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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8화 (18/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8화.

호위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 고기 손질을 하기 위해 넘겨받으려 했다.

“제가 손질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주시…… 윽!”

손을 내밀던 호위는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리샤르의 살기에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웬만한 마수를 앞둔다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분노하는 공작은 보지 못했다.

풀어져 있다고는 하나 전부 정예 기사였다. 리샤르의 변화에 식사를 준비하던 기사들 역시 검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가 공작 주변의 공기까지 바꿔놓았다. 영문을 모른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기사들의 분주함과 달리 리샤르는 자신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중이었다.

이 정도도 제어하지 못해 피를 보다니. 이 손은 파괴할 뿐인가.

자신의 무능함에 실망과 반성을 하느라 리샤르는 기사들이 분주해짐을 신경 쓰지 못했다.

이렇다 할 마수나 적의 흔적을 찾지 못한 정찰조가 돌아올 때쯤 리샤르는 주변을 살피겠다며 야영지를 벗어났다. 당연히 리샤르의 호위는 공작을 쫓았고, 그가 우연히 마주친 짐승이나 마수는 전부 베어 버리면서 눈토끼만 보면 한참 동안 주물럭대는 기이한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이렇듯 서로가 떨어져 있음에도 공작 부부가 된 두 사람은 각자 노력했다.

리샤르는 아내를 부서트리지 않기 위해 틈틈이 연습을, 앤시아는 악녀로서 1포인트라도 적립하고자 발버둥을 포기하지 않았다.

단, 노력한다고 해서 꼭 좋은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

앤시아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아침 일찍부터 공작가를 나섰다.

처음에는 하녀만 보냈다가 마구 간지기에게 로사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에 빈정 상하기는 했지만, 패악을 부리며 악녀 짓을 하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다행히 집사장과 마주친 덕에 별문제 없이 외출에 성공했다.

이름뿐인 공작 부인의 위치는 고작 이 정도였다. 앤시아의 씁쓸함과 달리 집사장은 정중한 태도로 시녀장이 아닌 앤시아의 편을 들어 주었다.

로사와 다투느라 불편할 줄 알았더니 집사장의 호의가 일을 쉽게 해 주었다.

이런 식이면 나쁘지 않았다. 로사는 열심히 앤시아에 대해 불만을 터트릴 테고 그게 다 나중에 악녀라는 소문에 날개를 달아 줄것이다.

나름 흡족해하는 앤시아의 속내를 모르기에 두 하녀는 열심히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

“마님, 오늘 드레스를 보신다고 했죠?”

“응. 너희들도 한 벌씩 골라.”

“세상에, 마님은 정말 관대하세요. 평생 따르겠습니다.”

줄리에 비해 다소 가벼운 엘리의 호들갑에 앤시아는 웃음을 보였다.

성벽으로 두텁게 둘러싼 거대한 공작저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두 번이나 경비병에게 마차를 살펴진 후에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돌아올 때는 얼마나 더 삼엄할지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아니지. 힘내야지. 지름신 제대로 맞을 테다.”

다행히 공작가를 나와 가장 번 화하다는 중앙광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해내려선 앤시아는 거대한 광장의 규모에 진심으로 놀랐다.

크고, 넓고, 웅장한데.

“어두워…….”

전체적으로 칙칙한 색감이 중앙광장을 지배했다. 오가는 사람 수도 적어 이래서 상업적 활동이 이루어지긴 하는 걸까 의심스러웠다.

외벽의 색을 비롯해 쇼윈도가 없는 가게들은 안에서 무얼 파는지 짐작도 안 갔다.

“마님, 저곳이 고위 귀족을 상대하는 고급 의상실이에요.”

“저기가?”

“예. 바로 모시겠습니다.”

실망한 앤시아와 달리 함께 온 하녀 둘은 무척이나 들떠 가장 큰 의상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앤시아의 눈에 차는 색이나 디자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의욕이 사라진 앤시아는 다음 의상실 역시 똑같은 회색 건물인 걸 보고 쇼핑을 포기했다.

두 사람에게만 드레스를 한 벌씩 고르라고 언급한 후 뒤돌아섰다.

정작 주인인 앤시아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새 옷이 생긴 두 하녀는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좀 더 밝은 천을 사용하는 의상실을 찾기 위해 분주히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이 바쁘게 가게를 살피는 사이 딱히 할 일이 없던 앤시아는 호위와 함께 광장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 앤시아의 주변을 어린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기웃거렸다.

“왜 그러니?”

“아, 저, 이거요.”

이내 앤시아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대뜸 바구니를 앞으로 내밀었다. 앤시아가 바구니를 덮은 천에 손을 대려 하자 함께 따라 나온 호위 기사가 먼저 손을 뻗었다.

안에는 다양한 색의 작은 꽃들이 가득 들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앤시아의 호의적인 반응에 긴장했던 아이도 웃음을 보였으나 기사가 만류했다.

“들꽃입니다. 저녁이 되기도 전시들어 버립니다.”

“그럼 지금이 제일 예쁠 때라는 거네? 좋아. 딱 지금 이런 예쁜걸 보고 싶었으니까.”

바구니 채로 받아 든 앤시아는 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의상실에서 사인이나 할 생각으로 나왔지 현금은 동화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동전 하나를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기사 역시 푼돈은 없었는지 반짝거리는 은화였고 아이는 크게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럽게 앤시아의 소매를 잡았다.

“언니, 더 예쁜 거 보여 줄게요.”

“멀면 곤란한데.”

“가까워요. 백 발자국 세 번 걸으면 돼요.”

“그렇구나.”

아이의 표현이 귀여워 앤시아는 작게 웃고 말았다. 당연히 기사가 말릴 걸 알면서도 앤시아는 아이를 따라나섰다.

“마님, 아이를 내세운 함정도 존재합니다. 섣불리 움직이시는 건 자제해 주십시오.”

“그럴지도.”

호위의 말을 무시하는 제멋대로인 공작 부인이라고 뒷말이 오가기를 바라며 아이를 쫓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를 따라가니 중앙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샛길처럼 좁은 길이 있었다.

“이곳은 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호위는 다시 한번 말렸으나 앤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의 뒤를 쫓았다.

“광장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지요.”

“괜찮아. 경이 지켜 줄 테니까.

그치?”

“그거야 물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 드릴 겁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기사다운 답에 앤시아는 기쁘다는 듯 웃어 보였다. 호위 역시 앤시아의 순수한 웃음에 더는 말리지 못하고 주변만 경계했다.

“여기예요, 언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말대로 들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작은 언덕을 가득 채울 만큼 만발한 꽃들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손으로 꽃을 따는 아이들의 몰골은 형편 없었다.

작고 마르고 더러웠다.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듯 꾀죄죄한 모습에 앤시아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제야 바구니를 들고 앤시아에게 다가온 아이조차 옷은 깔끔했어도 손이나 신발이 지저분함을 알아챘다.

밥이나 먹긴 한 건지 안쓰러운 마음에 호위를 탈탈 털어 동전이라도 몇 개 더 주려던 앤시아는 문득 왜 저 한 아이만 옷이 깨끗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이거 앵벌이 아냐? 근처에 어른이 숨어 있다거나.’

앤시아는 티 나지 않게 주변을 힐끗거렸으나 호위가 주변을 경계하지 않는 걸 보아 여기 있는 어린아이들뿐인 듯했다.

뒤늦게 앤시아의 부재를 알아채고 쫓아오느라 헐떡거리는 하녀를 돌아보았다. 하녀들은 꾀죄죄하고 마른 아이들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앤시아에게는 식사 때마다 좀 더 드셔야 한다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하녀들이 아이들을 보고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공작저에선 고아들을 이렇게 내버려 둬?”

어디 멀리 떨어진 영지 끄트머리도 아니고 중앙광장에서 십여 분 더 들어온 곳이었다. 앤시아의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질문에 줄리는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아닙니다, 마님. 저 애들은 평범한 영지민입니다.”

“평범한 영지민이 피죽도 못 먹은 꼴로 땟국물을 줄줄 흘리고 다녀?”

마냥 생글거리기만 하던 앤시아가 어처구니없어하며 표정을 굳히자 엘리 역시 당황하며 말을 거들었다.

“추수철이라 부모들이 바빠서 그럴 거예요.”

“부모가 있는데 저 꼴로 둔다고?”

순간 감정이 격해지려던 앤시아는 그런 자신을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퍼뜩 깨달았다.

여기서 저 애들을 동정하면 악녀가 아니라 성녀처럼 보일 것이다.

그냥 조용히 있을 걸 괜히 울컥해 말을 꺼내는 바람에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최소한 ‘우리 상냥한 마님’이라는 듯한 하녀와 호위의 시선을 바꿔야 했다.

앤시아는 입에서 나오려던 걱정의 말을 삼키고 머릿속에서 뒤튼후에야 입을 열었다.

“저렇게 더러운 걸 그냥 두는 거야?”

이 말을 할 때 살짝 혀를 깨물기도 했지만, 앤시아는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고 정답이란 확신이 들었다.

“뭐야, 저 앙상한 뼈들은. 내 눈을 괴롭게 할 생각인 거야?”

아이들을 보며 측은히 여기는 게 아니다. 내 눈이 괴로우니까 어떻게 좀 해 봐라.

그런 의미로 턱을 치켜들며 투덜거리는데 정작 하녀들은 물론 호위 기사의 시선까지 앤시아의 가는 팔로 향했다. 북부 스타일의 도톰한 드레스를 입었음에도한 손에 쥐고도 남을 만큼 가느다란 팔뚝 하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이건 틀린 예시였나 싶어 앤시아는 말을 돌렸다.

“들꽃 같은 거 따서 뭐 해? 몇 시간 뒤에 쓰레기가 될 텐데.”

아이들도 그제야 앤시아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알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차라리 골목길 패인 데다 흙이라도 퍼다 나르는 게 생산성 있지.”

아이를 따라오는 동안 푹푹 패인 바닥에 몇 번이고 비틀거렸던 앤시아였다.

“이거 봐. 내 구두가 엉망이 됐잖니.”

살짝 치맛자락을 들어 내보인 구두는 흙이 조금 묻었을 뿐이었다. 앤시아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생트집을 잡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애들 더러운 거 봐. 병이라도 걸린 거 아니니?”

“마, 마님. 그런 말씀은…….”

“왜? 중앙광장이면 귀족들도 오는 곳 아냐? 공작 영지에서 병이라도 돌아 봐.”

아이들을 잠정적 병균 취급하는 오만한 귀족 같은 태도에 하녀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다고 애들이 병에 걸린 건 아닐 거예요.”

“어떻게 확신해? 의사가 확인한 것도 아닌데.”

“그거야 그렇지만…….

“보기 싫구나.”

생긋. 상냥한 악녀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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