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4화.
“앤.”
“백작가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저 때문에 누구도 피해 보기를 원하지 않아요. 혹여나 이 일로 가족 같은 분들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눈물이 넘쳐흘렀다.
“전, 저는 견디지 못할 거예요.
흑, 그 누구도 저 때문에…윽…….”
백작 부부는 나단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한 앤시아가 펑펑 울며 털어놓은 속마음에 참담한 심정이었다.
부모를 잃은 것만으로도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앤시아였다. 가족으로 여기는 이들의 안위에 민감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몸이 약하고 심성이 고운 앤시아라면 정말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혼절하거나 크게 앓아누울 수도 있었다.
지금도 힘겨운 듯 앤시아는 비틀거렸다.
“앤시아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데려가 쉬게 하겠습니다.”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앤시아를 안아 든 나단이 급히 자리를 떠났다.
뒤에 남은 백작 부부는 앤시아의 눈물과 그녀가 한 말을 떠올리며 한참 말이 없었다. 저 여린 아이를 타지로 보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점점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식자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황제를 만난다 한들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백작 부부의 심란한 밤이 깊어졌다.
그사이 나단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온 앤시아는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혀 주는 온화한 손길에 앤시아는 눈물을 닦으며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오라버니, 전 오늘 저녁은 거를까 해요.”
“조금이라도 먹어야 기운이 나지. 수프라도 올려 보내마.”
“전 괜찮아요. 시장하실 텐데 어서 가 보세요. 꼭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하셔야 해요.”
“앤시아.”
웃는 얼굴로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려는 앤시아의 노력이 빤히 보였다. 작고 여린 동생 같은 아이가 애쓰는 모습에 나단은 착잡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앤. 지금이라도 약혼을 하자구나. 아니, 바로 결혼을 하면 어떠니?”
나단은 언제나 앤시아에게 진심이었다.
백작 부부의 부모로서의 애정이 앤시아에게 안정감을 주었다면, 나단의 애정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백작가에서 받아 온 커다란 애정은 앞으로 앤시아가 홀로 서는데 큰 용기이자 양분이 될 것이다.
“오라버니. 전 백작가에 온 후후로 항상 행복했어요. 다들 친절하고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어요.”
“그래. 착하고 선한 너의 웃음을 볼 때마다 지켜 주고 싶었단다.”
“항상 제게 잘해 주셨어요. 그런 오라버니를 좋아해요.”
“앤.”
“어머니도 아버지도 좋아해요.
매일 깨워 주는 메리도 좋아하고 정원을 예쁘게 꾸며 주는 폴 아저씨도 좋고, 모두 다 좋아해요.”
앤시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늠하려는 듯 나단은 고민스러워했다.
“모두 사랑하는데 이상하게 이곳은 제자리가 아닌 것 같았어요.”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다.
앤시아의 말은 나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충격보다 앤시아의 서글픈 생각에 심장이 조이듯 아픔을 느꼈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이.
지난 몇 년간 나단의 세계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존재.
나단은 자신보다 앤시아만을 생각하며 답을 내었다.
“앤, 네가 원한다면 내 동생이 되어도 좋아. 그게 널 불안하게 했다면.”
연인이 아닌 남매의 형태로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앤시아를 멀리 보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단의 진심에 앤시아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작가의 양녀가 된다면 오히려 황제 측에선 격이 맞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 환영할 것이다. 인제와서 의미가 없기도 했고 차라리 공작가에 들어가 추문에 시달릴 여지를 주기엔 이 상태가 나았다.
“어쩌면 제가 뿌리 내릴 곳이 공작가일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그곳이 얼마나 춥고 무서운 곳인지 아느냐. 이곳은 이제 막 봄이 오는데 그곳은 어둡고 살얼음이 어는 추위에 시달린다. 네가 좋아하는 포도도 나지 않아.”
“그럼 오라버니가 가져다주세요.”
앤시아는 환하게 웃었다.
“저를 보러 와 주세요. 선물 많이 가지고 오셔야 해요.”
활짝 웃는 눈꼬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눈물이 나단의 속을 쓰리게 했다.
이미 앤시아는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 보였다. 백작가에 조금의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앤시아의 마음을 알기에 그녀를 계속 설득할 수 없었다. 그저 앤시아가 바라는 대로 나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고맙다니. 차라리 원망해 다오.
내가 부족한 탓에 널 붙잡지 못하는구나.”
“아니에요. 오히려 넘치도록 사랑받았는걸요.”
애써 태연한 웃음을 보이던 앤시아는 나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혹시… 제가 다시 돌아온다면 잠시만 머물게 해 주세요.”
“대환영이다. 양팔 벌려 환영할테니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있걸랑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돌아오거라.”
원하는 답을 들었기에 앤시아는 안심한 듯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감정적으로 조금 시달리고 눈물 좀 쏟은 것만으로도 이렇듯 금세 피로해졌다.
피곤해하는 앤시아를 알아본 나 단은 그녀를 눕히고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앤시아가 잠이 든 후에도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둑해진 후에도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어깨가 나단의 심정을 대신했다.
***
백작 부부가 번갈아 가며 황제와 귀족들을 만나러 다녔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다 앤시아의 만류와 걱정스러운 눈물에 간신히 선을 지켰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는 듯 끝까지 버티고 버티던 백작에게 최후통첩으로 황제의 명이 내려졌다.
‘북부는 곧 겨울이 오니 그 전에 도착하여 새신부가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하냐’는 부드러운 권유와 같은 글이 적혀 있었으나 쉽게 말해 결혼은 기정사실이니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장 보내라는 뜻이었다.
준비 기간은 고작 한 달.
공작가와의 혼사치고는 무척이나 짧은 준비 기간이었다.
북부에 눈이 내리기 전 도착하려면 지금 당장 출발해도 허약한 앤시아의 체력 탓에 아슬아슬했다.
결혼식은 나중에 하더라도 신부는 먼저 보내라는 상황에 백작부부는 간신히 참아 왔던 분노를 터트렸다.
“드레스 외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다니! 이게 무슨 도둑 시집을 가는 것도 아니고.”
“전 괜찮아요, 어머니.”
“딸의 결혼을 이렇게 대충 흘려 보낼 수 없지. 보석을 맞추는 데만도 한 달 이상 걸리는데….….
일단 임시로 기성품이라도 채워서 보내야지 이대로는 못 보낸다.”
울분을 토해 내는 백작 부인 힐다의 붉어진 눈을 보며 앤시아는 웃는 얼굴로 포옹했다.
“천천히 보내 주시면 되죠. 기성품이라도 어머니께서 손수 골라 주신 예쁜 드레스랑 귀여운 보석이 박힌 화장품도 좋아요.
뭐든 어머니께서 고르신 거라면 다 예쁠 거예요.”
떠나는 순간까지 예쁜 말만 하는 앤시아를 보며 힐다는 도저히 이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황제에게 알현을 신청하고 황후를 만나 간청드리고 주변의 도움을 구했으나 백작의 성을 달지 않은 앤시아를 위해 도움을 주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사이 공작가에서 보내온 새까만 마차가 백작저에 머물기 시작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이별이 믿기지 않아 힐다는 자꾸만 트집을 잡고 보내지 않을 기회만 살폈다. 혼수를 핑계로 버텨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별채에서 머물던 공작가의 기사들은 곧장 본채로 넘어와 오늘 중 떠나야 함을 알렸다.
그제야 힐다는 마차 수십 대를 채워 보내야 한다며 부랴부랴 집 사장과 하녀장을 불러들였다. 그런 힐다를 앤시아는 살며시 끌어 안으며 얼굴을 비볐다.
“서두르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하나하나 골라 주시길 바라는 제 욕심을 들어주세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은 앤시아에게 결국 힐다는 수긍했다.
“그래, 아가. 공작가에서 놀라 자빠질 만큼 잔뜩 보낼 테니 섭섭하더라도 조금만 기다려다오.”
백작 부인답지 않은 털털한 말투가 정겨워 앤시아는 웃음을 보였다.
“섭섭하다니요. 챙겨 주신 드레스랑 장신구만 해도 너무 감사한 걸요.”
“그거야 예전부터 어울리리라 생각해서 준비해 둔…… 흑!”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 힐다는 앤시아를 끌어안은 채 못보낸다며 한탄했다.
“널 어찌 보내니, 앤. 너 없이 이 어미는 어쩌라고. 양녀로 들였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려서 이렇게 널 허무하게 보내는구나.”
애초에 양녀가 되지 않으려 수를 쓴 건 앤시아였으나 그 사실을 모르기에 힐다는 깊게 후회하며 마음 아파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현실의 기억과 이곳에서의 가치관의 차이에 한 발 뺀 것은 앤시아였다. 힐다가 이렇게 괴로워할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앤시아는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거 아니니까 울지 마세요.”
“앤, 아가.”
앤시아를 안은 채 한참을 흐느끼던 백작 부인은 백작이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인 후에야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이윽고 곁에 있던 나단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앤시아.”
“오라버니.”
“나의 앤.”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슬픈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둘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몇 걸음 떨어진 사용인 중 몇몇은 이미 울음을 터트린 후였다.
“누이라도 좋았는데. 항상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또 볼 거예요. 그렇죠, 오라버니?”
“그래. 네가 싫다고 해도…
아니, 부디 너를 찾는 나를 거절하지 말아 다오.
“그럴 리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애틋하고 아련한 시선.
차마 놓지 못하는 두 손.
항상 강건해 보이던 백작 부인 이 휘청일 만큼 백작저에 처절한 슬픔이 흘러넘쳤다.
앤시아는 이런 분위기라면 이혼후 친정으로 쫓겨 오더라도 몇 주 정도는 머무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