상 백작 부부 앞에서 밝기만 하던 앤시아는 힐다의 다짐에 울먹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가에서 청혼서가 왔다고 들었어요.”

“누, 누가 그런 이야기를 너에게 했니?”

책에서 읽고 엿들어서 알게 된 거지만 마치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읽어 알게 됐다는 듯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이, 이건…….”

“황제께서 명하셨다면 거부할수 없잖아요.”

“아니다. 부당한 일은 그대로 따를 수 없지. 걱정하지 마렴, 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켜 줄 테니.”

“그럼 오라버니의 꿈은요?”

앤시아의 질문에 모두가 침묵했다. 오로지 앤시아의 안위와 미래만 생각하던 백작 부부에게 나 단의 이야기를 꺼내자 미처 생각지 못했단 듯 당황스러워했다.

뚝뚝 떨어지던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아 내는 앤시아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모두 지켜볼 뿐이었다.

배시시 웃음을 보인 앤시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라버니는 이제 막 재무부에 들어갔잖아요.”

백작 부부가 당황한 사이 나단이 앤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앤, 나는 괜찮다. 그런 건 신경쓸 필요 없어.”

“일이 재밌다고 그랬어요. 막내라서 허드렛일만 하다가 이번에 중요한 일도 맡았다고……. 어렵지만 보람된다고 그러셨잖아요.”

“앤. 너보다 우선시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 알잖니.”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앤시아를 우선시하는 나단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정한 웃음을 보이며 눈물로 흠뻑 젖은 앤시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 주었다.

한없이 퍼부어지는 나단의 애정은 앤시아의 의도대로 였음에도 매번 그 크기가 지나치게 컸다.

적당한 가족애로도 앤시아의 계획에 충분하건만, 항상 넘칠 만큼 큰 애정을 드러냈다.

“앤시아.”

“오라버니.”

“널 보내느니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라도 지켜 내겠다.”

백작 부인과 똑같은 말이 나단에게서도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망설임조차 없는 확고한 나단의 태도에 백작 부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앤시아의 예상보다 그들의 애정은 무척이나 컸다. 이대로 머물고 싶을 만큼.

망가진 앤시아의 몸을 알면서도 신부로 맞을 생각뿐인 나단과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웃어 주는 백작 부부의 관대함에 목 안이 간질거렸다. 이대로 이들의 보호를 받고 싶어질 만큼 그들의 애정에 흔들렸다. 그러나 앤시아가 이곳에 머물려고 한다면 황제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며 백작가를 산산조각 낼 것이다.

이미 원작대로 진행되는 상황에 앤시아는 계획대로 해야 했다.

그들이 앤시아를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웃어야 했다.

“물론 오라버니를 사랑해요. 하지만 그건…… 가족으로서의 사랑이에요.”

가족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애틋하고 친밀하지 않았나. 그간의 행보를 떠올리는 듯한 백작 부부의 의아한 시선에 앤시아는 쐐기를 박아야 했다.

그들이 오해하는 건 당연했다.

한때는 나단과의 약혼이 원작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정략결혼이 흔한 세계관인 데다 나단은 좋은 신랑감이었다. 앤시아에 빙의한 자신은 분명 백작가의 미래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테니 정략결혼 상대로 나쁘지 않을 줄 알았다.

허약한 몸 역시 백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좋아질 줄 알았다. 그래서 나단을 향해 애정 어린 시선을 꾸며 내고 의지함을 어필했다. 그러나 앤시아의 몸은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어린 시절 양부모는 앤시아의 아름다운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 피부를 하얗게 해 준다는 약을 꾸준히 먹였다. 가난한 평민이 구하기엔 무리한 약이었고 결국 싸구려 독초가 섞인 엉터리 약이었다.

죽지 않은 게 용했다. 그나마 약을 아끼겠답시고 쪼개고 쪼개먹인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덕분에 앤시아의 어린 시절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항상 어딘가가 아팠고 기운이 없었다.

소설로 읽은 내용일 뿐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그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느리게 자라는 소녀 같은 체구와 아이를 품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몸.

앤시아는 백작가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백작가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앤시아에게 바라는 건 직위도 권력도 재물도 아니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앤시아가 나단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 평범한 가족을 만들 수 없었기에 앤시아는 원작을 피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을 포기했다.

플랜 A였던 공작가의 청혼서가 오기 전 결혼한다는 계획은 그런 이유로 오래전 폐기되었다.

남은 건 플랜 B. 공작과 결혼후 원작대로 ‘악녀로서 이혼당한다’를 실행하기로 했다. 단, 돌아 오더라도 내쳐지지 않게 인맥 관리는 필수였다.

그걸 위해 백작가 사람들의 집착은 곤란하지만 적절한 애정은 유지해야 했다.

유일하게 남은 계획을 위해 앤시아는 울먹이면서도 단호하게 행동했다.

“오라버니의 신부가 되고 싶었다면 약혼하겠다고 졸랐을 거예요.”

지금도 나단에게 바싹 붙어 팔짱을 낀 앤시아와 그런 앤시아의 어깨를 당연하다는 듯 감싸 안은 나단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백작부부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나단과 친밀해 보이는데도 앤시아의 거절은 모순되었다. 힐다는 조심스럽게 앤시아의 손을 붙잡고 한쪽으로 이끌었다. 백작과 나단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진 힐다는 앤시아의 손을 꼭 잡은 채 다정히 속삭였다.

“아가. 혹시 네 몸 상태 때문에 약혼을 미뤄 왔던 거니?”

순간 앤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원작을 피하려고 세웠던 첫 번째 계획을 포기해야 했던 이유를 백작 부인이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에 앤시아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질문에 앤시아가 입술만 깨물자 힐다는 안심하라는 듯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보였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하지만…….”

백작가의 주치의가 누구보다도 세심히 살펴 온 앤시아의 몸이었기에 힐다 역시 그녀의 몸이 여성으로서 완벽하지 않음을 잘 알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해도 10년 정도는 걱정 없단다. 더 좋은 의원과 약을 구할 거란다.”

“어머니.”

백작 부인의 친엄마 같은 다정함에 앤시아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만큼 흔들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오히려 앤시아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10년 뒤에도 후사가 생기지 않으면. 앤, 아가. 괜찮아.”

“정……말요?”

“물론이지. 그때는 후처를 들여 아이를 보면 된단다.”

잠시나마 기쁜 기색을 보였던 앤시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음에도 힐다는 괜찮다는 듯 손을 꼭 잡아 왔다.

“걱정할 것 없단다. 결코, 우리 앤이 싫다고 하는 여인을 들이지 않을 테니.”

앤시아를 배려하는 힐다의 말은 오히려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

이곳은 앤시아가 책 속에 들어오기 전 이십여 년을 살아온 현대가 아니었다. 그들이 아무리 다정하고 선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귀족이고 영지를 가진 백작가문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앤시아는 아이가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 따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서로를 위하고 애정을 주어도 함께한다면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게 뻔했다.

“앤, 아가. 고개를 들어 보렴.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단다. 괜찮으니 웃어 다오.”

이들의 애정은 앤시아에게 무척 달기만 하다가도 이렇듯 소설 속세계관을 드러낼 때면 씁쓸했다.

‘이제 와 새삼 속이 쓰릴 건 또 뭐람.’

어차피 처음부터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한없이 사랑스러운 앤시아를 연기했던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한 앤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머니, 저는.”

“앤.”

“아, 오라버니.”

힐다의 작은 속삭임을 듣지 못했을 나단은 그저 앤시아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신경 쓰이는 듯 다가왔다.

아마도 나단 역시 힐다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설령 다른 생각을 가졌다 한들 레슬리 백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애초에 앤시아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형편없는 몸뚱어리로 위험 요소를 최소화시키는 것만이 중요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지운 앤시아는 준비해 둔 수많은 말 중 하나를 꺼냈다.

“전 저 때문에 누구도 힘든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해요.”

“힘든 길이라니. 앤시아, 널 보내는 게 가장 힘든 길이란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제야 앤시아를 설득하고 다독이던 이들의 얼굴에 다른 감정이 피어올랐다.

“어머니. 황제를 찾아가신다거나 검을 다시 드신다는 무서운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아아……. 앤, 아가.”

“제게 중요한 건 두 분과 오라 버니가 다치지 않는 거예요.”

그제야 앤시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힐다는 눈시울을 붉혔다.

혹여나 백작이 황궁으로 달려가 큰일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힐다가 십여 년 만에 검을 드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나단의 미래에 오점이 될까 두려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고 아프더라도 홀로 아프겠다며 떨어지려 했다.

“제게 온 청혼서니까 제가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황제의 명을 따르겠다는 앤시아의 뜻에 백작 부부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나단은 앤시아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더니 그녀와 마주섰다.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함만이 가득한 나단의 두 눈이 앤시아의 눈물 자국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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