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0화.
첫 키스를 도둑질당한 것에 항의할 틈도 없이 다시 베일이 내려졌다.
“황가의 인장과 신전의 증인 아래 부부가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끝났군.”
신관의 선언에 망설임 없이 등을 보인 리샤르는 곧장 홀 입구로 향했다. 정렬해 있던 기사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뒤를 쫓았다.
신관 역시 앤시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뒤를 쫓았다. 로사조차 이 순간 앤시아를 조롱하기보다는 공작을 쫓아가 버렸다.
앤시아는 피 냄새 가득한 첫 키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그런 앤시아를 공작의 배려 없는 행동에 상처받았으리라 지레 짐작한 사용인이 다가왔다. 측은한 얼굴의 사용인들은 그녀를 필사적으로 꾸며 준 하녀들과 집사장이었다.
“마님, 쉬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기대셔도 됩니다. 편히 계세요.”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요리사에게 요청해 두겠습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공작가의 사람들이라 해도 앤시아와 같은 여인이었다.
이제 막 공작가에 도착해 홀로 버티고 있던 앤시아를 냉대하는 듯한 공작의 모습은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주인이었음에도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에 반해 이제 막 공작 부인이 된 앤시아가 홀로 남겨진 상황은 동정을 사기 충분했다.
“마님. 필요하신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피곤하실 테니 바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뭐라도 하나 더 해 주려는 그들의 노력을 앤시아는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악녀 노릇도 좋지만, 앤시아의 형편없는 체력으로는 이미 한계였다. 설령 앤시아가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로사가 열심히 험담해 둘 테니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작가의 전통대로 부부가 되었으니 첫날밤 역시 예정대로 치러질 것이다. 원작에서도 일어난 일이었으므로 분명 벌어질 일이었다.
쉬어도 된다며.
어째서 드레스를 입기 전, 때 빼고 광낸 몸을 또다시 씻기는 걸까.
앤시아는 물보다 꽃잎이 많은 게 아닐까 싶은 욕조에 목 끝까지 잠겨 어지럽다고 할 때까지 담금질을 당했다. 그것도 부족하다는 듯 온몸에 향유를 바르고 여러 명이 달라붙어 문질러 대기까지 했다. 문득 고기에 양념 잘배라고 주물럭대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졌다.
감정적으론 별로인데 피로가 쌓였던 몸은 서서히 풀어졌다. 손끝까지 세심하게 보살펴진 앤시아의 몸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노곤해졌다.
슈미즈에 얇은 슬립까지 또 겹겹이 입혀졌으나 속살이 비칠 정도로 얇아 가벼웠다.
모두가 앤시아의 옷 태를 내는데 필사적이었다.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고 하녀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
차마 춥다고 말할 수 없어 얌전히 몸을 맡긴 앤시아는 시간이길어지자 으슬으슬해짐을 느꼈다. 조용하던 앤시아의 어깨가 살짝 떨리자 눈치 빠른 하녀는 가운을 가져와 입혀 주었다.
이 역시 하늘하늘하니 몸선이 드러날 정도로 부드러웠다.
분명 장인의 손을 거친 옷에 한참 공을 들인 앤시아 모두 최고로 예뻤으나 하녀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하암….….”
졸음을 참느라 작게 하품하며 배시시 웃고 있는 앤시아에게 속살이 비치는 야한 옷들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하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더니 약간 도톰하면서도 레이스로 포인트를 준 가운을 가져왔다. 끈을 리본처럼 묶어주고 옷깃도 세웠다 눕혔다 여러번 만진 후에야 만족한 듯 손을 뗐다.
“역시 이거지.”
“우리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인형 같은 앤시아의 사랑스러운 외모와 이제야 밸런스가 맞는다며 흐뭇해했다.
단지 첫날밤에 어울리는 외향은 아니었다.
“잠깐. 그런데 지금 목적에서 벗어난 거 아냐?”
“새신부 의상이라기에는 분위기가 좀…….”
다시금 첫날밤임을 상기한 후에야 하녀들은 다시 가운을 벗기려 앤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 앤시아는 베개 하나를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 후였다.
물결처럼 부드러워진 새하얀 백금발이 베개와 이불 위로 그림처럼 흩어져 있었다. 몇 번이고 매만져 가느다란데도 한 올 한 올흩어질 정도였다.
뽀얗게 물이 오른 뺨은 오랜 시간 목욕을 한 탓에 발그레하니 홍조가 올라와 사랑스러움을 더했다. 작은 콧방울에 살짝 벌어진 입술 하며 베개를 끌어안은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까지.
가게에서 파는 인형이면 월급을 털어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말 귀여우신 아가씨가 오셨어.”
“이제 마님이시지. 그나저나 이렇게 예쁜 소녀가 올 줄은 몰랐어.”
“응. 너무 사랑스러우셔.”
몸에 향유를 바르면서 확실히 보았듯 앤시아에게 섹시 노선은 맞지 않았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 공작과 마주칠 수 있었다.
첫날밤 주인 부부의 방에 눈치 없이 시간을 지체한 사용인이 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 나가야 해.”
“그래,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녀들은 가져왔던 물품과 남은 옷가지를 빈틈없이 챙겨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침실 문 여닫히는 소리가 작아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앤시아의 눈은 번쩍 뜨였다. 언제 졸려 했냐는 듯 선명한 눈동자가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진짜 잘 뻔했어.”
조금 전까지는 하녀들 손에 마사지를 받느라 진심으로 졸음이 몰려왔었다. 그러나 그들이 방을 나서는 순간 앤시아는 현실을 직시했다.
“첫날밤을 잘 넘겨야 해.”
분명 오늘 첫날밤이 온다.
몇 번이고 복기했던 원작은 따로 떠올릴 것도 없이 선명했다.
약식혼 중 기절했던 앤시아는 하녀들 손에 지금보다 적당히 꾸며져 침실에서 공작을 기다렸다.
공작이 오기 전 앤시아는 짧은 시간이나마 로사에게 꾸지람처럼 주입받은 첫날밤의 지식을 충실히 따랐다. 남편이자 공작가의 주인인 리샤르에게 조금의 불편함도 주지 않도록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얌전히 있으라는 말도 안되는 조언이었다.
성에 대해 무지했던 앤시아는 나무토막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공작을 받아들이게 된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로사의 경고를 떠올리며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첫 밤을 보낸다.
“무지무지무지하게 아팠다고 했어.”
19금 소설이 아니었기에 자세한 묘사는 없었다.
끔찍한 고통 탓에 앤시아는 새벽녘 정신을 차린 후 맞닥뜨린 알몸의 공작을 보곤 울며불며 빌었다. 앤시아가 그렇게 싫어한다는 걸 몰랐던 공작은 순순히 물러났고 다시는 손대지 않았다.
이후 방에 틀어박힌 앤시아를 한번씩 살필 때도 다가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분명 공작은 보기에는 무뚝뚝해도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말만 잘하면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잠깐이지만 실제로 만나 본 리샤르는 은근 속이 드러났다. 주변인들은 알아채지 못한 듯하나 앤시아의 눈에는 그 차이가 분명 보였다.
잘 구슬리면 말이 통할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원작과 달리 로사가 침실에 찾아오지 않았다.
이렇듯 원작의 큰 틀은 비껴가지 못해도 소소한 부분에선 앤시아의 노력에 따라 바뀌고는 했다.
“말이 안 통하면 눈물로 호소해야지.”
필요할 때 적절히 눈물 흘리는 건 앤시아의 특기였다. 일단 설득하기 위해선 얼굴을 봐야 했기에 절대 잠들지 말아야 했다.
앤시아는 이불 밖으로 나와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으……. 러그 정도는 좀 깔아주지.”
추운 지역이라 당연히 깔려 있을 줄 알았던 폭신한 러그 대신 차가운 나무 바닥에 소름이 끼쳤다. 신발을 신으려다 맨발이면 더 잠이 깰 것 같아 살살 걸어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도 없이 열린 문으로 검은 가운을 걸친 리샤르가 들어왔다. 서 있는 앤시아를 보고 잠시 멈춰 섰던 리샤르는 거침없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리샤르가 움직일 때마다 얇고 부드러운 가운이 몸 선을 따라 달라붙으며 근육 하나하나까지 선명하게 비쳤다.
이제야 공작에게 흑표범 같다는 표현이 들어맞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운이 달라붙어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들이 먹이를 노리며 다가오듯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런 걸 나한테도 입혔다는 거지?’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마지막에 입혀 준 두툼한 가운을 꼭 붙들었다.
앤시아는 짐승의 몸을 가졌어도 머리가 사람이면 말이 통하려나 등의 엉뚱한 생각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 앗!”
말을 꺼내기도 전에 리샤르의 손에 들린 앤시아는 설마 이대로 바로 시작인 건가 싶어 크게 당황했다.
“저기, 잠시만요!”
내숭을 떨 틈도 없이 침대에 올려진 앤시아는 서둘러 일어서려다 발목을 잡혔다.
이건 발정기 짐승 수준의 앞뒤없는 들이댐인가.
매너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든 행태에 본심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앤시아는 발밑을 부드럽게 감싸는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에 멈칫했다.
“내가 더운 걸 싫어해서.”
갑작스러운 고백에 북부라서 좋으시겠다며 비꼴 뻔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고민하는 사이 앤시아는 자신의 두 발이 리샤르의 손바닥 위에 얹어진 걸 보고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일 바로 러그를 준비시킬 테니 오늘 밤은 침대에만 있도록.”
명령하는 듯한 말임에도 한밤중의 침실에서 낮게 울리는 듣기 좋은 음성은 권유처럼 들렸다.
답하지 않는 앤시아의 발을 살무척이나 느린 움직임으로 다가온 커다란 손이 앤시아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거의 힘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느릿한 움직임으로 리샤르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앤시아의 손목을 스치며 부드럽게 감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