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9화 (9/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9화.

몇 겹이나 되는 드레스와 베일을 쓴 앤시아는 하녀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걸어갔다.

아마도 도착할 곳은 공작가의 대소사가 이루어지는 커다란 홀.

“이곳이 공작가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화이트홀입니다.”

외부의 새까만 벽과 달리 새하얀 내부가 눈부셨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는 주먹만 한 마석부터 오색으로 빛나는 마석까지 다양했다. 현대에서 보았던 웬만한 화려한 조명못지않은 사치의 극을 보는 듯 널린 게 마석이었다.

‘몇 개 주워 가도 모르겠어.’

공작은 기본적으로 공작가 내부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통은 따랐지만, 그 외에는 전부 사용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외부의 마수 토벌에 집중했다.

그렇기에 앤시아는 약식 결혼인 오늘 밤이 지나면 대략 한 달 뒤에나 공작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보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만큼 공작은 무척이나 바쁜 인물이었다.

그때마다 꼬박꼬박 방에 틀어박힌 앤시아를 보러 왔으나 그뿐.

겁먹은 앤시아는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공작에게 호감을 느꼈다.

‘아니 그거 완전 방치잖아.’

그 와중에 공작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진짜 여주인공인 비앙카와 마주친다.

햇살 같은 싱그러움은 마수 퇴치밖에 모르던 공작의 시선을 빼앗는다.

숨 막히는 공작의 위엄에도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친밀감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그렇게 남주랑 여주는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랑에 빠진다는 거지.”

“죄송합니다, 마님. 제가 귀가 어두워졌는지 잘 들리지 않아서.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앗, 아니에요.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투덜거린 거예요.”

사랑스럽지만 너무 어린애 같지 않은 말투를 연습하다 보니 혼잣말이 늘었다.

앤시아는 집사장 얀을 향해 전혀 다른 말을 전했다. 그에 얀의 옅게 주름진 얼굴이 깊은 근심으로 물들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주인님께서 오늘 중으로 돌아오실 테니 힘드시겠지만, 부디 버텨 주십시오.”

오늘 중으로, 몇 시간도 아니고 오늘 중으로, 해가 졌으니 길어야 서너 시간 내로는 오겠지만, 신부를 몇 시간이나 홀로 세워 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러움에 눈물 흘리다 주저앉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앤시아는 미련하게 버틸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약식혼이라고는 하나 전 공작 부부도 후견인도 참석하지 못한 희한한 구성이었다. 친인척하나 들이지 않고 오로지 공작과 공작 부인만이 설 수 있는 단상에 황제의 직인이 찍힌 혼인 서류와 신관이 함께했다.

사용인만이 분주하게 안을 살필뿐 앤시아는 홀로 서 있었다.

‘벌써 숨 막히는데.’

앤시아의 허약한 몸으로 마차까지 타고 와서 로사와 신경전을 벌이고 하녀들 손에 옷 갈아입히기 인형이라도 된 듯 시달렸다.

몇 겹이고 입혀진 드레스 덕에 춥지는 않았으나 답답했다. 여기서 장시간 서 있기까지 하면 진심으로 기절할 판이었다.

앤시아의 시선은 단상 앞 낮은 계단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계단에 주저앉을 생각이었다.

누가 전통 운운하면 서서 기다리란 법 있냐고 따져야지. 있다고 하면 그냥 힘 빼고 드러누워버릴 테다.

그런 생각으로 태연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집사장 얀이 안절부절못하며 들어오는 입구와 앤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로사라면 고소하다 흘겨봤을 텐데 나이도 지긋한 집사장의 마음은 무른 듯 보였다. 그래도 슬슬 다리가 아파 몇 번째 계단에 앉을까 힐긋대던 사이 입구 쪽이 부산스러워졌다.

‘어쩐지. 로사가 안 보이더라..’

온갖 참견질을 해 대며 면박 주리라 예상했던 로사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인제 보니 공작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그쪽으로 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진즉 준비를 끝내고와도 왔어야 할 텐데 로사가 수를 써서 최대한 늦춘 듯 보였다.

그래도 더 늦추지 못한 게 아쉬운지 멀쩡하게 서 있는 앤시아를 본 로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다리는 좀 아팠지만, 불만스러운 로사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앤시아가 환하게 웃자 로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앤시아는 로사가 옆으로 비켜서며 발맞춰 들어오는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수십의 기사가 착용한 갑옷은 예식용으로 제작된 건지 눈이 부실 만큼 번쩍거리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데다 거추장스러운 술장식까지 달렸다. 오죽하면 곰처럼 거칠어 보이던 기사부단장 아서 모겐스조차 그럴싸해져 못 알아볼 정도였다. 그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걸어 나온 장신의 남자는 고민할 것도 없이 남자주인공.

리샤르 그윈티드였다.

흑표범을 닮아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하다던 남자.

……이 동네 흑표범은 흑곰의 탈이라도 쓰고 다니는 거야?

베일 한 겹 사이에 두고 보이는 저 기다랗고 커다란 짐승 같은 인물이 그 잘생겼다고 난리인 그 윈티드 공작이라고?

이거 사기 결혼인데?!

앤시아의 머릿속이 바쁘게 불만을 토해 내는 사이 공작은 단숨에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

“늦어서 미안하군.”

곰 같다 했더니 동굴 곰인가 보다.

목소리가 아주 동굴에서 울리듯 그윽하고 매력적이긴 했다. 성우하면 떼돈을 벌었을 것 같다. 그러나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냄새라니.

이건 그냥 짐승이잖아.

소설이 날 속였어.

현실 부정을 하느라 굳어 있는 앤시아의 얼굴로 다가온 손은 곰앞발과는 전혀 달랐다. 검을 잡느라 굳은살이 박이고 마디가 굵었음에도 길고 단단해 보이는 손끝이 베일 끝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베일과 함께 낮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에 옅은 웃음이 섞였다.

“신부 얼굴을 보도록 하지.”

그렇게 정면에서 보게 된 남자 주인공, 공작의 얼굴은 멀리서 볼 때와 전혀 달랐다.

흑곰이라고 생각했던 건 그가 입은 짐승의 가죽이었다. 짐승가죽을 벗어 낸 공작은 핏자국이 선명한 약식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수려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흙먼지가 섞인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넘겼는데도 그 잘생김은 가려지지 않았다. 반듯한 이마는 손바닥으로 쳐 보고 싶을 만큼 흠결 하나 없었고 눈썹 한 올까지 잘생겨서 믿기지 않았다.

다만 날카로운 눈매에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들지 않은 듯 무심하기만 한 새파란 눈빛을 마주하자니 숨이 턱 막혀 왔다.

이걸 정면에서 봤으니 심약한 원작 앤시아가 기절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지금의 앤시아는 이 새파란 눈을 예전부터 숱하게 봐 왔다. 오죽하면 반가워서 숨이 턱 막혔을까.

새파란 눈의 허스키. 내 새끼 순대.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10m는 멀리 떨어질 만큼 눈빛 깡패였던 순둥이. 빤히 바라볼 때면 저런 식으로 차갑게 보여 다들 무서워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새끼 눈빛인데 무서울 리 없었다.

‘보고 싶다, 순대.’

그리움에 저절로 고여 드는 앤시아의 눈물에 베일을 든 공작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완전히 베일을 내린 공작은 단상의 신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시작하지.”

“공작님, 옷이라도 갈아입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부인 앤시아를 걱정한 듯 집 사장이 조심스럽게 참견하고 단상 앞 신관까지 동의하듯 끄덕였으나 공작은 태연했다.

“어차피 벗을 건데 뭐 하러.”

무심한 공작의 태도에 주변에 있던 사용인 역시 앤시아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앤시아를 동정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앤시아는 알았다.

방금 가까이서 들린 공작의 동굴 보이스가 살짝 풀 죽었음을.

“그럼 서약을 시작하겠습니다.”

신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황제의 직인이 찍힌 혼인 서약서가 커다란 홀 전체에 퍼져 나갔다.

높고 동그란 홀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 걸까? 궁금증이 일면서도 이왕이면 동굴 곰 목소리로 낭독하면 더 듣기 좋지 않았을까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 다행히 순대를 그리워하며 고였던 눈물은 잦아들었다.

“그윈티드 공작가는 앤시아 랜피스를 앤시아 그윈티드로 받아들이며~ 리샤르 그윈티드 역시 이에 동의하며~”

말에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된다는 전통이라도 있는지 신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 부분은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았다. 앤시아가 기절해서 이기도 했지만, 지루한 신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했다.

‘뻔한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거야.’ 베일 속에서 눈을 굴리는 앤시아와 달리 사용인과 기사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가장 불손한 건 앤시아가 아닐까.

‘다리 아파. 피 냄새 나. 바닥에 곰 가죽 신경 쓰여.’

속으로 구시렁대는 사이 갑자기 어깨를 붙잡혀 몸이 돌려졌다.

어느새 신관의 지루한 낭독은 끝났는지 넓은 홀은 조용했다.

리샤르와 마주 보게 된 앤시아는 지금까지 집중하지 않은 걸 들키지 않으려 얌전히 있었다.

천천히 다가온 리샤르의 손에 베일이 절반쯤 들렸다. 혹여나 물기 어린 젖은 눈을 마주하게 될까 걱정되는 듯 콧등까지만 올려졌다.

이 자세. 이 분위기. 앤시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만이 떠올랐다.

“설마 맹세의 키스?”

바보처럼 소리 내 말해 버렸다. .

베일이 들리다 말아 턱밖에 안보이는 리샤르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서약의 의식이지.”

결국, 같은 말이었다.

다만 앤시아가 말한 건 철없는 소녀의 꿈 같은 소리 같았고 리샤르의 진중한 음성으로 읊어진 말은 그 무게가 달랐다.

살짝 억울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걸 표현할 틈도 없이 피 냄새가 훅 코끝을 스쳤다. 저도 모르게 찡그릴 만큼 진한 피 냄새에 이어 말캉한 입술이 맞닿았다.

부드러운 찐빵 같기도 하고 물을 넣은 풍선 같기도 한데 평생 알아 온 그 무엇과도 달랐다. 이게 뭔지 앤시아가 파악하기도 전 리샤르의 입술이 천천히 멀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