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5화.
나단을 통해 용돈으로 사들인 미술품도 순조롭게 가격이 오르고 있으니 독립 자금도 걱정 없었다. 정작 나단은 그 그림의 가치도 모른 채 앤시아가 좋아하는 작가라는 이유로 종종 선물로 사오고는 했다. 덕분에 처음 예상보다 두둑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감정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언제나 참 고마운 존재였다.
이런 계산적인 생각이라도 떠올리지 않으면 항상 보아 왔던 이들의 슬픔에 동요해 진심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앤시아는 언제나 예뻐야 했다.
우는 모습조차 사랑스럽고 처연해야지 추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우리 아가씨, 어떡해요.”
“착하고 맘 약한 아가씨를 그 먼 곳에 홀로 보내야 한다니.”
“아이고, 앤시아 아가씨. 불쌍해서 어째요.”
안타까워하는 사용인의 목소리와 흐느끼는 백작 부인의 소리까지 뒤섞여 점점 더 울음소리가 커졌다.
오히려 침착해진 앤시아와 달리 백작 부부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마치 전쟁터로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슬픔과 우울감이 가득 차올랐을 때.
앤시아를 데려가기 위해 새까만 마차가 정원 앞까지 들어섰다.
정중하나 서늘할 만큼 무뚝뚝한 태도의 기사들이 정렬했다. 공작가의 기사가 마중 왔음에도 백작부부와 나단을 비롯해 사용인 모두가 앤시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앤시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눈물이 글썽거리던 눈을 깜박였다.
마치 참고 참았던 눈물을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흘려 냈다.
한번 깜박일 때마다 또르르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에 앤시아의 손을 붙잡고 있던 나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앤, 차라리 나와 도망치자.”
끝까지 내뱉지 않으려던 나단의 작은 속삭임은 지척의 백작 부인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하고 다급했다. 그러나 훈련된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조금쯤은 들렸으리라.
앤시아는 대답 대신 나단의 품으로 몸을 내던지듯 안겨 들었다. 작고 가느다란 몸이 나단의 품에 완전히 가려졌다.
품에 안긴 앤시아를 본능처럼 끌어안은 나단의 팔은 절대 풀지 않겠다는 듯 단단했다.
“오라버니. 꼭 절 보러 오셔야 해요.”
“……곧장 쫓아갈 테니 놀라지 말거라.”
농담이라고 여긴 듯 배시시 웃는 앤시아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음에도 아름다웠다.
앤시아가 조금 몸을 물린 것만으로도 절대 놓지 않을 것 같던 나단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마지막까지 떨어지고 싶지 않은 앤시아의 팔을 스치며 천천히 멀어졌다.
“다들 건강하세요. 또…… 봐요.”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콧등.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
당연히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이들을 두고 슬픔에 사무쳐 우는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대부분을 방에서 보내온 앤시아의 노력은 아름다움이라는 결실을 보았다. 꽃잎을 머금은 듯 진홍빛 입술이 달싹이다.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다물렸다. 울음을 삼킨 듯 숨이 가빠 와, 들썩이는 가슴에 얹었던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채 마차에 올라탔다.
그런 앤시아를 향해 손을 뻗지만 차마 잡지 못하는 나단의 모습은 비극적인 연극의 한 장면 보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아가씨!”
“앤시아 아가씨!”
“아가!”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을 뒤로하고 마부는 빠르게 마차 위에 올랐다. 기사들 역시 그들의 처절한 울음에 자신들이 지독한 악인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앤시아가 올라탄 검은 마차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견디지 못한 힐다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떠나야 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물러서 주십시오.”
후견인인 백작 부인의 접근조차 막아설 만큼 공작가의 기사는 단호했다. 그런 기사를 향해 힐다는 지켜야 할 체통 따위 없다는 듯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우리 딸은 마차를 무서워하네.
영지를 빠져나갈 때까지만이라도 동행을 하고 싶네.”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그윈티드 가문의 전통을 무시하실 수는 없습니다.”
청혼서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공작 부인이 된 것과 같다. 그렇기에 공작가의 문양이 금빛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검은 마차에 오를 수 있는 건 예비 신부인 앤시아뿐이었다.
‘공작의 기사들은 충성심이 대단해서 소용없을 텐데.’
자유분방한 백작가와 달리 공작가에는 다양한 규칙과 전통이 존재했다.
그걸 원작을 통해 알고 있던 앤시아는 힐다가 챙겨 줄 물건들이 버려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 둔것이다.
무엇을 가져가는 공작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검사를 핑계로 전부 망가질 것이다.
“누가 마차에 오르겠다고 했는가! 말을 몰고 곁을 지키겠네.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안 됩니다.”
기사의 손에 문이 닫히자 백작부인은 체통도 잊고 팔을 뻗었다.
“자, 잠깐!”
“어머니. 지금은 보내 주어야 합니다.”
“앤! 아가!”
붉어진 눈으로 힐다를 끌어안는 백작과 나단이 아니었다면 기사들이 어쩔 수 없이 검을 빼 들었을 상황이었다.
“출발하지.”
“예. 전원 주변을 경계하라!”
소란에도 기사는 주저 없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간절한 외침에도 기사단은 빈틈없이 마차를 지키며 여지를 주지 않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마지막 모습까지 눈에 담기 위해 버티던 사용 인들이 오열하며 무너졌다.
레슬리 백작가 영지를 벗어나자 평탄한 도로가 끝이 났다.
왕래가 잦은 길임에도 영지 내부에 비해 다소 거칠었다. 최고 급 자재를 사용한 마차라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제법 소음을 내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마부는 안에서 들려오던 서글픈 흐느낌이 소음에 가려진 것에 감사하며 착잡해진 속을 달래려 물을 들이켰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앤시아는 곧바로 울음을 그쳤다. 이 정도 울음소리를 들려주었으면 어느 정도 동정표를 샀으리라.
자신의 형편없는 체력을 생각하면 눈물도 이제 사치였다.
원작에서 몇 번이나 혼절하고 열이 펄펄 끓어 대는 앤시아를 약을 먹여 가면서도 끝끝내 공작가로 데려간 이들이다. 아파 봤자 앤시아만 손해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천천히 복기할 생각이었던 앤시아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백작 부인과 나단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떠올렸다.
-앤, 나와 도망치자.
-우리 딸은 마차를 무서워하네.
-아가! 앤!
그들은 떠나는 순간까지 앤시아를 향한 애정을 쏟아 냈다. 그 커다란 감정은 몇 년간 준비해둔 계획을 수정하고 싶을 만큼 앤시아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게 맞아. 어차피 반년 후면 이혼당할 거고 그럼 백작가로 돌아올 테니 그리 긴 시간도 아니야. 그때 제대로 시간을 들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독립하면 돼.’
원작대로 따라갈 계획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단은 후사를 이을 수 있는 여자를 만나는 게 맞아. 난 조카를 예뻐해 주는 여동생 자리면 족해.’
최선의 미래를 위해 앤시아는 공작에게 이혼당하기 위한 악녀로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할 수 있어. 그걸 위해 몇 번이나 계획을 세웠잖아.”
홀로 있음에도 앤시아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한참을 울어 붉어진 눈 주변과 대비되어 서글픔을 자아냈다.
***
흑의 기사단은 공작가 소속으로 대부분 기사가 그렇듯 소속감과 자부심이 상당했다.
냉혈 공작과 함께 흑혈의 기사라 불리며 북부를 지켜 냈다.
워낙 뛰어난 기량 탓에 인접한 영지에서까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올 정도였다. 거기에 황제의 명까지 더해져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작가를 비울 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왔다.
그러나 최근 주인인 공작이 받아 온 명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레슬리 백작가의 후원을 받는 앤시아 랜피스를 아내로 맞이하라니. 백작도 아닌 듣도 보도 못한 성을 가진 자작 영애였다.
이건 너무도 격이 맞지 않는 잘못된 혼사였다.
정작 공작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따르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당사자인 공작이 저리 태연하니 기사들은 차마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앤시아 랜피스를 호위하는 일은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다.
기사단장은 북부를 지켜야 했기에 부단장인 아서 모겐스가 전력에 그나마 중요치 않은 신입들 위주로 골라 레슬리 영지로 향했다. 가득 쌓인 불만을 터트리지도 못한 채 도착한 아서 모겐스는 레슬리 백작가에서 천사를 목격했다.
명성에 비해 조촐한 작은 정원에 빛을 가득 채운 듯 눈부신 천사가 웃고 있었다. 곁에 서 있는 준수한 청년을 향해 오라버니라 부르며 행복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되어 해맑게 웃었다.
공작가 기사들을 발견하고 곧바로 청년의 뒤로 숨긴 했으나 시력과 기감이 뛰어나 빠짐없이 목격한 후였다.
저 여인이 우리가 모실 안주인이구나. 최소한 외형만큼은 주인께 뒤지지 않고 빛나겠구나 싶을 만큼 아름다운 존재.
며칠간 별채에 머무르는 동안 앤시아 랜피스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아직 혈기 왕성한 신입 기사들의 호기심을 주먹으로 두드려 가며 막아 내야 할 만큼 그녀의 존재는 특별했다.
드디어 공작가로 모시는 날. 다들 이날을 위해 먼지 한 톨 없이 준비한 정복과 약식화된 갑옷을 챙겨 공작가의 안주인을 맞이하러 향했다.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백작가 정원에서 기사단은 난 공불락의 적을 만난 듯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