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5화.
“안 되겠어. 빨리 악녀 노릇을 시작해야지.”
마치 나이 차 많이 나는 막냇동생을 보는 듯한 저 푸근한 눈들이라니. 조금 더 나이 차가 있었다면 손녀의 재롱 보듯 할 판이었다.
차라리 시녀장인 로사가 있는 편이 계획에는 도움이 될 듯했다.
로사를 아쉬워하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로사가 왜 구박하러 오지 않는 건지 의아했다.
“만찬이 준비되어 모시러 왔습니다.”
두 명의 하녀, 줄리와 엘리의 도움으로 단장을 끝낼 무렵 아침 만찬이 준비되었음을 알려 왔다.
‘만찬은 원래 저녁 식사잖아.
게다가 공작 부인 홀로 만찬이라.
분명 공작도 자리를 비워 홀로 쓸쓸히 식사하게 되는 줄 알았다.
방으로 가져오라고 하려다 만찬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게다가 넓은 식당 홀에서 홀로 식사하는 외로운 공작 부인이라면 동정과 비웃음을 사기에 적절하지 않은가.
그런 속내를 순진한 웃음으로 감춘 채 하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식당은 말 그대로 북적거렸다.
집사장에 요리장, 수십 명의 하녀가 늘어서 앤시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마님.”
“마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집사장은 푸근한 인사를, 요리 장은 어딘지 모르게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인사를 해 왔다.
여기서 순진한 척하기보다는 백작 부인을 흉내 내는 쪽을 택했다.
“아침부터 수고가 많아.”
태연한 척 생글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던 앤시아는 거대한 식탁을 채운 요리에 할 말을 잃었다.
놓여 있는 의자만 해도 수십 개인 긴 식탁 위는 요리들로 빈틈없이 가득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고기들과 칼로리 폭탄 같은 디저트를 한꺼번에 만들면 어떡해.’
코스처럼 내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한 테이블 가득 차려 놓은 음식들을 보니 가성비 최강의 뷔페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온갖 요리들로 채워진 식탁 앞에서 앤시아는 한 입씩만 먹어도 소화 불량으로 죽도록 고생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마님께서 뭘 좋아하실지 몰라 최대한 만들어 보았습니다.”
“흐음.”
기대에 찬 요리장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바로 앞에 놓인 빵에 손을 대자 따뜻했다. 갓 구운 빵은 무척 부드러웠고 반으로 가르자 김이 날 만큼 따끈따끈했다.
뭉근하게 끓여 낸 수프 역시 과일 몇 조각밖에 먹지 못한 앤시아의 속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단지 그릇의 크기가 지나치게 커서 스푼이 푹 잠길 지경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놓인 고기말이를 반으로 잘라 입에 넣어 보니 부드럽게 씹히는 육질과 달리 아스파라거스는 나무토막 같았다.
‘정말 다들 이런 걸 평범하게 먹는 거야?’
대체 북부의 식물들은 이렇게까지 강인하게 자랄 필요가 있는 걸까.
과일 주스가 담긴 컵도 어찌나 큰지 무척 마음에 들어 욕심껏 마셨는데도 반도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식사가 끝났다는 의미로 모든 식기를 내려놓자 요리장이 안절부절못했다.
“주인마님, 혹 요리가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하몬. 뒤로 물러나게.”
집사의 만류에 요리장은 아차싶었으나 앤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답을 주었다.
“대부분 손도 대지 않았는데 맛을 어떻게 알겠어.”
“그, 그렇죠. 그럼 어째서 드시지 않는 건지…….”
“내가 그걸 일일이 설명해야 해?”
턱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트집을 잡기 위해 앤시아는 시녀장 로사를 롤모델로 삼았다.
로사가 이 현장에 있었다면 앤시아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잔소리가 시작됐을 것이다. 스푼을 집는 것부터 시작해 예법을 들먹여 가며 모든 것에 참견하며 식탁을 전쟁터로 만들어 주었을 로사의 부재가 아쉬웠다. 사사건건 참견할 줄 알았던 로사가 좀처럼 보이지 않으니 악녀 노릇을 시작하기가 영 버거웠다.
최소한 행동만이라도 최근 앤시아가 본 가장 거만한 상대인 로사를 모방했다.
이에 안절부절 못하며 머리를 조아리던 요리장 하몬은 필사적으로 답을 쥐어짜 냈다.
“마님, 그럼 수프 종류를 늘려 보겠습니다.”
“나보고 물만 먹으라는 거야?”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마님께서 수프를 주로 드시기에…….
죄송합니다.”
앤시아는 이 많은 요리를 준비한 요리장을 절망케 하고 하녀들에게 사치스러운 귀족으로 보이길 원했다. 뭐든 조금씩이라도 악녀 포인트를 모아 두면 무슨 짓을 해도 밉보일 것이다.
그러나 앤시아의 사랑스러운 외모는 그런 의도를 조금도 살리지 못했다.
악녀는커녕 배가 고파 골이 난 어린아이의 심통처럼 보였다.
이에 하몬은 크게 당황했다.
이십 년 넘게 공작가의 요리장으로서 자부심이 있었던 하몬은 타지에서 온 공작 부인의 입맛을 생각지 않고 자신 있는 요리만 마구 만들어 냈다. 그나마 막판에 사과조차 얼마 먹지 못하는 앤시아를 보게 되어 메뉴를 추가 하고 보강하기는 했으나 결과는 공작 부인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참패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님. 좋아하시는 요리를 말씀해 주시면 지금이라도 바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말할 생각 없는데.”
“예?”
충격받은 하몬의 후덕한 얼굴을 보며 앤시아는 깐깐하고 표독스러운 로사의 표정을 흉내 냈다.
“요리는 요리장 권한이잖아.”
그 말을 끝으로 앤시아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 뒤를 두 명의 하녀가 쫓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요리를 치워 냈다.
오늘 포식하겠구나 좋아하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공작 부인 이 형편없는 식사를 한 것에 충격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줄지 않은 수프 그릇과 반도 안 마신 과일 주스, 가득 쌓인 빵은 줄어든 티도 안 났다.
“내가 우리 마님을 굶겼어.”
어느새 우리라는 친근한 표현까지 써 가며 하몬은 절망했다. 새벽녘 사과를 갉아먹던 앤시아를 함께 목격한 하녀들이 다가와 하몬을 위로했다.
“요리장님, 저희도 아이디어를 낼게요.”
“다음 식사 때는 마님께서 하나라도 더 드실 수 있게 힘내요.”
“다들 고맙다.”
평소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요리장과 소속 하녀들은 공작부인의 만족스러운 식사를 위해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눴다. 뜻밖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음을 앤시아는 꿈에도 몰랐다.
그저 악녀로서 순조로운 시작이라는 착각 속에 다음 악행을 위한 계획을 이어 갔다.
“줄리, 엘리. 외출 준비를 해줘.”
“오늘은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코피 좀 흘렸다고 종일 누워 있을 만큼 허약하지는 않아.”
백작가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마차 공포증이 있다고 오해한 백작부인의 착각에 맞춰 저택에서 만생활했다.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달려오면서도 잠잘 때가 아니면 마을에 들르지 않아 구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공작가에 왔으니 내숭은 넣어 놓고 구경도 하고 돈지랄도 좀해 볼 생각이었다.
“나한테 올 용돈 같은 거 있지?”
“내탕금이라면 시녀장님께 말씀드리면 사용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로사에게?”
합법적으로 로사를 만날 기회였다. 앤시아는 방으로 가던 걸 돌려 시녀장이 있을 만한 곳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다행히 이 시간쯤이면 시녀장은 관리자 전용 방에서 일과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고 했다.
관리자 전용 방은 뭐고 보고를 받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앤시아가 봐 왔던 백작가의 하녀장은 온종일 저택을 관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준비된 저택의 운영과 관리에 대한 보고를 백작 부인에게 전하고는 했다.
로사에게 개인 집무실이 있다니. 이건 명백히 본인을 안주인으로 여기는 태도였다.
짚고 넘어갈 게 한두 개가 아니라 다툴 만한 조건이 충분했다.
게다가 지금쯤 보고를 받는다고 하니 목격자도 많아질 것이다.
“여기가 시녀장님의 집무실입니다.”
딱 보기에도 시녀장이 방으로 가지기엔 화려한 문 앞에 하녀둘이 멈춰 섰다. 걱정스러운 듯 돌아보는 둘에게 앤시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문이 열리고 안에 보인 광경에 무슨 대기업 회장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웬만한 귀족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과시하듯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방한가운데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검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의 주인은 예상대로 로사마일, 시녀장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시녀장이 가질 규모가 아니었다.
사는 굳이 정정시키지 않았다.
대신 코웃음을 치며 공작 부인으로서 부족함을 지적했다.
내어주지도 않은 전담 시녀를 어떻게 데리고 다니라는 건지 로사의 실수를 지적하려던 앤시아는 오히려 이 건으로 로사가 제 욕을 할 수 있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렇기에 로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앤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생글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내탕금 받으러 왔어요.”
“하아. 공작 부인으로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빚쟁이 달려들듯 돈을 찾으러 온 거군요.”
천박하게.
분명 로사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음에도 앤시아는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로사는 손끝으로 책상을 짚고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과시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당연히 내어 드려야지요. 단, 모든 일에 절차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아시겠지요.”
“지금 놀러 나갈 거예요. 드레스 몇 벌 살 정도만 내어 주시면 돼요.”
물론 금화 주머니를 묵직하게 채워 나갈 필요는 없었다. 공작가 영지에서 공작 부인이 물건을 사는데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앤시아 역시 알고 있었으나 로사에게 시비 걸 건수를 주기 위해 당당히 찾아왔다.
“세상에. 공작가의 안주인이 된 첫날부터 공작가의 자금을 빼 갈궁리만 하시다니. 선대 공작 부인이 보셨다면 크게 노하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