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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8화 (8/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화.

너무도 당당한 웃음에 로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체 이 영애는 뭐지 싶었다.

사뿐사뿐 걷는 듯하면서도 빠르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앤시아를 로사가 얼결에 따라붙었다. 뒤로 사용인과 기사 역시 줄줄이 쫓았다.

언제 울었냐는 듯 콧노래까지스러워하면서도 핀잔을 주기 위해 꼬박꼬박 답했다.

“공작가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겁니다. 고작, 자작 영애가. 이 고귀하고 전통 깊은 공작가에 들어와 흙탕물을 뿌린 셈이지요.”

“그래서 돌려보내실 거예요?”

북부에서 좀처럼 입지 않는 얇고 하늘하늘한 천이 덧대져 살랑거리는 드레스 자락이 앤시아가 돌아서자 원을 그렸다.

마침 멈춰 선 장소는 공작저 안에서 이용하는 작은 마차 앞이었다. 마치 대답 여하에 따라 마차에 오르지 않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앤시아의 태도에 로사는 말문이 막혔다.

이쯤이면 울며불며 난리가 나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앤시아는 주눅 들어 울기는커녕 도리어 어깨의 숄을 여미며 천연덕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나, 공작 부인 안 해도 돼요?

저를 집에 돌려보내는 거예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요!

사람 모함하지 마십시오!”

혹여나 다른 이들이 일부만 듣고 오해할까 싶어 다급히 화를 내는 로사에게 앤시아는 사르르웃어 보였다.

“그럼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누가 손가락질을 하든, 욕을 먹든. 설령 공작가에 누를 끼치든.”

무해한 웃음을 보이면서도 앤시아의 눈빛만은 선명한 감정을 드러냈다.

“공작 부인은 할 수 있는 거네요. 그쵸?”

로사가 말문이 막힌 사이 앤시아는 숄을 바싹 조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 좀 추운데 이제 들어가도 돼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는 로사를 두고 앤시아는 어느새 다가온 아서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얼굴이 시뻘게져 비틀거리는 시녀장에게 하녀들이 허둥지둥 달라붙는 모습이 보였다.

‘이 정도로 속 터지면 어떡하니.

이제 시작인데..’

하도 예쁜 척 순진한 척 머릿속에 꽃만 핀 척하며 백작가에서 순딩하게 살다 보니 입 푸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차피 목표가 이혼인 데다 악녀 노릇 잘하는 게 부가 목적인 앤시아였다. 로사의 협박은 방향이 잘못됐다.

상대야 그걸 모르겠지만.

“예상은 했지만 정말 나 싫어하네. 오랜만에 긴장했어. 하아…..”

앤시아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깨닫고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동정하는 기사들도 많지만, 차츰 공작가 안에서 악행을 일삼는 앤시아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리라. 그전까지는 앤시아의 험담을 하는 하녀나 시녀에게 그럴 리 없다는 식으로 편을 들기도 하겠지.

그럼 평소 동경하던 기사님들이 못되고 어리석은 공작 부인 편을 드는 거에 더 못마땅해할 사용인들이 더욱 안 좋은 소문을 퍼트려 줄 거고, 평판은 죽죽 내려갈 거고 앤시아가 식사를 좀 남기기만 해도 고깝게 볼 것이다. 따로 노력을 기울이기는 하겠으나 잘하면 큰 노력 없이 쉽게 악녀의 길을 갈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혹 이 예상이 틀어지더라도 상관 없었다. 로사만 잘 이용해도 앤시아의 작은 실수가 몇 배는 부풀려져 퍼져 나갈 것이다.

거기에 고의적인 못된 짓을 조금만 보탠다면 희대의 어리석은 악녀 타이틀은 이미 붙은 것과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잘 부탁해, 로 로사.”

이미 멀어져 점으로 보이는 로사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긴장도 좀 풀렸으니 공작저택이나 제대로 볼까 싶어 다른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크잖아.”

끝없이 길고 우중충한 거대한 절벽 같은 벽 앞에 새까만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저택이 보였다. 백작가의 몇 배는 돼 보이는 규모였으나 이미 활자를 통해 각오해 두었던 앤시아는 애써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앞으로 반년간 신세 지며 필요에 따라 패악을 부려도 되는 곳.

원작 남주인 공작을 만나는 것도 이제 멀지 않았다.

“야 금방이야. 웃자, 웃어야 해.”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든 앤시아는 필요하면 언제든 웃을 수 있었다. 금세 우울함이 아닌 밝은 웃음을 머금은 앤시아는 양 손을 꼭 붙잡은 채 다짐했다.

“힘내자. 악녀 노릇만 제대로 하면 모든 게 완벽할 테니까.”

느릿하게 멈춰 선 마차에서 내리자 이번에도 사용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 큰 저택이 원활하게 굴러가려면 사용인이 많아야 할 터. 정문 앞에서 보았던 사용인과 기사의 인원수가 상당했음에도 저택에 머물러 있는 숫자도 제법 많았다.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상황을 살피는 앤시아를 향해 약간의 호기심은 비쳤으나 모두 흐트러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이 많은 이들이 질서 정연하게 제자리를 지키다니. 시녀장으로서 로사의 능력은 괜찮아 보였다.

앤시아가 내리지 않자 제법 연륜이 느껴지는 외모의 집사장이 다가왔다. 너무 지체했나 싶어 약간의 머뭇거림을 보여 준 앤시아는 이내 특유의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집사장 얀 스펜서입니다.”

“앗, 전 앤시아 랜피스예요. 레슬리 백작가에서 신세를 졌었고요.”

순진하기까지 한 앤시아의 자기 소개에 나이 든 집사장은 마치 손녀를 보는 듯 다정하게 웃었다.

“그러시군요. 오늘부터 그윈티드의 성을 가지시게 될 앤시아님을 환영합니다.”

“앗, 네. 환영 감사해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신 마님을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정문에서의 로사와 달리 저택앞에서 앤시아를 맞는 집사장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오늘 밤까지는 특별한 사건이 없을 예정이기에 앤시아는 걱정 없이 집사장 얀의 안내에 따라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집사장의 말대로 앤시아를 대하는 사용인의 태도는 극진했다.

앤시아의 예상대로 이렇다 할 사건도 없이 다들 자신이 할 일에 충실했다.

여러 하녀에게 정중하게 붙들려 몸이 씻겨질 때도 세신사 아주머니들이라고 생각하며 편안히 몸을 맡겼다.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중간에 졸기까지 했다.

비몽사몽 눈을 떴을 땐 온갖 드레스와 장신구가 얹어지고 치워 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리 많은 드레스와 장신구를 준비해 두었으니 로사가 그리 당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시집오는 영애가 유일하게 챙겨 온 두 가지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건 말도 안 될 일이지만, 공작에게 항의해 봤자 집사장이나 시녀장에게 일임했다고 하거나 한숨이나 쉬겠지.

어차피 공작은 자주 집을 비울 것이고 앤시아가 상대할 이들은 저택에 머무는 사용인이었다.

그중 로사는 중요 빌런이었다.

앤시아가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리만 행사하려 한다면 로사가 알아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공작가는 잘 굴러갈 것이다.

그러다 공작의 귀에 이런 소식이 전해지고 찐여주가 등장하면 신경 써서 구박 좀 해 주고.

그러면 해피 이혼!

아무리 생각해도 날로 먹는 악녀 공작 부인의 자리였다.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기는커녕 기대가 돼서 오히려 잠이 솔솔 쏟아졌다.

원작에서는 울면서 구석에 틀어 박힌 앤시아를 두고 어찌할 줄 모르던 하녀들이 적당히 고른 드레스를 억지로 입고 홀로 끌려가듯 입장했다.

‘앤시아 입장에선 놀랄 만도 했겠지. 도착한 첫날 바로 약식으로 식을 치렀으니.’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앤시아는 하녀들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몸을 맡겼다.

드레스가 정해지면 장신구에 의견이 분분했고 간신히 맞는 보석을 고르면 화장에서 또 의견이 갈렸다. 간접 결혼조차 경험해본 적 없던 앤시아는 마치 자신의 결혼식이라도 되는 양 열정적인 하녀들이 신기했다. 어차피 베일을 내려 보이지도 않을 얼굴에 뭔 공을 저리 들이나 싶으면서도 앤시아는 참견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인지도 모를 긴 시간을 꾸며지는 사이 주변이 어둑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제야 앤시아는 벽에 촘촘히 박혀 있는 마석의 존재를 알아봤다.

‘미친. 누가 마석을 저따위로 박아 놔?’

순간 저도 모르게 거친 생각을 해 버린 앤시아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공작가의 기사단과 공작이 한번 나갈 때마다 해치우는 마수의 숫자와 마석 채굴이 가능한 굴의 개수를 떠올리면 벽에 아니라 바닥에 깔아도 될 지경이었다.

매년 황제는 공작에게 고급 마석을 요구했다. 수량을 맞추기 위해 채굴량을 늘리다 보니 오히려 가치가 낮은 마석 양이 늘어났다. 그 덕에 공작가에선 상당수의 일반 마석이 이런 식으로 양초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황가와 공작가 사이에서의 거래였다.

시중에 유통되는 건 용병들이 잡은 마수에서 채취한 질 낮은 마석 정도.

‘황제도 참 욕심이 많아. 황금을 낳는 오리를 예뻐하지는 못할망정 오리가 황금을 삼킬까 봐 전전긍긍 감시하고 옭아맬 생각만 하고.’

공작에게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한미한 가문의 여인을 결혼 상대로 붙여 준 이유이기도 했다.

‘취할 건 취하면서 억압은 억압대로 하고, 정작 공작은 마수나 때려잡을 뿐 신경도 안 쓰는데.’

하여간 남자주인공으로 참 부적 합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진짜 여주인공이나 원작 앤시아 모두 공작을 좋아하게 되는 건 역시 외모 때문일까.

얼마나 잘생겼냐 한번 보자 삐죽거리던 입술 끝이 기대감으로 실룩거렸다.

“마님, 웃으실 때마다 너무 예쁘세요.”

“고마워.”

앤시아는 세속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천진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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