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3화.
리샤르는 출정 준비 중 갑작스럽게 등장한 앤시아의 존재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묵직하게 닫히는 문틈으로 자그마한 몸이 쏙 들어올 때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
평소 튼튼하다고만 생각했던 거대한 철문이 연약한 부인을 짓누르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당장 호위를 붙여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리샤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여기서 누굴 보낼까 고민하는 사이 앤시아가 리샤르의 검집에 손을 댔다.
기사의 검에 손을 대다니, 이유 불문하고 검을 뽑아 들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를 향해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앤시아의 녹안을 마주하고 있자니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가늘고 작은 새하얀 손가락이 더듬거리기에 검을 원하는 건가 싶어 검집을 풀어 주려 하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누구든 두려워하며 피하기 바쁜 자신의 눈은 빤히 쳐다보면서 고작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검을 무서워하다니.
귀엽다.
리샤르는 제 머릿속에 떠오른 감정을 급히 갈무리했다.
평소 리샤르를 지배하는 건 정복. 파괴. 의무였다. 그중 가장 손쉬운 것은 마수를 파괴하는 것과 그로 인해 차지하게 된 땅의 소유권을 받아 내는 것이었다.
귀엽다니.
한 손으로 쥐면 터질 것 같은 위험한 존재였다, 저건.
리샤르는 새벽녘 터트린 과일들을 떠올렸다.
과거 힘을 조절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 처음 상대한 마수의 목만 자르지 못해 마석까지 부쉬버렸던 서툰 기억까지 떠올랐다.
눈앞의 가녀린 여인을 망가뜨려서야 안 될 노릇이었다.
리샤르는 앤시아를 향해 뻗으려던 손을 뒤로 물렸다. 리샤르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을 굴려 쫓는 앤시아가 귀여우면서도 위험하게 느껴졌다.
귀여운데도 위험한 생물. 바로 연상되는 마수가 즉각 리샤르의 머릿속을 스쳤다.
몸에 두른 저 하얀 털들은 혹시 눈토끼로 변장한 걸까.
‘어째서 변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몸도 약해 보이는데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그런 의문을 떠올리면서도 앤시아에게 흰색 털 망토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일반적인 토끼와 달리 마수 눈토끼는 딱 저만한 크기에 오염되지 않는 새하얀 털로 유명했다.
그래서 종종 공작저로 흘러들어온 눈토끼는 어린 기사들의 손에 가죽이 벗겨지고는 했다.
‘저런 모습은 위험한데.’
아무래도 그 모습은 위험하다고 알려 주어야 했다.
리샤르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 앤시아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단지 그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려 무표정한 공작의 의중을 오해한 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을 뿐이었다.
그중 가장 걱정이 컸던 기사부 단장 아서 모겐스가 결국 리샤르와 앤시아의 앞으로 나섰다.
“주인마님, 몸이 불편하실 텐데도 공작님을 배웅하러 나와 주신 겁니까?”
익숙한 아서의 목소리에 앤시아는 그제야 이들이 곰 가죽을 뒤집어쓴 기사들임을 알아봤다.
당황해서 곰 머리밖에 안 보였던 앤시아는 그나마 익숙한 파란 눈의 곰을 더듬거렸는데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한 것도 잠시. 자신이 들이닥친 곳이 출정 준비 중인 기사단 앞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자신이 붙잡고 있는 건 리샤르의 검집이 아닌가.
누가 봐도 출전 명령을 내리기 직전의 공작 옆에 달라붙은 매미꼴이었다. 이래서 리샤르가 치워 내려는 듯 자꾸만 손을 쥐었다 폈다 했나 보다. 바로 물러서야 하는데 안 그래도 한참 걷느라 고생한 다리가 후들거렸다.
곤란할 땐 뭐다?
앤시아 표 천사 같은 사랑스러운 웃음이다.
“허억…….”
“미모가 미쳤다…….”
여기저기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째 백작가에서 보다 더 반응이 격렬했다.
날짐승처럼 흉흉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흐물흐물하게 풀리는 것에 앤시아가 더 당황했다.
북부의 거친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뚝뚝한 편이었다. 그런 사내들 틈에 수년간 단련해 온 앤시아의 애교 섞인 미소가 피어나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에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한건 리샤르였다.
“아서 모겐스, 부인을 안으로 모시도록.”
“예, 각하.”
아서는 즉각 무구를 벗어 던지고 앤시아에게 다가섰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주인마님.”
“고마워, 앗!”
아서에게 주방 위치를 물을 생각에 들뜬 앤시아는 서둘러 걷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풀려 넘어졌다. 다행히 가까이에 있던 아서가 늦지 않게 붙잡아 주어 넘어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한순간에 기사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리샤르 역시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며 지켜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럼 몸조심하세요.”
작게 속삭이듯 간신히 배웅을 끝낸 앤시아가 아서의 부축을 받으며 홀을 빠져나갔다.
연약해 보이는 가녀린 여인이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는 모습에 무언가를 떠올린 기사들의 얼굴이 저마다 붉게 달아올랐다.
주인과 첫날밤을 보낸 마님이 상기된 얼굴로 배웅하러 나온 것도 대견한데 쓰러질 정도로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공작과 공작 부인의 체격 차이는 상당했다. 연약해 보이는 작은 체구의 공작 부인. 상당한 체격을 가진 기사들과 비교해도 커다란 공작.
의심할 여지도 없이 새하얗게 하늘거리는 작은 여인이 제대로 걷기 어려울 만큼 지난밤은 버거웠으리라.
육중한 문이 완전히 닫히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리샤르를 향한 비난이 들려왔다.
“아무리 우리가 마수 잡는 짐승소리를 듣는다지만.”
“기사도는 어디로 간 겁니까?”
“각하, 조금 자제하셨어야 하는 건 아닌지…….”
정작 리샤르는 들려오는 작은 비난보다 앤시아를 붙잡던 아서의 손이 신경 쓰였다.
한 손에 쏙 들어가던 가느다란 허리와 시선을 빼앗길 만큼 화사하게 쏟아지던 백금 빛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생생하게 눈에 박혀 들었다.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아졌나.
리샤르는 여전히 들려오는 웅웅대는 핀잔들을 무시하는 대신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보름. 이번 마수 토벌은 그 안에 해결한다.”
조금은 장난스럽고 질투 어린 비난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한 달을 염두에 두고 짐을 꾸렸던 시종들은 주저 없이 절반의 짐을 떼어 냈다. 언제 풀어졌냐는 듯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집중하는 기사들을 향해 리샤르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도 장난스럽게 공작 부인을 혼자 두기 싫어서 그러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리샤르 본인조차 알아채지 못한 진실이었다.
등 뒤에서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놀란 앤시아가 멈춰 섰다. 복도를 꽤 걸어왔는데도 우렁찬 함성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출정 전 기합 같은 겁니다. 앞으로 종종 듣게 되실 겁니다.”
“응, 고마워요.”
혹 앤시아가 놀랄까 아서는 느긋한 태도로 차분히 알려 주었다.
“이제 공작 부인이 되셨으니 말을 낮추셔야 합니다.”
“음……. 노력해 볼게.”
아무리 몇 년 이곳에서 살았다지만 누가 봐도 저보다 나이 많은 상대에게 대뜸 말을 놓는 건 앤시아 안의 유교 걸이 버거워했다. 그래도 몇 번 기사부단장에게는 말을 놓았음에도 잠깐만 방심하면 이랬다.
물론 시녀장처럼 사람 속을 박박 긁어 놓는 상대에게는 종종 이성을 잃기도 했지만.
“이쪽 계단을 이용하시지요.”
“아, 고마워.”
아서의 안내대로 주방을 향하던 앤시아의 코끝에 달콤한 향이 맡아졌다.
달달한 과일의 향. 특정하기에는 복합적인 향들이 무척이나 진해 과일로 만든 향수라도 뿌린 것 같았다. 거기에 고소한 버터냄새까지 풍기니 앤시아의 허기는 극에 달했다.
앤시아의 걸음이 빨라지자 혹여나 또 넘어질까 따라붙는 아서의 눈빛이 신중했다.
“요리장님, 채소 손질 끝났습니다.”
“절반은 수프 솥에 넣고 넌 뒤에 가서 재워 둔 고기 가져와.”
“네, 요리장님.”
“남은 과일은 한쪽에 모아 둬.
젤리도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
“요리장님, 쓸 만한 과일이 거의 없는데요.”
“거기 테이블 위에 있는 건 뭐…. 아, 씨앗이었군.”
공작이 다녀간 자리에는 과일의 시체, 아니, 씨앗과 질긴 껍질 조금이 전부였다.
그 귀한 복숭아를 하나하나 파괴해 나갈 때는 마수의 머리를 터트릴 때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리샤르의 의도를 알 수 없는 과일 파괴 행위는 요리장 하몬이 내놓은 복숭아를 모조리 터트린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테이블위를 살피던 공작은 밤새 굳혀 탱글탱글해진 젤리를 발견하고 말았다.
설마. 안 돼. 저건 하룻밤 굳혀야 제대로 된 식감이 나는데!
차마 외치지 못하고 애꿎은 행주만 물어뜯던 하몬은 젤리를 손에 든 공작이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음에 의아했다.
모두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공작의 손끝이 아주 조금 움직이는 듯했다. 모두가 숨죽인 상황이라 몇몇은 눈치 챌 만큼의 미약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작은 꿈틀거림은 젤리 사망이라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공작의 단단한 손가락이 젤리를 조금 움켜쥐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으깬 것이다.
이쯤 되니 요리장 하몬은 제 주인인 공작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설마 공작 부인이 먹을 만한 건 전부 부숴 버리려는 걸까?
그만큼 공작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리샤르는 손을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어진 뜬금없는 명령에 하몬의 낮잠은 물 건너갔다.
“후우. 주인님께 보내 드릴 젤리 재료가 충분할지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주인님께서 젤리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보내라고 하셨죠?”
그렇다.
리샤르는 주방을 나서기 전 젤리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놓을 것을 지시했다.
음식의 호불호가 딱히 없는 리샤르의 특정 음식 주문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게 요리로서의 주문이라면.
마수 사냥 중에는 쉽게 상하지 않고 무르지 않는 건포를 주로 챙기기 마련이었다. 굳이 젤리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 사냥터로 보내라니. 아무래도 젤리들의 운명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 하몬의 한숨은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