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6화.
마치 선대 공작 부인이 빙의한 듯 눈으로 욕을 하는 로사의 태도가 살벌했다.
앤시아의 뒤에 서 있던 하녀 둘은 그런 로사의 꾸짖는 듯한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비켜 섰다.
애들아, 너무 겁내지 마. 앞으로 내가 더 못되게 굴 거니까. 날 무서워해야지.
“그래서, 못 주겠다는 거?”
살짝 앤시아의 말이 짧아지자로사는 귀찮다는 듯 더욱 퉁명스럽게 굴었다.
“못 드린다는 게 아니라 절차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무슨 절차?”
“하아……. 절차가 필요하다는 뜻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한심해하는 로사의 시선에 앤시아는 도톰한 숄 사이로 얼굴이 묻히도록 갸웃거리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였다.
“공작님의 승인이 필요한가요?”
아마도 공작은 공작 부인이 가져갈 내탕금이 얼만지도 모를 것이다. 공작의 핑계를 대는 건 거짓이기에 로사는 선뜻 답하기를 주저했다.
“그게 아니라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설령 푼돈이라 하더라도요.”
“어머, 설마 시녀장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었나요? 공작 부인의 내탕금을 받아 가는 일이? 로사, 로사가 나보다 더 윗사람이라는 건가?”
천연덕스럽게 놀라움을 표하는 앤시아에게 로사는 잠시 답하지 못했다.
로사는 앤시아를 조롱할지언정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다. 그간 거짓을 지어낼 필요 없이 공작가를 자기 손안에 쥐고 입맛대로 해 온 로사였다.
앤시아처럼 모욕을 주어도 개의치 않고 자존심을 건드려도 아무렇지 않은 이를 상대한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오전 보고를 통해 공작 부인이 첫날밤을 무사히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불쾌감이 치솟아 짜증을 내던 중이었다.
저 순진해 빠진 얼굴로 공작을 유혹해 밤을 보낸 게 분명했다.
애지중지 키워 온 공작을 여우 같은 것에게 빼앗긴 것 같은 상실감이 로사의 사고를 흐리게 했다.
“공작 부인께서 공작가에 익숙해지시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지요. 부인께서 능력이 부족하니 제가 관리하던 대로 따를 수밖에요.”
“아, 그렇구나. 난 로사한테 용돈을 받아 써야 하는 거군요.”
유치한 도발이 오가는 사이 앤시아는 얼굴이 비칠 만큼 깨끗이 닦인 책상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치 손가락 걸음이라도 하듯 콕콕 지문을 남겨 가는 앤시아의 행동에 로사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어린아이 손장난도 아니고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여전히 여유만만한 앤시아의 태도에 경계심이 들었다.
“계속 같은 말만 할 거라면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대답을 피하네요?”
“피하다니요. 전 지금 이런 쓸데없는 실랑이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무척이나 바쁜 사람입니다.”
“누구와 달리 말이죠?”
“네. 누구와 달리. 보시다시피 저희 공작가가 굴러가려면 눈코뜰 새 없이 바빠서요.”
“그럼 내가 뭘 하든 참견하지 못하겠네요.”
어느덧 앤시아의 지문이 광택으로 번쩍거리던 검은 책상에 잔뜩 묻어났다.
“뭘 하든이라뇨. 공작가에 누가 될 짓을 한다면!”
“티끌 수준의 내탕금도 안 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리 겁내세요.”
“거, 겁을 내다니! 지금 절 모욕하시는 겁니까?”
로사가 기사였다면 흰 장갑이라도 던질 기세로 바들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작 앤시아는 이렇게 여러 번 찔렀는데도 여전히 이성적인 로사가 불만스러웠다.
더 심한 말 해 줘. 더 화를 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패악을 부릴 수가 없잖아.”
백작가에서 평온하게 살아온 탓에 앤시아의 진상력은 바닥이었다. 로사를 통해 끌어 올려야 했다. 그런데도 로사는 자꾸만 정신을 차린 듯 틈틈이 이성을 끌어 올리며 꾸역꾸역 화를 참아냈다.
공작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로사의 목소리가 커졌음을 파악한 앤시아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참, 부부 침실에 설렁줄 좀 바꿔 줄래요?”
“뜬금없이 설렁줄이라니요?”
“공작님의 땀을 닦아 드리고 싶은데 내가 워낙 연약해서, 그 설렁줄을 못 당기겠더라고.”
땀은 무슨. 물 한 방울 없는 건조한 밤이었다.
그러나 무얼 떠올린 건지 로사의 얼굴은 새파래졌다가 새빨갛게 변했다.
정말이지 로사의 반응은 본인을 공작 부인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로사의 눈에 앤시아는 내연녀 나 후처로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런 발언은 로사의 속을 긁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커튼도, 공작님이 달이 기우는 걸 보시더니 시간이 되었다며 서두르시는데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
공작가의 전통에 예민한 로사가 달이 기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마치 제 것을 빼앗긴 것처럼 화를 참아 내는 로사를 보며 앤시아는 좀 더 자극했다.
“이제 달만 봐도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 그렇다고 아예 안보이게 할 수도 없고, 바깥이 비추는 얇은 커튼을 쳐 두면 좋겠어. 로사도 무슨 뜻인지 알죠?”
어느새 반말을 슬쩍 섞는 앤시아의 말투에도 로사는 주먹 쥔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로사의 반응이 만족스러워 앤시아는 한 걸음 살짝 뒤로 물러섰다.
“참, 그리고 공작님께서 러그를 깔아 주신다고 하셨는데 들으셨나요?”
방 안에 있던 사용인에게도 들릴 수 있도록 상냥하게 묻자 로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긴, 출정 나가실 때 보니까 무척 바빠 보이셨지만.”
“주인님이 가시는 걸 어떻게 알고 마중을! 아, 흠흠.”
의도적으로 정보를 차단할 생각이었구나. 그래도 상관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를 핑계로 로사나 좀 더 자극하자 싶어 앤시아는 마저 입을 놀렸다.
“오늘 중으로 러그가 깔렸으면 좋겠네요.”
“주인님께서 돌아오시면 확인 후 진행하겠습니다.”
“공작님 말을 의심하는 거예요?”
“아니요. 주인님이 아닌 새로 온 외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겁니다.”
세상에.
약식혼이기는 하나 분명 정식으로 공작 부인이 된 앤시아였다.
그런 앤시아를 ‘새로 온 외부인’이라는 말로 지칭하다니.
시녀장이 공작 부인에게 하는 말치고는 수위를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그런데도 이곳에 있는 수십 명의 사용인 중 누구도 그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로사의 화가 자신들에게 미치지 않을까 숨죽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만만해 보였나 보다.
물론 그렇게 보이려고 일부러 로사에게는 존댓말을 섞어 가며 말을 걸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성문 앞에서 예비 공작 부인이었던 앤시아가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할 만큼 녹록지 않은 상대라는 걸 벌써 잊은 건가. 아니면 그 일은 어쩌다 한번 벌어진 해프닝 정도로 여긴 듯했다.
순수한 놀라움으로 잠시 말을 멈춘 앤시아에게 로사는 의기양양해져 덧붙였다.
“공작가의 예산은 함부로 쓰이는 게 아닙니다. 그게 설령 티끌도 안 되는 수준이라도 말이죠.”
“그럼요. 로사가 시녀장인데 판단과 책임 역시 로사의 몫이죠.”
판단이라는 말에는 미소를, 책 책임이라는 말엔 석연치 않은 듯 미묘하게 굳어지는 로사의 표정에 앤시아는 한 번 더 찔러보기로 했다.
“공작님께서 제 발이 찬 바닥에 닿는 걸 두고 보실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부끄럽게도 제 발을 손으로 데워 주시기까지 했답니다.”
수줍다는 듯 발그레하게 뺨까지 붉히자 로사의 앞에서 긴장해 있던 하녀들까지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했다. 이 정도 긁었으면 됐겠지 싶어 뒤돌아서려던 앤시아에게 로사의 짜증 섞인 한숨이 들려왔다.
“커튼과 러그,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하녀 몇 명만 보내도 해결될 일이니까요. 그리고 내탕금……. 여기까지 찾아오실 거 없이 담당 시녀에게 시키도록 하세요.”
서로 얼굴 보지 말자는 듯 로사는 순식간에 앤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예상과 달리 로사는 너무도 빨리 백기를 들었다.
그만큼 공작과의 애정사가 듣기 끔찍했나?
시녀장치고 지나치게 기고만장했던 로사가 이 정도에 한풀 꺾일 줄은 몰랐다. 분노를 폭발시키라는 듯 자극한 게 오히려 꺼트려 버린 듯했다.
“고마워.”
떨떠름한 마음에도 화사하게 웃음을 보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앤시아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시녀장의 굳어 있던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가는 건 누구도 보지 못했다.
‘망했다.’
기껏 그럴싸하게 보일 부분만 강조해서 알린 건데 괜히 첫날밤만 기정사실화 시켰다. 감추고 싶었던 걸 내보인 대가로 얻어낸 건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뿐이었다.
“그래. 애초에 남을 이용하려고 하니까 자꾸 꼬이는 거야.”
스스로 해야 할 일이었다.
차라리 원작을 그대로 따라야 했나?
시녀장 로사에게 한마디도 못하고 주눅 들어 있다 약식혼에서 기절한 척하고.
그대로 호박을 콧구멍에 넣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첫날밤을 보내고 칩거.
“무리. 이미 첫 관문에서 텄어.”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진 로사의 첫 번째 만행은 나름 성공적으로 이겨 냈다.
백작 부인 힐다가 챙겨 준 블루다이아몬드 세트를 블루 토파즈로 바꿔치기해 뒀음에도 실제로 부서지는 걸 보는 순간 눈이 뒤집히기는 했지만. 백작가를 떠나기 전 메리가 비슷한 토파즈 세트를 구해 오지 못해 진품을 들고 왔다면 아마도 로사의 머리채를 잡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악녀라기보다 미친년으로 낙인 찍혔을 것이다.
“악녀 노릇 하기 은근 힘들어.”
예상보다 공작가 사용인이나 기사의 호의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오늘 앤시아가 한 악녀다운 행동이라고는 어린애 같은 반찬 투정과 어른에게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꼬마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공작 부인이 시녀장에게 반말 존대 섞어 가며 제 할 말을 한 수준이라 악동은커녕 아직 어린 마님 취급이었다.
악녀로서 소소하게 악행을 적립한다 해도 이건 너무 미미했다.
이런 식이면 나중에 이혼당할 빌미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일단 뭐라도 하나 더 하자.’
원작에서의 앤시아는 방에 틀어 박힌 채 툭하면 물건을 내던지고 망가트렸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용인들 사이에 안 좋은 소문이 퍼졌다. 그 뒤로 조금만 퉁명스러워도 차갑다, 몸이 아파 수프를 물려도 동부의 귀족이라고 까탈스럽게 군다는 식으로 고깝게 보았다.
“그래, 기물 파손이 있었어.”
비용적 손해를 일으키면서 하녀들을 귀찮게 만드는 손쉬운 방법을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