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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6화 (6/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6화.

기사들의 걱정과 달리 앤시아는 무척이나 잘 버텨 주었다.

중간중간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항상 웃는 얼굴로 기사들의 노고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그간 보아 왔던 뻣뻣하기 그지 없던 영애들과 달리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기사의 거친 마음마저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런 기사들의 관심과 배려로 앤시아는 큰 탈 없이 그윈티드영지에 도착했다.

“랜피스 자작 영애. 잠시 후 공작저에 도착합니다.”

기사부단장의 대우는 정중하나 호칭은 그렇지 않았다.

청혼서를 승낙한 순간부터 그윈티드의 사람이 된다더니 태도는 그렇지 못했다.

신입 기사 중에는 주인마님이라거나 공작 부인이라 부르는 때도 있었으나 기사부단장만큼은 제법 호의를 보이면서도 딱딱한 태도를 고수해 왔다. 다행히 오는 동안 저 단단한 기사들을 나름 말랑하게 만들어 놨으니 소소한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모겐스 경,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커튼을 올리고 사르르 웃음을 보이자 기사부단장 아서 모겐스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애써 당황한 마음을 가다듬고 앤시아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앞에서 잠시 검문…… 영애를 살피게 되는데 통상적인 절차이니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네, 그렇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한 달 내내 천진한 웃음과 가족에게서 떠나온 슬픔을 적절히 비친 덕에 얻은 호의는 나름 유용했다.

원작이었다면 이런 작은 조언조차 얻지 못하고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어리바리했을 터. 아서의 말대로 잘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마차가 멈추고 바깥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내리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열린 문틈으로 커다란 철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그 앞에 서 있는 수많은 기사와 사용인들이 앤시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니 원작에서는 마차에 틀어 박혀 못 나가고 버텼지.

예상하였음에도 수많은 이들의 마중과 웅장한 철문을 보고 있자니 마차에서 한 발 내미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머뭇거릴 생각은 없었다. 앤시아는 이 순간 첫인상이 결정됨을 알았다.

처음부터 악녀 노릇 하겠다고 까탈 부리면 기껏 공들여 놓은 기사들의 호의도 날아갈 수 있었다.

일단 시작은 사랑받으며 자라 천진하고 순진한 앤시아답게.

처음 보는 낯선 저택에 순수하게 놀란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마중 나와 준 사람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 웃음은 몸이 아파 침대에서만 지내던 때부터 거울을 보며 연습해 온 노력의 결과였다.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 뻣뻣하게 서 있던 이들 중 몇몇 얼굴이 풀어지는 걸 확인하자 더욱 웃음이 짙어졌다.

‘맨날 보는 나도 놀랄 만큼 예쁜 웃음이니 언제 어디서든 먹히지.’

그러나 먹히지 않는 상대 역시 적은 수이나 분명 존재했다.

“앤시아 랜피스 자작 영애. 그 윈티드 공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바로 이 사람. 시녀장 로사 마일.

선대 공작 부부가 요양차 그윈티드 영지를 떠난 후 더욱 바빠진 공작을 대신해 공작가를 지켜온 여인이었다.

집사장보다 한 수 위로 마치 안주인이라도 되는 양 공작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 공작가에 고작 자작 따위의 공작 부인이 들어온다니. 결코, 곱게 봐줄 리 없었다.

“우와……. 다들 저 때문에 나오신 거예요?”

앤시아의 천진한 말투와 감동한 얼굴을 보면서도 시녀장의 시선은 마냥 날카로웠다. 머리카락한 올 삐져나오지 않을 만큼 바싹 묶고 날카로운 눈을 한 시녀장은 처음부터 앤시아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다.

그걸 알면서도 앤시아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살짝 드레스를 잡고 인사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많은 분이 나오시다니, 너무 감사해요.”

“예법도 형편 없고.”

“네?”

“아니요. 공작가의 전통이니 영애가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널 환영하는 게 아니라 전통이라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도임을 알면서도 앤시아는 모른 척 기뻐했다.

“그래도 많은 분이 이렇게 추운 날씨에 마중 나와 주셨는걸요.

환영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시녀장의 뒤에 서 있는 몇몇 사용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정작 시녀장인 로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던 하녀를 향해 턱 끝으로 앞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곳에 모든 물건을 올리거라.”

“네, 시녀장님.”

명령은 곁에 있던 하녀에게 하면서도 로사의 눈은 앤시아만 바라봤다.

불손한 태도였으나 지적하기 모호한 방식. 로사의 온갖 트집과 지적은 안 그래도 백작가로부터버려진 것에 절망하던 앤시아를 방 안에 더욱 틀어박히게 했다.

‘나야 아무런 타격도 오지 않지만.’

오히려 짐의 전부인 가방 하나를 들고 오는 하녀를 향해 눈웃음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금세 테이블 위로 가방 안의 모든 물건이 올려졌다.

“……이게 다라고?”

하녀를 향해 묻는 로사에게 앤시아가 슬쩍 끼어들어 답을 했다.

“네, 급하게 오느라 식을 올릴 때 필요한 것만 챙겨 왔어요.”

너무 준비가 소홀한 것 같아 민망하다는 듯 조금 주눅 든 목소리를 내자 로사의 손이 가방 안쪽까지 훑어 냈다.

모든 것이라고 하나 결혼식 때 입을 새하얀 드레스와 장신구 세트가 전부였다.

드레스에는 빛을 받으면 알알이 반짝이는 보석들이 레이스를 따라 촘촘하게 박혀 있어 꺼내는 순간 하녀는 물론 시녀들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을 그대로 떼어 낸 듯 새파란 보석이 박힌 장신구 역시 귀한 보석은 아니었으나 그 색의 투명함이나 선명함이 값어치가 절대 낮지 않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것들을 무심히 보는 건 이런 것에 관심 없는 기사들과 앤시아의 모든 것이 불만인 시녀장 로사뿐이었다.

가져온 건 적지만 그래도 너무 예쁘지 않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웃음을 잃지 않는 앤시아. 그런 앤시아를 향해 로사는 처음으로 입술 끝을 올려 감정을 보였다.

“저희 그윈티드 공작가에 처음 들어오시는 손님은 빠짐없이 가져온 짐을 검사합니다.”

손님이라니.

필요할 때마다 손님도 되고 가족도 되는 애매한 위치였기에 지금만 잡을 수 있는 트집이었다.

앤시아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셔도 돼요.”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만.”

그리 말한 로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드레스를 집어 들어 가까이 서 있던 기사에게 넘겼다.

호위로 온 기사가 아니었기에 친밀감을 가질 틈도 없는 낯선 이였다. 그런데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눈앞의 연약해 보이는 여인에게 충격적일 것을 알기에 기사에게서 망설임이 보였다. 로사는 그런 기사에게 차갑게 지시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공작 부인 이 될 영애께서 추위에 떨고 계시는데.”

로사가 앤시아의 핑계를 대며 기사에게 할 일을 재촉했다.

찌이익.

활자로 봐서 알고 있었으나 눈을 질끈 감은 기사의 손에 절반으로 찢어지는 드레스는 충격이었다.

저게 저렇게 완벽하게 찢어진다고?

놀라고 있는 사이 소매도 드레스 밑단도 모조리 뜯겨 나갔다.

““일단 실은 정상적인 게 사용된 게 맞군요. 아, 종종 질긴 실이나 실이 아닌 단단한 끈 등으로 옷을 지어 숨겨 들어오기도 하거든요. 항상 외부의 적을 조심해야 하니까요.”

순수하게 놀랐을 뿐이나 웃음이 사라진 앤시아의 하얀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듯 보였다. 그에 로사의 입가에 살짝 걸렸던 미소가 진해졌다.

“이해하시죠? 아직 영애이시지만 곧 공작 부인이 되실 테니까.”

뒤를 이어 새파란 보석을 단 장신구 위로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두꺼운 둔기가 내리쳐졌다.

“잠깐!”

소리친 것은 앤시아를 호위해온 기사 쪽이었다.

앤시아는 큰 소리가 들린 후에야 바닥에 떨어진 드레스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기사들은 앤시아와 함께하는 동안 그녀를 통해 유일하게 챙겨 온 저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어머니처럼 여겼던 백작 부인이 할머니께 물려받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물건. 보석의 값어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앤시아와 함께 돌아온 기사들의 얼굴은 참담함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렇게 부숴야 했습니까?”

“어머, 모겐스 경. 항상 하는 검사이지 않습니까. 물론 오늘은 특별한 분이시니 빠르게 안으로 들이라는 공작님의 명을 따르는 것이지만요.”

공작의 의도는 이런 건 아니었겠지만 시녀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의 혼수품을 망가트리고도 당당한 로사의 태도에 아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공작가에 도착하기 전, 앤시아에게 검문이 있을 것이다. 알릴 때까지만 해도 함께 온 기사들은 그녀가 가져온 유일한 물건들을 시녀장이 이렇게까지 산산조각 낼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공작가 소속의 감별사에게 평소보다 조금 긴 시간을 들여 확인하게 하리라 예상했을 뿐이었다. 먼 길을 달려온 연약한 앤시아가 추위에 떠는 시간이 길어질지언정 세심하게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살펴지리라고, 누구도 웃지 않는 상황에 로사만이 미소 지었다.

“블루 토파즈 따위 공작가에 선 취급도 하지 않는 싸구려 보석이니 아까워하실 것 없습니다. 공작 부인께 내어 드릴 내탕금을 보시면 지금의 섭섭한 마음 따위사라지실 테니까요.”

시녀장의 말에 그녀 뒤 사용인의 반응은 조금 엇갈렸다.

앤시아는 시녀장 로사가 본인이 공작 부인인 양 기세등등한 것이 놀라웠다. 아무리 어려 보이고 어리바리해 보여도 앞으로 공작부인이 될 앤시아에게 이렇게까지 하다니.

공작이 이 혼사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이것만 봐도 짐작이 됐다.

로사가 교만하게 굴면 굴수록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목걸이가…….”

앤시아는 여전히 놀란 듯 멍한 얼굴로 뒤늦게 상황을 자각한 양눈물을 글썽거렸다. 의도적인 눈물이기도 했지만, 설마 보석을 저런 무식한 방법으로 산산조각 내리라곤 상상도 못 해 진심으로 당황스럽기도 했다.

기껏해야 분해돼서 고치기 힘들어지는 수준이리라 짐작했었다.

“공작 부인이 되려면 감정을 다스리실 줄도 아셔야지요.”

마치 이제야 우냐는 듯 로사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저렇게까지 고소하고 미울까.

정체 모를 악의 따위 상관 없었다.

앤시아 역시 로사가 밉고 마음에 안 드니까.

“어머니께서 할머니께서 주신 거라고 하셨는데…….”

“역시 자작가 수준이라 어쩔 수 없군요. 가난을 물려받았다 한들 이제 안목을 키우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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