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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4화 (14/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4화.

무엇보다 당장 공작 부인의 첫 식사로 차려 낼 요리가 부족했다.

공작 부인의 식성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해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힘든 밤을 보냈을 공작 부인을 위한 화려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아침을 차려 내려면 좀 더 가짓수를 늘려야 했다.

다행히 몇몇 단단한 과일을 포함해 식재료 대부분은 무사했다.

“과일이 들어가는 요리는 대부 분 빼야 하니 색감이 부족한데…….”

머릿속으로 레시피를 떠올리던 하몬은 습관처럼 손에 잡힌 사과를 양손으로 주고받았다. 단단한 편이라 처음 한두 개를 제외하곤 리샤르의 손에 파괴되지 않은 몇 안 되는 과일 중 하나였다.

“애플파이를 구울까. 이미 미트파이도 굽긴 했지만.”

고민하던 하몬의 시야에 테이블끝에 매달린 흰색 털 뭉치 같은 게 들어왔다. 식자재로 향하던 시선을 다시 되돌려 흰색 털 뭉치의 정체를 확인하던 하몬은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새하얀 것은 분명 털 뭉치인데 그 안에 더욱 빛나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귀엽다. 예쁘다. 아름답다.

떠오르는 형용사가 빈곤해서 곤란할 지경인 사랑스러운 소녀가 하몬의 양손을 오가는 사과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하몬은 저도 모르게 손에 든 사과를 내밀었다. 망설이다 배시시 웃으며 사과를 받아 드는 소녀는 북부의 거친 삶을 이겨 낸 여인들과 달라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하몬이 꼼짝도 하지 않자 의아해하던 하녀들도 그가 보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요리장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요정이 너희들도 보여?”

“예? 어머, 마님?”

“마님이 여길 어떻게 오셨어요?!”

하몬의 머릿속에 떠오른 요정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온갖 사랑스러움으로 무장한 저 작고 소중해 보이는 소녀가 앞으로 모시게 될 주인마님이라는 사실이 하몬의 심장을 격하게 뛰게 했다.

앤시아의 등장에 당황했던 하녀들조차 얼굴만 한 사과를 양손으로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베어 무는 초식 동물 같은 주인마님의 사랑스러움에 숨을 삼켰다.

사각사각.

마치 토끼가 사과를 갉는 듯한 작은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아플지경이었다. 그렇게 몇 번 갉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뭇거리던 앤시아가 쥐가 갉은 수준의 사과를 내려놓았다.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다른 과일도 많습니다.”

당황한 하몬이 공작의 손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과일들을 죄다 모아 앤시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줄줄이 놓인 과일을 바라보던 앤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분명 보기에는 사과였는데.’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 수박껍질을 씹는 줄 알았다. 그래도 사과 맛이 나서 어떻게든 먹어 보려 했는데 앞니로 갚는 게 고작이었다. 사과조차 이런데 요리 장이 내민 다른 과일들은 차마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청 바빠 보이는데 여기서 깎아 달라고 하면 민폐겠지?’

아냐, 어차피 악녀 노릇 할 건데 사과 하나 깎아 달라고 한들 무슨 흠이 되겠어.

결심한 앤시아는 최대한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걸 어떻게 그냥 먹어.”

앤시아 딴에는 최선을 다한 투정이었으나 이미 몸에 배어 있는 애교가 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오죽하면 조금 전 공작의 기행이 다 공작 부인 때문이었구나!

지레짐작하게 만들 정도였다.

공작 부인의 연약한 치아를 염려해 적절하게 과일을 분쇄하려던 주인님의 배려를 몰라봤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린 하몬은 곧장 칼을 휘둘러 과일을 잘게 쪼갔다.

“아, 난 사과만 잘라 주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인마님.”

말과 행동이 불일치했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앤시아가 잠시 다른 데를 본 것뿐인데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잘린 과일이 쌓였다. 지나친 굶주림에 더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앤시아는 하녀가 내민 포크를 받아 곧장 과일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아삭.

껍질을 벗겨 내고 한입 크기로 작게 자른 과일은 단단하긴 했어도 못 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확실히 백작가에서 먹던 것보다 딱딱해.’

정말이지 공작가는 모든 게 다 크고 단단한 듯했다.

사람부터 건축물, 음식까지. 마치 거인 마을에 놀러 온 것처럼 앤시아에게 있어 크고 단단한 것 투성이였다.

무척이나 배가 고팠음에도 산더미처럼 쌓인 과일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과일로 적당히 배를 채운 앤시아가 포크를 내려놓자 덩치 큰 요리장 하몬의 눈이 흔들렸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다른 과일은 며칠 뒤 또 들어올 겁니다. 그때는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괜찮아. 배불러요.”

“뭐 드신 것도 없으시면서 배부 르시다니……. 아, 그리고 말 낮춰 주십시오, 주인마님.”

불편해하는 하몬의 기색에 앤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무래도 백작가에서 보다 더 말투에 신경 써야 할 듯했다.

“응. 알았어.”

앤시아가 생긋 웃자 하몬 역시 따라 웃었다.

아직 한창 준비 중인 주방에서 더 민폐를 끼치기도 뭐해서 앤시아는 일어섰다.

“모겐스 경, 방으로 가요. 쉬고 싶어.”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피곤해하는 앤시아의 기색에 아서는 곧장 앞장섰다.

멀어지는 앤시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요리장은 하녀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창고에서 식자재를 더 가져와!”

“네, 네!”

“아까 가져오라고 한 고기는 고기 망치로 두드리고!”

“얼마나 두드릴까요?”

“증조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씹어도 끊어질 만큼 얇게!”

치아가 다 빠져 잇몸으로 씹어야 할 만큼 장수했던 조상까지 언급되자 하녀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맴돌았다.

덩그러니 탁자에 놓인 살짝 감힌 사과를 보며 하몬은 더욱 열의를 불태웠다.

“빵도 새로 구울 테니 반죽도 다시 하도록.”

“예, 요리장님!”

앤시아는 제가 주방을 한바탕뒤집어 놓았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방으로 돌아갈 길이 까마득해 느릿하니 걷고 있었다. 그런 앤시아를 기운 없어 보이는 거로 오인한 아서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마차로 오시는 동안 속이 좋지 않을 때도 이것보다는 더 드셨잖습니까.”

종종 멀미하긴 했어도 마을에 머물 때면 저녁 식사를 든든히 먹었다. 북부에 가까워질수록 좀 딱딱해지긴 했어도 빵이나 비스킷은 수프에 불려 먹으면 괜찮았다.

안 그래도 주방 안쪽에서 풍겨나오는 고소한 냄새에 군침이 넘어갔지만, 수프 위로 둥둥 떠오르던 생채소를 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음……. 좀 힘들어서요.”

“아.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주인님이야 밤을 새워도 멀쩡하시겠지만, 마님은 힘드실 텐데, 어서 방으로 가시죠.”

아니, 그러니까 턱이 아프다고.

턱을 쓱쓱 문지르며 오해를 풀어 주려 입을 여는데 하녀 둘이빨랫감처럼 보이는 천을 들고 앤시아 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안 보이던 하녀와 마주치자 반갑기까지 했다.

하녀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였으나 키가 작은 앤시아가 코앞까지 다가와 올려다보니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내 전담 시녀나 하녀가 있어?”

“예, 물론입니다. 하녀는 원하시는 만큼 곁에 두셔도 되고 전담시녀님은 따로 인사를 드릴 겁니다.”

“그럼 하녀는 너희를 선택해도 될까?”

놀란 하녀들과 눈이 마주치자 앤시아에게서 해맑은 웃음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쥘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를 마주한 하녀들은 이른 아침부터 시녀장의 잔소리에 시달렸던 피로감이 사라지는 듯했다.

“여, 영광입니다.”

“예, 마님.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공작 부인을 곁에서 모시는 일은 하녀에겐 승진과도 같았다.

일단 봉급이 오르고 허드렛일에서 해방되니 그것만으로도 갑작스러운 행운에 저절로 웃음이 퍼졌다.

기뻐하는 하녀들을 보며 겉으로 환하게 웃던 앤시아는 속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너희 둘은 앞으로 내 패악을 받아 줘야 할 거야.”

“그럼 방으로 마실 것 좀 가져 다줄래?”

“예, 마님.”

“그럼 시트는 저 혼자 태우고 오겠습니다.”

“시트는 왜 태우는데?”

앤시아의 순수한 질문에 하녀의 얼굴이 곤란한 듯 서서히 붉어졌다. 뒤에 선 기사부단장을 힐끗 거리며 말을 삼키는 하녀들을 보며 앤시아는 무슨 오해로 저 비싸 보이는 시트가 태워질 건지 짐작했다.

이놈의 호기심. 입방정. 그냥 방에나 들어갈 걸 괜한 질문을 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첫날밤을 치른걸 오해하게 둘 수 없어 하녀들에게 바짝 다가서 진실을 알렸다.

“그거 코피야.”

“네?”

“코피라고, 넘어져서 쾅! 부딪혔어.”

하녀의 시선은 앤시아의 코에 머물렀으나 딱히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앤시아 역시 기적적으로 콧등만 좀 찍힌 거라 멍이 들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 행이라 여겼다.

앤시아의 단호한 변명에 반응한건 뒤에 서 있던 아서였다.

“흠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앗, 고마웠어요. 모겐스 경.”

대답도 못 하고 허둥지둥 멀어지는 아서의 귀며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게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하녀들도 다 안다는 듯 앤시아를 동생 보듯 푸근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마님. 처음엔 다 그런 거랍니다.”

“아니, 그거 코피 맞다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셔도 된답니다.”

“아니, 잠깐.”

“고생하셨어요, 마님. 어서 안에서 쉬세요. 몸이 식으면 더 힘들답니다.”

앤시아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부끄러워서 하는 변명이고 거짓말이 될 판이었다.

“내 말 좀 들으라고!”

“네네, 듣고 있습니다. 그럼 전시트부터 처리하겠습니다.”

“전 마님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걸으실 수 있으신가요?”

“방금까지 걸어온 거 봤잖아.”

계속되는 오해에 앤시아가 퉁퉁 거리는데도 하녀의 눈은 더욱더 푸근해졌다.

앤시아는 다시금 깨달았다.

북부의 특성.

다 크고 단단하다. 거기에 곡해의 달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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