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1화.
“이 정도는 어떤가.”
“네?”
“이 정도면 빠져나갈 수 있는가?”
저기 제가 기사 시험 치러 온 것도 아닌데 자꾸 체력 테스트하실 건가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리샤르에게 붙잡힌 손이 느릿하게 끌려갔다.
힘없이 끌려간 앤시아의 손은 리샤르의 얼굴로 향했다.
‘설마 지금 그거 손등 쪽 하려는 거? 지금 무드 잡는 거야?
공작이 이럴 리가 없는데?”
머릿속 물음표 살인마를 내쫓으며 황급히 손목을 당겨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놈의 공작이 왜 자꾸 원작하고 다른 노선을 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접촉이라도 피해 보려 했다.
낑낑거리는 앤시아의 행동에 오히려 리샤르가 놀라 손을 놓아주었다.
워낙 하얀 데다 가느다란 앤시아의 손목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고작 이 정도로 그렇게 된다고?”
진심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참 동안 손을 내려다보던 리샤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군.”
왜 뭐 뭔데. 뭐가 안 되는데.
손등 키스 같은 거 닭살 돋으니 못 하겠다는 그런 의미의 안 되겠다라면 대환영이지만.
앤시아의 희망 사항과 다르게 리샤르는 진지했다.
“자칫 방심하면 부인이 부서질 것 같아.”
지금 살인 예고하신 건가요?
첫날밤이 아닌 목숨을 걱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한 리샤르는 침대 헤드의 여러 기둥 중 하나를 손으으로 쥐어 보였다. 딱히 힘을 주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리샤르의 손이 떨어지자 나무 기둥이 선명하게 손가락 모양대로 깊게 패였다.
마치 찰흙을 손으로 쥐었다 놓은 것처럼 손가락 마디 자국까지 선명했다.
혹시 이 동네 나무는 엄청 무른 나무인가.
현실 같지 않은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앤시아는 손을 내밀어 리샤르의 손자국이 난 나무 위를 살살 문질렀다.
손끝에 느껴지는 선명한 나무의 감촉은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꾹 눌러 보거나 손톱으로 살짝 찍어 보기도 했으나 나무에 생채기는커녕 지문 하나조차 남지 않았다.
‘공작이 눌러서 압축된 걸지도 몰라.’
혹시나 해서 다른 기둥을 손으로 있는 힘껏 꾹 눌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흔들림 없는 견고함만 확인하고 말았다.
‘엄청 단단한데? 이걸 그냥 주먹 쥐듯 가볍게 쥔 게 이 정도라고?’
앤시아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겁을 먹었다.
혹시 원작에서 아팠다고 한 건 이런 것도 포함된 게 아닐까?
머릿속에 경보가 미친 듯이 울렸다.
일단 거리를 벌리자.
경악스러운 마음에 슬그머니 손을 빼낸 앤시아는 조심스레 침대안쪽으로 몸을 물렸다. 침착하려 했으나 이불 위를 더듬는 손은 헛손질하고 무릎은 자꾸만 픽픽꺾였다. 허약한 몸이 온종일 무리한 데다 겁까지 먹으니 말을 듣지 않았다.
새파란 눈이 그런 앤시아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최소한 팔을 뻗었을 때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벌린 앤시아는 그제야 리샤르와 눈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언제 눈으로 좋았냐는 듯 시선이 비껴갔다.
잠시 마주친 새파란 눈에 또다시 순대가 떠올랐다. 어느새 앤시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앗, 지금이면 울 수 있겠어.’
계속 눈물을 보일 상황이 되지 않아 리샤르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첫날밤을 피하고자 공작에게 눈물을 보이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앤시아는 지금이 바로 그 기회구나 싶어 좀 더 순대를 향한 감정을 끌어 올리고자 공작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내리깔고 있던 리샤르는 집요한 앤시아의 시선에 천천히 눈을 마주했다.
새파랗고 예쁜 눈.
매섭고 무서워 보인다고 하지만 앤시아의 눈에는 마냥 예쁠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리샤르의 눈은 분명 희미하지만 흔들리고 있었다.
겁을 내고 있다? 공작이?
그런 의문을 떠올리자 평소라면 10초도 안 돼 흘러나왔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딱 눈물이 나와야 불쌍한 척을 하며 공작을 설득할 수 있었다. 초조해진 앤시아는 조금이라도 빨리 눈물을 흘리기 위해 눈을 깜박였지만, 더욱 불안해 보이는 리샤르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흔들리던 리샤르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번엔 눈을 마주쳐도 울지 않는군.”
책망하는 게 아닌 안심한 듯 느긋한 말투였다.
간신히 쥐어짜 막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온화한 분위기였다. 굳이 울어서 분위기를 해칠 필요 없이 말로 설득해도 될 것 같았다.
갈등하던 앤시아가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자 리샤르는 어딘지 모르게 안도한 듯한 한숨을 흘렸다.
“역시 울지 않는군.”
“울……어야 해요?”
약한 척 놀란 척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앤시아는 고개까지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건 부인의 선택이 아니야.”
“네?”
“분명 울리게 되겠지.”
위협으로 느껴져야 할 텐데 나른한 듯 느릿하게 흩어지는 리샤르의 음성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무뚝뚝한 공작은 대체 어디로 가고 은근한 플러팅을 걸어오는 늑대 한 마리가 여기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허스키의 선조가 늑대였다고 했던 것 같고.
당장 중요하지 않은 정보가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 사이에도 앤시아는 리샤르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역시 눈을 보고 울지 않는 건 기쁘군.”
분명 리샤르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표정도 무뚝뚝했다. 그런데도 기쁘다고 말하는 리샤르의 음성은 덤덤함에도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냥 넘기기엔 위험한 단어가 끼어 있었다.
위험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역시 울어야 하나.
울지 않아서 기뻐한다는데 눈물을 보이자니 양심에 좀 걸렸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으니 일단 말로 설득해 볼까 망설이던 앤시아는 리샤르의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하자 눈을 굴렸다.
커다란 창문은 무슨 처리를 한 건지 추운 날씨에도 선명하게 바깥을 비춰 주었다. 달이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매번 신기했다.
“달이 기울었군.”
로맨틱한 말이라도 해 보려는 걸까. 리샤르의 노력이 느껴져 앤시아는 약간 방심해 버렸다.
그래서 침대 위로 올라오는 리샤르를 뒤늦게 발견했고 갑작스럽게 드리워진 생생한 육체에 숨쉬는 걸 잊었다.
새까만 가운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어 리샤르의 몸을 가리는 건 없었다. 의도치 않게 모든 걸 두 눈에 담고 만 앤시아는 진심으로 원작 앤시아를 향해 사죄했다.
저건 사람이 가져도 되는 건지 의심스러운 종류의 것이었다. 저걸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아는데 알고 싶지 않았다.
하룻밤이나마 버텨 낸 원작의 앤시아에게 존경심이 일 지경이었다.
“부인.”
리샤르의 손이 앤시아의 로브를 여민 리본에 살짝 닿는 것과 동시에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앤시아를 보고 리샤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불 속으로 숨어든 앤시아의 행동에 리샤르는 머뭇거리면서도 해야 할 말을 꺼냈다.
“달이 기울었으니 첫 밤을 보내야지.”
로맨틱한 말도 아니었구나.
해야 할 의무를 하러 왔음이 드러나자 앤시아는 필사적으로 이불을 붙든 채 소리쳤다.
“못 하겠어요, 공작님.”
“이건 부부로서 의무요.”
이제야 무뚝뚝한 공작의 본모습이 보이는구나 싶어 앤시아는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공작님은 콧구멍에 호박을 넣을 수 있나요!”
어떤 로맨틱한 분위기도 전부 깨 버릴 것 같은 단어들이 튀어 나오자 리샤르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이 틈을 타 앤시아는 계획대로 눈물을 펑펑쏟아 내며 이불 속에서 한참을 훌쩍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리샤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심스럽게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새 가운을 다시 챙겨 입은 리샤르가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흑……. 공작님. 저 무서워요.”
무뚝뚝해 보이나 리샤르의 파란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리샤르는 솔직한 호소에 약했다.
앤시아는 엉망이 된 머리를 만질 생각도 못 하고 애초의 결심대로 호소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몸도 마음도 준비가 필요해요.”
리샤르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살짝 내리뜨는 눈을 보니 풀이 죽어 보이는 게 조금만 밀어붙이면 될 것도 같았다.
앤시아는 눈을 깜박여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던 눈물을 흘려 냈다.
“제발 부탁드려요. 일 년……
아니, 반년이라도 좋아요. 제게 시간을 주세요.”
“……부부가 되었으니 첫 밤을 보내는 게 전통인데.”
이 벽창호가!
소리치고 싶었으나 다행히 전통을 말하는 리샤르의 목소리는 한 풀 꺾여 있었다.
좀 더 밀어붙이고자 앤시아는 큰맘 먹고 이불 밖으로 나왔다.
입고 있던 두꺼운 가운을 벗고 얇은 슬립 차림을 내보였다. 이에 리샤르의 동공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근육 빵빵 건강 그 자체인 공작이 보기에 팔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가는 앤시아는 한 줌도 되지 않을 터. 이 차이를 확실히 내보이며 설득했다.
“정말 부끄럽지만, 제 몸은 공작님을 품기에 너무 부족해요.”
“……작군.”
어디가?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눈물로 호소했다.
“네, 전 작고 약해요. 그러니 제발 시간을 주세요. 부탁드려요, 공작님.”
시간을 준다고 쑥쑥 커지거나하지는 않겠지만.
앤시아는 자신이 연습한 대로 서글픈 우는 얼굴을 연출한 뒤 침대 위로 몸을 웅크렸다. 더 작고 볼품없어 보이도록 몸을 웅크려 동정심을 사려는 셈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머리 위로 도톰한 가운이 덮였다.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자 이미 리샤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토…… 통했다.”
첫 밤을 무사히 넘긴 것이다.
오늘 이후 리샤르는 한 달간 출정을 나갈 터. 일단 한 달은 무조건 안심이었다.
그사이 악녀로서 평을 쌓아 둔다면 리샤르도 원작대로 그녀를 질색하리라.
안도한 앤시아는 작은 환호성을 지르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