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1화.
“공작 부인의 혼수품을 들이는 일인데 이리 급히 서두르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이미 공작가에서 전부 준비해 두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익숙한 물건들이 앤, 아니, 공작 부인이 쓰시기에 좋겠지요.”
“백작가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저희 그윈티드 공작가에서는 절 차라는 게 있습니다. 이렇게 막 무가내로 짐을 들이다니요.”
“편지를 보냈으나 그보다 저희가 먼저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절차를 무시한 무례한 행동이라는 겁니다. 흠, 소백작님께서 고의로 그런 건 아니라고는 하나.”
“그렇군요. 이른 시간부터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치 레슬리 백작가를 아래로 둔 것처럼 꾸짖는 어투와 태도였다.
사전 연락도 없이 성문을 막을 만큼 짐을 들고 방문한 것은 나 단 쪽이었다. 그렇다고 시녀장이 백작가 후계자를 세워 두고 트집을 잡을 만큼 위중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백작인 나단을 적절히 대우하지 못한 것에 시녀장의 입장이 위태로울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나단은 앤시아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자 서두른 것은 사실이었기에 수긍했다.
나단의 순순한 태도에 로사는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소백작을 상대로 더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에 로사는 시간을 지연시킨 것에 만족하고 뒤돌아 섰다.
긴 시간 멈춰 있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단은 공작가 저택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집사장이 한참을 기다렸는지 서늘한 날씨에도 진땀을 흘리며 나단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레슬리 소백작님,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환대에 감사하나 공작 부인을 위한 혼수품부터 들이고 쉬도록 하겠소.”
먼 길을 왔으니 숨 좀 돌려도 될 텐데 나단은 앤시아를 위한 일부터 시작했다. 당황한 집사장과 달리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마부와 일꾼들은 곧장 짐을 풀어 내리며 나단을 바라봤다.
“가구부터 안으로 들일까요?”
“식자재는 곧장 주방으로 가져갈까요?”
“다들 이쪽으로 와 보게!”
정신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일꾼들 탓에 집사장과 사용인들 모두 바빠졌다. 순식간에 화려하고 다양한 물건들이 저택 홀에 쌓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나단을 소백작님이라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도착한 사용인들까지도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며칠 전 새로 맞이한 안주인의 전 약혼자. 나단 레슬리의 방문이었다.
앤시아가 공작의 결혼 상대로 결정된 후 시녀장인 로사를 통해 사용인들 사이에 몇 가지 소문이 돌았다. 로사는 사용인들 앞에서 한미한 가문이며 약혼자까지 있었던 여인이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하게 생겼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때 들었던 온갖 상스러운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고 사용인들 머릿속엔 앤시아가 희대의 바람둥이처럼 각인되었다.
하지만 정작 공작가에 발을 들인 앤시아는 바람 불면 날아갈까 걱정될 만큼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여린 소녀 같은 앤시아에게 결혼한 것과 진배없었다던 약혼자의 존재라니.
그 나단 레슬리의 방문 소식에 시녀장이 튀어 나간 이후 하녀들은 좀처럼 홀을 떠나지 못하며 기웃거리고 있었다. 현대였다면 막장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리였다.
짐 나르는 소리와 나단의 지시, 뒤쫓아 온 로사의 참견으로 저택입구가 소란스러웠다. 그사이 하녀들은 눈빛으로 정신없이 누가 이 소식을 전할지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듣게 된 나단 레슬리의 방문 소식에 앤시아는 들고 있던 잔을 놓칠 만큼 놀랐다.
“레슬리 백작가에서 손님이 왔다고?”
그 말에 앤시아는 조금의 주저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장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자 줄리가 수건을 들고 따라붙었다.
“마님, 아직 머리도 다 말리지 못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손님을 맞으실 수 있도록 금방 단장을 해 드릴게요.”
두 사람의 설득에도 앤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 앞을 막아서다시피 모여들었던 하녀들이 비켜서자 앤시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마님, 신발이라도 신고 가세요!”
다급히 신발을 들고나온 엘리는 이미 복도를 내달리고 있는 앤시아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그런 앤시아를 뒤쫓는 건 상기된 얼굴로 찾아온 하녀들이었다.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 않던 사용인들의 얼굴에 설렘이란 감정이 떠올랐다.
마침 다양한 물품들을 지시하느라 안쪽으로 향하던 집사장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하녀와 달리는 앤시아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너희들 홀 청소는 안 하고 어딜 몰려다니는……. 마님? 그, 그 그런 옷차림으로 어디를 급히 가십니까?”
“미안, 지금 바빠서!”
아무리 저택 안이라고는 하나 현재 앤시아의 옷차림은 사용인 앞에 내보이기에 지나치게 가벼웠다. 집사장까지 당황해 뒤를 쫓는 사이 앤시아는 이 층에서일 층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저택 입구와 끝없이 들어오고 있는 짐들 사이로 너무도 익숙한 연한 갈색 머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라버니!”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이 터져 나온 반가운 외침에 짐꾼들을 지켜보던 나단이 고개를 들었다.
나단은 고작 한 달 못 본 사이 살이 빠진 듯 턱선이 날카로웠다. 이내 나단의 얼굴에 무척이나 익숙한 다정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앤.”
아. 이건 참을 수 있는 게 아냐.
나단에게 불린 이름 한 자에 앤시아는 지금껏 눌러두었던 그리움이 터져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편지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리며 꾹꾹 눌러 담았던 눈물이 나단의 다정한 부름에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계단에 매달린 채 앤시아가 눈물을 쏟아 내자 나단은 주저 없이 공작가 안으로 들어섰다.
가져온 물건을 확인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다는 로사의 트집에 짐부터 내려놓던 상황이었으나 이미 나단의 머릿속에 더 이상 그런 경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계단을 몇 개씩 뛰어올라 앤시아의 앞에 선 나단은 주변에 숨죽이고 선 사용인의 존재조차 잊은 듯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앤시아는 눈물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펑펑 울며 나단을 부를 뿐이었다.
앤시아의 눈물을 닦아 내는 나 단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울지 마라, 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슬프게 울다니…….”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나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앤시아는 제 뺨에 닿은 온기가 믿기지 않았다.
“오라버니.”
“앤시아.”
뺨에 닿은 나단의 손을 확인하듯 더듬거리며 붙잡는 앤시아의 손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예
요?”
“그래, 앤.”
예쁘게 울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해,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있음에도 앤시아는 여전히 심장을 울릴 만큼 사랑스러웠다.
머리를 다 말리지도 않은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나단을 맞은 앤시아를 보며 모두가 수군거렸다.
“주인마님 오시기 전에 돌았던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런가 봐. 그럼 저분이 레슬리 소백작님?”
“세상에, 애틋한 것 좀 봐.”
새로 들어온 공작 부인을 방문한 이는 다름 아닌 한때 그녀의 약혼자로 소문났던 이였다.
지켜보는 눈들에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했다. 그들의 속살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모조리 듣고 있던 앤시아는 잠시 날아갔던 이 성을 챙길 수 있었다.
“앤시아,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면 어쩌니.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정작 나단은 온전히 앤시아에게 집중하며 그녀의 얇은 옷차림을 발견했다. 나단은 걸치고 있던 케이프를 풀어 앤시아의 어깨에 감싸 주었다.
이런 소란스러움과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도 나단은 한결같이 앤시아만 바라봤다.
변함없는 나단의 애정에 앤시아는 오히려 흘러넘치는 감정을 추슬렀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배시시 웃는 앤시아를 보며 마주 웃어 주던 나단의 시선이 그녀의 맨발에 머물렀다.
앤시아는 나단의 웃음이 순식간에 식어 가는 걸 보며 눈물이 멎을 만큼 당황했다.
정작 나단은 앤시아의 등 뒤에서 있는 하녀를 향해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너희들은 주인이 추위에 떨고 있는데도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건가.”
어이쿠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주인을 모시는 데 있어 그 역량은 하녀의 능력이겠지. 공작부인을 이런 옷차림으로 다니게 한 태만은 따져야겠다.”
화살이 사용인에게 향하자 앤시아는 냉큼 나단의 어깨에 매달렸다.
“오라버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급히 뛰어나온 거예요. 다 오라 버니 탓이에요.”
“이런. 그럼 내가 벌을 받아야겠구나. 어떤 벌을 주겠니?”
아주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듯 장단이 잘 맞았다.
오죽하면 이 절호의 기회에 로사가 다가오지도 못하고 계단 아래에서 어이없다는 듯 입만 뻥긋 댈까. 예법과 예의에 민감한 로사에게 한 방 먹일 겸, 하녀들에게 화를 내는 나단을 달랠 겸 앤시아는 양손을 내밀었다.
“방까지 오라버니가 업어 주세요.”
순간 다들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저게 지금 공작 부인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모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흥미진진해 하던 사용인의 눈에 놀라움과 경악, 황당함이 스쳐 지나갔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언제 왔는지 앤시아와 나단의 곁에 정승처럼 서 있었다.
“저희가 주인마님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공작가의 기사가 먼저 제안해 왔으나 이미 나단에게 매달렸던 앤시아는 더욱 그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앤시아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어 수줍은 듯 발갛게 달아오른 앤시아의 뺨을 본 기사와 사용인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쩐지 공작 부인의 저런 얼굴을 보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다.
‘역시 다들 순진해.’
지난 한 달간 공작가의 기사단과 함께해 왔던 앤시아는 그들이 겉보기와 달리 순박하다는 걸 알았다.
앤시아가 나단에게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고, 한 발 물러서 기까지 했다.
공작에 대한 충성심과 별개로 이 상황이 낯설고 불편하며 또한 낯 뜨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