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20화 (20/148)

그리고 말라서 보기 싫다고 하셨지요?”

“으응, 그랬어. 어린애들 마음에 상처 줄 만한 말이지.”

“아이들 모두 배불리 먹이고 집에 가져갈 빵도 챙겨 줬어요. 우리 마님께서 너희 배곯는 게 싫으시다니 꼭 다 먹어야 한다고 전했고요.”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으나 아이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에 안심이 됐다. 그렇다고 마음이 놓였다는 걸 티 낼 수는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자니 줄리와 엘리는 다 안다는 듯 뿌듯한 웃음을 보였다.

앤시아는 그제야 이 푸근한 공기를 이해했다.

이 곡해의 달인들. 앤시아가 한 말을 또 자기들 멋대로 해석했다.

“아냐. 난 정말로 그 애들이 더럽고 말라서 한 소리야.”

“맞아요. 우리가 씻기고 새 옷을 입힌들 얼마 가지 않아 또 그렇게 될 거예요.”

“그래. 더럽고 언제 아플지 모르는 환경에 노출돼 있어.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야.”

“그래서 근처 여관이랑 한 달계약했습니다. 그 정도면 추수철이 끝나 부모들도 신경 쓸 테니까요.”

“계약이라니?”

“최선을 다해 마님께 누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했습니다.”

마차 안에서 오늘 돈을 뿌리고 다닐 거라며 장난스럽게 선언했던 게 이렇게 돌아왔다. 인제 와서 철회하기에 돈 펑펑 쓰는 악녀 이미지마저 꺾일 것 같아 앤시아는 입술만 달싹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 된 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맞지 않는 악행을 저지르느라 못된 단어를 골라 내뱉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지쳤다.

어차피 틀어진 일이니 이대로 넘기기로 했다.

“내 눈에만 안 보이면 돼.”

“네, 마님. 앞으로도 저희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통통하게 하는 건 자신 있으니까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전담 하녀면서 바깥에 아이들을 무슨 수로 신경 쓸 건지 의문이 들었으나 앤시아는 더 묻지 않았다. 앤시아가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점점 더 줄리와 엘리의 시선이 따뜻해졌으므로.

악녀 노릇 하기 참 힘들다.

이 힘든 걸 원작의 앤시아는 틀어박힌 거로 다 해결했다.

‘지금이라도 칩거할까.’

그러기에는 당장에라도 저 파란 하늘 아래를 산책하고 싶었다.

“맘대로 해. 궁금하지 않으니까 나한테 알릴 필요 없어.”

선의를 베풀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시조차 하지 않다니.

이미 콩깍지가 씐 하녀의 눈에 앤시아는 빛이자 천사 같은 존재로 비쳤다.

큰맘 먹고 아이들에게 모진 소리까지 했는데 돌아온 건 천사같다는 반응이었다.

성녀도 아니고 천사라니. 아니, 이 세계에선 성녀가 더 큰 비유려나.

온실로 옮기는 동안 음식이 식어 아예 새로 차려졌으나.

“여긴 흙냄새가 심해.”

당연한 걸 트집 잡는 앤시아의 말에 모두가 군말 없이 장소를 옮겼다. 한 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잡지 못한 탓에 요리가 식어버리자 요리장 하몬은 기꺼이 새로 만든 요리를 가져와 바꿔 주었다. 그에 양심이 찔린 앤시아는 다시 방으로 향했다.

수십 명의 사용인이 요리를 들고 전전긍긍하며 앤시아를 쫓았다.

“입맛이 없어. 수프만 남기고 다 가져가.”

이렇게 말해도 줄리와 엘리는 필사적으로 다양한 요리들을 챙겨 앤시아의 앞에 늘어놓았다.

요리장이 새로 내온 덕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들은 먹음직스러워 보이긴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썰린 한 조각을 맛봤는데 역시나 질기고 단단했다. 수프도 꾸덕꾸덕한 편이라 이것만으로도 배가 부른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두 사람은 마님이 굶는다며 전전긍긍했다.

한 시간 넘게 시간을 들여 식사할 자리를 선택했으나 먹는 데는 십여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뭐라도 더 먹이려고 디저트를 삼단 트레이에 가득 채워 밀고 들어오던 엘리는 앤시아의 가벼운 손짓하나에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줄리는 끝까지 과일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했다.

아이들을 잘 챙기는 것도 그렇고 아마도 동생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앤시아의 악행을 귀여운 악동이 벌인 장난쯤으로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쉬고 싶어.”

앤시아는 두 사람을 물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약간의 반항 겸 투정이었다.

내 맘대로 할 거야.

그런 의미로 무작정 내보내고 나니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앤시아가 조금만 침울해질라치면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 오며 재잘거리던 메리도, 창밖을 내다보면 바로 보이는 정원을 알록달록한 꽃으로 꾸며 주던 폴도 없었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어제는 비가 와서, 내일은 흐려질 것 같다며 매일 산책과 티타임을 함께해 주던 백작 부인도 없었다. 백작부인 힐다를 떠올리자 앤시아는 가슴 안쪽이 찌르르 울려왔다.

지난밤 꿈에서 본 것 같은데 선명하지 않아 속상했다.

곧장 편지지를 꺼내 백작가 식구들에게 하나하나 편지를 썼다.

여러 장의 종이를 써 가며 나단과 백작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공을 들였다.

쓰고 싶은 말은 많지 않았다.

「보고 싶어요.」

이 글귀를 썼다가 지우기만 반복했다.

자칫 백작 부인을 달려오게 만들면 안 되었기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기대된다거나 공작이 잘생겼더라 등의 문구도 마구 집어넣었다. 빼곡하게 채워진 편지지에 앤시아의 진심은 첫 줄과 마지막 줄뿐이었다.

「보고 싶어요.]

「다시 만날 때까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를 손수건으로 꾹꾹 누르던 앤시아는 찌뿌둥해진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헉,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난 거야?”

주변이 어두워지면 자동으로 켜지는 특수 마석 탓에 창밖이 어둑해진 걸 이제야 알아챘다. 앤시아는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망친 편지들과 완성된 몇 장의 편지를 보며 시간이 흐른 이유를 이해했다.

“이러니 몸이 찌뿌둥하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좀 나아질 것이다.

부드럽고 가벼운 재질로 바뀐설렁줄을 당기는 것만으로 목욕과 마사지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씻겨진 후 머리까지 말려지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앤시아를 다루는 두 사람의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러우면서도 능숙했다. 말을 걸면 자꾸 분위기가 좋아져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말려지는 사이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의아해하며 바라보고 있자 소란스러움이 가라앉더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리가 앤시아의 손에 달콤한 과일 주스를 건네준 후 일어나 문을 열자 상기된 얼굴의 하녀들이 여럿 들어왔다.

앤시아는 드디어 자신의 소소한 악행을 따지러 왔구나 싶어 양팔 벌려 맞이하고 싶었으나 악녀답게 손안의 와인, 아니, 주스 잔을 굴리며 느긋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마님, 손님이!”

여러 하녀가 동시에 입을 열다가 맨 앞에 선 하녀가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소식을 전했다.

“손님이 마님을 찾으십니다.”

“내게 올 손님이 있어?”

혹시 아이들의 부모가 따지러 왔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줄리와 엘리가 너무 완벽하게 보모 노릇을 하고 온 것 같았는데.

기대하며 몸을 일으키던 앤시아는 이어진 하녀의 흥분한 목소리에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레슬리 백작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

앤시아가 백작가를 떠난 후 백작 영지의 모든 상점은 밤잠을 줄여 가며 백작가의 주문을 소화했다. 주어진 기한은 단 열흘로, 보통 한 달은 걸릴 기한을 반 이상 단축한 것이다.

백작 부인의 진두지휘로 장식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을 만큼 정성과 실력을 쏟아부었다. 백작의 인장까지 받아 인근 영지까지 탈탈 털어 가장 튼튼하고 빠른 말과 숙련된 마부를 최대한 구했다.

가구까지 가져가는 건 지나친거 아닌지 걱정스러운 조언도 들려왔다.

그에 백작 부인은 설령 공작가에서 필요 없다고 돌려보낼지언정 문턱을 넘어서는 모든 물건에 부족함은 없어야 한다며 하루하루 물품이 늘어났다.

외부의 영향을 최소화시킨다는 마수의 가죽으로 가구를 둘러싸느라 가구보다 비싼 포장 비용이 들었음에도 백작 부인은 매일 밤눈물을 흘리며 다음 날이면 새로운 물건을 보러 다녔다. 백작 역시 밤새 들려오는 백작 부인의 비통한 울음소리에 충분히 마음이 풀릴 만큼 준비하라며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작 열흘이란 시간 만에 꾸려진 앤시아의 혼수품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황녀를 시집보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후 나단의 지휘 아래 웬만한 상단 수준의 행렬을 이끌고 떠나온 지 이십여 일.

피로를 호소하는 이들을 매일 달래며 재촉한 끝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작 부인에게 갈 혼수품이라는 말에 다들 무리한 일정에도 성실히 따라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단은 이제 곧 보게 될 앤시아를 떠올리며 들떠 있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 도착한 게 무색하게, 나단과 수십 대의 마차는 도착과 동시에 검문을 받게 되었다. 그 탓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문 앞에 반나절 넘게 붙잡혔다.

처음에는 기사들이 검사하는 듯 하더니 레슬리 백작가에서 왔다는 말에 책임자가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기다린 끝에 어두운 드레스 차림에 날카로워 보이는 시녀장이 나타났다.

기사들까지 가볍게 눈인사하며 대우를 하는 걸 보니 권한이 큰 듯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슬리 백작가에서 온 나단 레슬리 …….”

“네, 전해 들었습니다. 봐야 할 물건이 지나치게 많군요. 일단 모두 풀어 보세요.”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고 짐을 향해 쌩하니 돌아서는 로사의 태도에 함께 온 마부들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옷차림을 보아 아무리 작위가 높다 한들 레슬리 백작보다 높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경악하는 마부들과 달리 나단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시녀장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꼼꼼히 포장해 온 모든 짐을 장신구 하나까지 모조리 확인하는 내내 안전을 강조하는 깐깐한 시녀장의 태도에 불편함보다는 안도를 느꼈다.

외부인의 출입에 이리 민감하게 군다면 앤시아 역시 공작가 안에서 안전하리라.

그것만으로도 나단은 불평하는 일꾼들을 기꺼이 달랠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다 한들 그림자 하나 없는 출입구에 몇 시간이고 방치되다시피 서 있는 건 무척 곤욕스러웠다.

간신히 마지막 물품까지 확인한 로사는 핼쑥해 보일 만큼 지쳐 있었다. 뭐라도 꼬투리를 잡으려 철저히 확인했음에도 문제 될 만한 소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집간 앤시아에게 작은 흠이라도 생길까 걱정한 백작 부인이 밤낮으로 확인한 덕이었다.

이에 로사는 다른 방향으로 트집을 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