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7화.
마침 걷고 있던 복도에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앤시아는 주저없이 손을 뻗어 항아리를 밀어보았다. 묵직하니 한 손으로 밀리지 않아 몸통으로 부딪히자 그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퍼석.
원하던 맑고 고운 청량한 소리가 아닌 묵직한 벽돌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앤시아는 옆에 있는 다른 항아리까지 밀었다.
쨍그랑.
이번에는 제대로 날카롭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항아리가 깨지며 낸 커다란 소음에 멀리 지나 가던 사용인까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아예 이 기세로 복도에 늘어선 항아리들을 죄다 깨 버릴까 고민하는 사이 줄리와 엘리가 황급히 달려왔다.
“마님, 괜찮으신가요?”
“이쪽으로 오세요, 마님.”
“이거 내가 밀었어.”
아예 대놓고 밀었으니 이건 실수로 볼 수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두 하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앤시아를 다독였다.
“시녀장님 정말 못됐어요. 다른 애들도 시녀장 무서워서 마님 편도 못 들고 눈치만 보는데 저희까지…… 정말 죄송해요.”
“아니, 나 항아리 깼다니까?”
“괜찮습니다, 마님. 이까짓 항아리 열 개든 스무 개든 다 깨셔도 됩니다.”
“그럼요. 대신 마님이 다칠 수 있으니 저희 시키셔도 돼요.”
항아리를 깬 행위가 앤시아의 분풀이라고 생각한 하녀들은 로사와의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두 하녀는 앤시아를 안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충직하게 구는 걸까.
“신경 쓰이시면 시녀장님이 보시기 전에 창고에 있는 다른 항아리를 가져다 놓을까요?”
“깨진 건 저희가 몰래 치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두 하녀는 공작 부인이 됐음에도 시녀장에게 휘둘리는 앤시아를 안쓰러워했다.
앤시아는 시녀장이 가지기엔 어이 없는 전용 집무실에서 로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결과적으로 앤시아에게 유리하게 끝난 대화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생글거리는 앤시아와 악귀처럼 점점 일그러지는 로사의 깐깐한 말투가 대비되어 작고 사랑스러운 그녀를 피해자처럼 보이게 했다.
“마님, 이가 나간 접시들을 던지는 건 어떨까요?”
“창고에 아직 폐기되지 않은 물건들이 제법 있답니다.”
오히려 부추기는 하녀들을 보며 앤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품 파괴 정도는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나 보다.
줄리와 엘리의 권유에 앤시아는 오히려 의욕이 꺾여 방으로 돌아갔다.
백작가에서 평화롭게 지내 온 탓에 앤시아는 자신의 악녀 기준 치가 지나치게 낮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했다.
전담 시녀가 오면 돈이나 왕창받아서 쇼핑으로 악녀의 불꽃을 피워 내리라.
그렇게 마음먹고 얌전히 기다리기를 몇 시간.
앤시아는 바닥에 새로 깔린 러그와 창문에 추가된 얇은 커튼을 보며 황당해했다.
“와, 이거 완전 한 방 먹었네.”
부부 침실뿐 아니라 앤시아가 머물 공작 부인의 방까지 두툼한 러그가 깔렸다. 커튼에 설렁줄까지 착착 바뀌는 걸 보며 로사가 수작을 부리지 않는 것에 의아했다.
.
며칠은 질질 끌다가 참지 못해 따지러 가면 그것도 못 견디면서 공작 부인이라 할 수 있겠냐 비웃음을 보일 거라는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그랬기에 별 의심 없이 전담 시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은 노을로 물들어 갈 때가 돼서야 앤시아는 북부의 하루가 길어 기다림이 지루했던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내탕금은 전담 시녀에게 말하라더니.”
설마 전담 시녀를 안 보내 줄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괜히 기다렸잖아.”
전담 시녀에게 말하면 내탕금을 내어 준다던 로사의 말에 바보처럼 기다렸다.
역시 로사. 어떤 식으로든 앤시아에게 엿을 선물했다.
어차피 중간에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외출하기에 모호해지긴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종일 기다렸는데 전담 시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시녀장의 위세가 공작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줄리, 내 전담 시녀에 대해 들은 거 있어?”
“조만간 시녀장님께서 선별한 분들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줄리의 말에 앤시아는 오늘은 커녕 내일도 오지 않겠구나 짐작했다. 신고 있던 외출용 구두를 벗고 숄도 내려놓자 줄리는 눈치껏 앤시아의 환복을 도왔다.
“마님, 식사하러 내려가셔야 하는데 가벼운 드레스를 내올까요?”
“아니. 방에서 간단히 먹을게.”
“네, 마님. 완벽하게 준비해 오겠습니다.”
간단히 먹겠다는데도 열의에 불타는 엘리를 보며 앤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쟁반 하나에 올라갈 만큼만 부탁해.”
또 산더미처럼 차려 낼 식탁이 부담스러워 방으로 쟁반 하나만큼만 담아 오게 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무슨 탑 쌓기 대회라도 나가는 것마냥 무시무시한 높이의 쟁반 하나가 들어왔다.
엘리의 노력이 가상해 잔소리하는 대신 차분히 가져온 요리를 살폈다.
기름지고,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요리들.
이번에도 먹을 수 있는 게 몇 개 없었다. 결국 부드러운 빵과 스프 정도만 두고 돌려보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침울해하는 하몬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렸으나 모른 척 넘겼다.
“하아암…….”
배 속이 두둑해지니 이른 저녁임에도 졸음이 왔다.
“먹고 자고, 아주 바람직한 백수 생활이구나.”
하루를 게으르게 보냈으니 이것도 나름 악녀 아닐까?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악녀 포인트를 올리며 앤시아는 잠에 빠져들었다.
북부의 공작. 흑의 기사단의 마수 처치 능력은 의심할 필요 없을 만큼 유명했다.
기사로서도 대단하나 산세를 내달리는 승마술 또한 역시 뛰어났다.
인근 영지까지 사나흘은 걸릴 거리임에도 무리한 일정이 잡히면 단 하루 만에 험난한 산을 뚫고 도착해 버릴 정도였다.
단지 이번 출정은 임무도 아닌 의뢰였다. 한 달이라는 넉넉한 기간을 줬음에도 리샤르는 보름을 못 박았다.
이번에는 황제의 명도 아니었다.
리샤르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기사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짐을 줄인 후 말에 올랐다.
뛰어난 기마술을 가진 정예들로 구성된 기사단은 목적지까지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마수 출몰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처리한 덕에 해가 질 무렵 그럭저럭 안전한 야영지를 확보했다.
“이 속도면 보름도 안 걸리겠습니다.”
“신입들이 빠졌으니 충분히 가능하지.”
“그럼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긴장감도 없이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 평온한 기사들의 태도는 야영지의 분위기를 더욱 좋게 했다. 몇 군데 불이 피어오르고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드디어 첫 식사를 하게 된 기사들은 은근 들뜬 분위기 속에 솥을 불에 올렸다.
“아직 몸도 덜 풀렸는데 두어 마리 더 잡고 올까 봐.”
“아서라. 발밑도 안 보이는 산속에서 마수보다 나무뿌리가 더 무서운 거 모르느냐.”
한밤중의 사냥은 효율이 떨어지기에 식사와 수면을 하는 편이 나았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음식 냄새를 맡은 짐승이 다가오면 그때 몸도 풀고 음식 재료로 써도 그만이었다.
이런 느긋한 분위기에 어리숙한 마수 한 마리가 냄새를 맡고 기웃거렸다. 마수라고는 하나 북부 사람이라면 기사가 아니더라도 한두 마리쯤은 상대할 수 있는 최약체 눈토끼가 겁도 없이 다가왔다.
어린아이보다 크고 야생에서 존재하기 어려울 만큼 새하얀 털을 가진 마수는 떨어져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략 5미터. 사정권 안에 들어가는 순간 돌변해 커다란 앞니로 사람을 물었다.
기사에게 눈토끼는 사정권 안에 들어오기도 전 단검 표적용으로 쓰일 만큼 일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런 눈토끼가 공작의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리샤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닦는 것도 귀찮으니 덤비는 순간 목을 꺾겠거니 짐작하며 다들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물며 공작의 호위를 맡은 정예 기사조차 달달한 건포와 짭짤한 건포 중 뭘 드시겠냐 물어보며 느긋하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공작을 향해 뛰어오른 눈토끼는 리샤르의 손에 붙잡혔다. 다들 들려올 뼈 부러지는 소리를 예상했다.
눈토끼 고기라면 스튜에 어울린다며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뼈 부러지는 소리나 단말마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리샤르를 돕지는 않았으나 귀는 기울이고 있던 호위 중 하나가 육포를 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에 보게 된 것은 눈토끼를 이리 저리 뒤집어 가며 손안에서 눈굴리듯 다루는 리샤르의 기행이었다.
어찌나 주물럭거리는지 설마 산 채로 다지려는 건가 공포심이 들정도였다.
“각하, 아무리 마수라지만 그렇게 다루면 불쌍하잖습니까.”
보다 못한 호위가 조심스럽게 참견하자 리샤르가 답지 않게 움찔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불쌍하다는 건 무슨 의미지?”
“지금 산 채로 뼈를 다지시려는거 아닙니까? 육질을 부드럽게 하시려는 거라면 피를 빼내고 해도 충분합니다.”
“이 정도 힘에 아파하지 않는다.”
어쩐지 평소의 무뚝뚝함이 배가 된 듯한 리샤르의 퉁명스러움에 호위는 슬쩍 눈토끼의 상태를 확인했다. 호위의 예상과 달리 리샤르의 손에 이리저리 몸을 뒤집히고 있는 눈토끼는 어리둥절할 뿐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주인의 의도를 파악하려 심각해진 호위와 달리 리샤르는 묵묵히 손을 놀렸다.
확실히 과일이나 젤리와는 달랐다. 과일은 탄력이 부족했고 젤리는 지나치게 뭉그러졌다.
역시 심장이 뛰고 근육이 움직이는 생물은 달랐다. 리샤르의 손이 자칫 잘못 잡을 때면 근육이 긴장했고 느슨하게 잡으면 도망치려는 듯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놓치지 않을 만큼 적절한 힘의 양을 찾기 위해 눈토끼를 손안에서 굴리는 사이 리샤르는 서서히 감을 찾아 갔다.
‘부인과 닮았군.’
조금 전 출정식을 위해 모인 홀에서 갑작스레 마주친 눈토끼, 아니, 부인 앤시아를 떠올렸다.
다음에 만날 때 지금처럼 손힘을 조절한다면 다치게 하지 않으리라.
앤시아를 떠올리자 리샤르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저도 모르게 방심했는지 손에 힘까지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토끼가 빠져나가려 하자 리샤르는 본능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퍼석.
수상한 소리와 함께 리샤르의 손을 타고 핏줄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