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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2화 (12/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화.

요리장 하몬은 식재료 반입 중 공작의 방문 소식에 헐레벌떡 주방으로 돌아왔다.

지금의 주인인 리샤르 그윈티드공작은 하몬의 기억으로는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주방에 오지 않았다.

그는 항상 바빴고 요리장 하몬이 내어 주는 요리를 군말 없이 빠르게 먹어 치웠다. 속도만 빠를 뿐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예법에 맞춰 식사를 끝내는 공작이 매번 신기하면서도 음식 맛에 대한 평이 없어 약간의 서운함을 가지기도 했다.

그랬던 공작이 직접 주방에 들렀다. 그것도 첫날밤을 보내고 움직이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혹 새 주인마님이 요리에 불평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 한들 직접 공작이 움직일 일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쌓아 왔던 불만을 전하러 온 건 아닐까.

온갖 걱정을 하며 하몬은 주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하몬의 눈앞에 상상도 못 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요, 요리장님.”

잔뜩 긴장한 채 한쪽 벽에 붙어 서 있던 하녀들이 하몬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가왔다. 하몬은 하녀들에게 시선조차 줄 틈도 없이마른침을 삼켰다.

주방은 하몬에게 있어 지루할 정도로 매일같이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해 왔던 일터였다. 그런 일상적인 주방이 평소와 달라진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파삭.

와작.

퍽.

주방 한가운데 공작 부인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된 수많은 식자 재가 실시간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무표정하다 못해 냉기를 뚝뚝흘리며 커다란 테이블에 놓인 과일들을 하나씩 부심 대고 있는 공작이라니.

하녀들이 겁에 질려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콰직.

동부에서 들여온 몇 개 안 되는 귀한 과일이 부서져 나가자 하몬은 서둘러 몸을 굽히며 공작에게 다가섰다.

“주인님, 찾으시는 게 있으시면이 하몬이 돕겠습니다.”

과일로도 부족해 토마토까지 즙으로 만들어 대던 리샤르는 그제야 손을 털며 하몬이 내민 수건을 받았다.

“부드러운 걸 찾고 있다.”

부드러운 과일? 그걸 왜?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음에도 하몬은 이 시기에 구하기 힘들지만, 공작 부인을 위해 준비한 복숭아를 가져왔다. 보송보송하니 뽀얀 복숭아를 조심스레 내밀자리샤르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물론 하몬을 비롯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흔들림이었다.

리샤르는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손에 쥐더니 3초도 되지 않아 으깨 버렸다.

저 구하기 힘든걸!

딱딱한 때 들여와 선대 주방장의 비법대로 부드럽게 숙성시켜온 수일의 노력이 3초 만에 즙이 되어 사라졌다. 속으로 비명을 삼키던 하몬은 제 주인인 공작의 안색이 어두워졌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것보다 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걸…… 아니다. 그 전에 이것부터 익숙해져야겠군.”

“예?”

“이걸 모두 가져오거라.”

차마 또 으깨 버리실 거냐 묻지도 못한 하몬은 조용히 복숭아를 챙겨 왔다.

설마 오전 출정 전까지 저렇게 과일들을 으깨 버리는 건 아닐지 두려움에 떨면서.

그리고 그런 하몬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

“배고파…….”

무사히 첫날밤 방어에 성공한 기쁨에 앤시아는 신나게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흥분이 가시자 긴장이 풀렸는지 배속을 울리는 꼬르륵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무시하자니 어제 하루 뭘 먹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나 어제 뭐 먹었더라.”

그러고 보니 마차에서는 긴장탓인지 멀미가 심해 물만 마셨다.

공작저에 도착해서도 곧바로 약식혼 준비에 휘둘리느라 마실 것 외엔 먹지 못했다. 공작을 기다리느라 한참을 서 있었고 저녁을 먹을 틈도 없이 첫날밤 준비에 내던져졌다.

마지막으로 먹은 고형물이 어제 아침 수프에 찍어 먹은 빵 한 덩이임을 깨닫자 극심한 공복감이 몰려왔다.

“이러다 아사하겠어.”

악녀 짓도 기운이 있어야 하지.

도저히 아침 식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설렁줄이 저건가?’

침대 머리맡에 있는 굵은 줄을 붙잡아 당기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굵은 밧줄이 설렁줄은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백작가에서 앤시아가 사용했던 설렁줄은 비단을 꼬아 밧줄에 이어 만들어 무척 부드러웠다. 울리는 방울 소리도 청명하니 듣기 좋아 일부러 여러 번 당기기도 했다.

‘이건 당기는 데 성공하더라도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것 같은 위압감인데.’

그래도 이것 외엔 딱히 줄다운게 보이지 않아 앤시아는 양손으로 줄을 잡아당겼으나 소용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설렁줄이냐고!”

힘이 부족한가 싶어 온몸을 내던진 앤시아의 노력에도 운동회줄다리기용 밧줄처럼 보이는 설렁줄은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양손으로 잡아당기려다 순간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을 향해 미끄러져 내렸다.

“악!”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얼굴부터 떨어지는 걸 간신히 막았으나 힘없는 팔은 휙 꺾이며 정면으로 부딪혔다.

“아우, 내 코.”

그러니까 이 동네 물건들은 죄다 공작의 근력에 맞춰 제작된 거냐고.

저 설렁줄은 일반적인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공작 전용 줄인가 보다.

그렇게 결론 내린 앤시아는 직접 움직이는 게 빠르겠다 싶어 고개를 들었다. 막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으려던 차에 입술 위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어?”

슬립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에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치켜들면 안 좋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아, 진짜 지금보다 더 약할 때도 안 흘리던 코피를 다 흘리고 난리야.”

혹시나 하고 콧등을 살살 만져 보는데 크게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수건을 찾아 두리번대는 사이 침대 시트 위 이곳저곳에 핏자국이 남았다. 백작가였다면 걱정한 메리가 의원을 부르겠다는 걸 말리느라 정신없었을 테지만 여기는 공작가였다. 이 정도 코피쯤이야 아마도 별일 없이 넘어가겠지 싶으면서도 이 피를 첫날밤의 흔적으로 오해하게 되는 건 탐탁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마수 때려잡는 일외에는 관심도 없는 공작이 첫 밤에 대해 언급할 리도 없고 괜한 오해나 쌓이겠지.

이혼하는 데 첫날밤 유무는 약간의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앤시아는 코피가 멈추자마자 시트를 둘둘 말아 침대 밑에 숨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벽난로에 던져 넣어 증거 인멸을 하고 싶지만, 자칫 방화범으로 몰릴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위를 구해 와서 조각조각 낸 뒤 조금씩 태워야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악녀 길도 차근차근 밟아야 했다.

꼬르륵.

배가 이제 고프다 못해 속이 쓰렸다.

“악녀가 되기 전에 아귀가 되겠어.”

로브를 걸치려던 앤시아는 그래도 공작가 안을 돌아다니는 건데 조금은 챙겨 입자 싶어 침실 옆에 딸린 작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북부라서 그런지 고급스러워 보이면서도 두툼한 소재의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다. 사용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쉽게 입을만한 드레스를 골라 입는 와중에도 제일 환한 색감을 골랐다.

언제 어디서든 유일한 장점인 외모를 유지하는 건 분명 도움이 되므로 꾸미는 일에 소홀할 생각은 없었다.

“이 새벽에 누가 본다고. 이 정도면 됐어.”

더 꾸미다간 진짜 쓰러질 것 같아 앤시아는 곧장 침실을 나섰다.

묵직한 문을 몸으로 밀어 열면서 자신의 저질 체력을 원망해야 할지 공작가 전체의 지나친 튼튼함을 욕해야 할지 갈등했다.

간신히 복도로 나온 앤시아는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아사와 동사중 동사가 더 빠르게 찾아올 것 같아 예쁨이고 뭐고 드레스 룸에 보이는 두툼한 것들을 죄다 끌어 몸에 둘렀다.

한 마리의 커다란 북극곰.

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작아 기껏 해야 눈 쌓인 새끼 펭귄 같은 모습으로 앤시아는 부지런히 주방을 찾아 움직였다.

‘아무리 커 봤자 저택 구조가 더 거기서 거기겠지.’

앤시아의 생각은 안일했다. 분명 처음 마차를 타고 들어와야 할 만큼 거대했던 공작가였다.

중간에 사람이라도 만났다면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이 넓은 저택을 거니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했다.

외부 침입이나 경계심이 대단해 보이더니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

앤시아는 주린 배를 움켜쥔 채 복도와 계단을 한참 걸어야 했다. 다리가 아파서 포기할까 싶을 때쯤 드디어 인기척을 발견했다.

“예상보다 일찍 출발하는군.”

“그러게. 어서 서두르자고.”

복도만 돌아서면 최소한 서너명은 있을 법한 기척에 앤시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주방 위치를 물어보는 하녀를 불러 달라 요청하는 일단 무조건 붙잡아야 했다.

복도를 돌아서자 커다란 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 틈으로 환한 빛과 여러 사람이 보이자 앤시아는 거의 몸을 던지듯 내달렸다.

바닥을 친 체력으로 저 문이 닫히면 다시 열 자신이 없었다.

“히윽!”

기합도 신음도 아닌 소리와 함께 앤시아는 몸을 던졌다. 간신히 육중해 보이는 문이 닫히기 전 아슬아슬하게 안으로 들어서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작 몇십 미터일 뿐인데도 전력을 다한 탓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혹여나 숨을 고르는 사이 사람들이 가 버릴까 봐 급하게 고개를 들던 앤시아는 눈앞에 보인 광경에 표정 관리조차 하지 못할만큼 놀랐다.

곰. 흑곰. 북극곰. 반달곰.

수많은 곰이 무구를 갖춘 채 정렬해 있었다.

짐승들이 나란히 서 있는 광경에 압도당한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무척 곤란했으나 모든 곰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상황에서 미적거릴 틈이 없었다.

허우적거리던 손이 차가운 무구에 닿았고 그에 정신을 차린 앤시아는 자신이 붙든 게 구명줄인지 폭탄인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목이 꺾일 것처럼 들고 나서야 익숙한 새파란 눈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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