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2화.
사랑이 충만하던 백작가에서는 이런 식의 포옹이나 접촉이 서로 간에 당연했던 일이었으나 공작가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일반적인 귀족가에서도 앤시아의 철없는 행동은 성인이 된 여성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떠한가.
앤시아는 나단을 향한 반가움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먼 길 달려온 나단이 섭섭해할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앤시아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악녀로서의 포석이 깔린다면 대환영이었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앤시아는 나단을 향해 다시금 양손을 뻗었다.
“어서요, 오라버니.”
기꺼이 업히라 할 줄 알았으나 나단은 조심스럽게 앤시아의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망설였다.
“오라버니?”
“네 입장이 곤란해질 일이니 거절해야겠지만.”
그러면서 이마에 와 닿는 부드러운 온기에 앤시아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하녀들 역시 숨을 삼키며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한 채 시선도 거두지 못했다.
“나의 앤, 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던 약속은 언제까지라도 유효하단다.”
아 역시 내가 살린 내 편.
진짜 이런 충실한 댕댕이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나단을 살린 일은 원작에 들어와 앤시아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
능숙하게 앤시아를 등에 업은 나단은 가까이에 있던 줄리에게 방 안내를 지시했다. 모여들었던 사용인들이 길을 터 주듯 물러나면서도 시선은 나단과 앤시아에게 고정했다.
백작가에서 모두의 시선을 받았던 앤시아조차 살짝 움츠러들 만큼 강렬한 시선이었는데도 나단은 태연했다.
아무도 나단의 앞을 막지 않았다. 뒤늦게 쫓아온 시녀장 로사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이런 경우 없는 일을 공작가에서 목격하게 될 줄이야.”
평소 오만하게 굴던 로사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호들갑까지 섞여 있었다.
“젖은 머리로 외부에서 온 사내를 맞으러 달려 나오는 공작 부인이라니요. 이곳에 주인님이 계시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명백한 조롱과 적의를 감지한 나단은 즉각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적절한 순간 로사의 등장이었다. 그녀는 등 뒤에 사용인과 기사들을 대동한 채 마치 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했다.
악녀를 꿈꾸는 앤시아가 손뼉이라도 쳐 주고 싶을 만큼 극적인 연출이었다.
고작 마음에 들지 않는 공작 부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앤시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로사 외에 적의를 보이는 이는 없었으나 인원수가 주는 압박은 대단했다.
나단은 업고 있던 앤시아를 내려 가까이에 있던 줄리에게 넘겨주었다. 망설임 없이 로사를 향해 걸어가는 나단은 시녀장의 뒤에 버티고 선 기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당당했다.
“그대의 가문을 말해 보아라.”
예상치 못한 나단의 질문에 로사는 당황했다.
“전 그윈티드 공작가의 시녀장입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나요?”
“공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었다 한들 이리 오만할 수가. 레슬리 백작위를 계승할 내게 그리 당당하게 굴 정도라면 최소한 가문명 정도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저는 주인마님의 부족함을 탓한 것이지 먼 길을 달려온 레슬리 소백작님을 모욕한 것이 아닙니다.”
“앤시아는 내 동생과도 같은 아이다. 앤을 모욕하는 건 나를 롯해 레슬리 백작가를 모욕하는것.”
“하, 동생이라……. 제가 아는 것과는 다르지만, 뭐 그렇다고 치지요.”
진심으로 앤시아는 로사가 미친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뭘 믿고 소백작인 나단의 앞에서 저러는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소백작께서 아끼는 아이를 손에서 놓기 힘드시겠지요. 그렇다 한들 백작의 핏줄도 아니잖습니까.”
앤시아의 존재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나단을 대하는 로사의 태도가 제법 강경했다. 그렇다 한들 시녀장인 로사가 백작가문을 상대로 혀를 가볍게 놀릴 입장은 아니었다.
“잘난 듯 충고하는 그대의 가문은 여전히 내 귀에 들리지 않는군.”
“공작가에 시집온 이상 이제 놓아주셔야지요.”
나단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로사는 계속해서 트집만 잡았다.
보기에 답답했는지 앤시아 쪽에서 있던 하녀에게서 작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일 남작가의 둘째로 알고 있어요.”
이런 순간에 용기를 낸 엘리에게 앤시아는 선물을 주리라 마음먹었다.
엘리의 말을 정확히 들은 나단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듣도 보도 못한 남작가라니. 성밖에 물려받지 못한 하급 귀족 따위가 내게 그딴 망언을 입에 담는가.”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나단으로 인해 당황한 로사는 입술까지 깨물었다.
여기서 다시 앤시아의 핏줄을 따지고 들어 봤자 계급을 따지면 공작 부인이 더 위였다. 상하 관계를 무시하고 핏줄만으로 우위에 서 있던 로사에게 백작의 유일한 후계자인 나단의 존재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제 주장을 뒤집고 싶지 않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싶지 않은 듯 로사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런 로사를 바라보는 나단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소백작인 자신의 앞에서도 이리 안하무인이니 앤시아에게 얼마나 모질게 굴었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나단의 어둡게 가라앉은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대의 위세를 보니 곰 거죽을 뒤집어쓴 여우 꼴이구나. 그 거 죽을 벗겨 줄까?”
북부의 거친 성정을 지닌 기사단 앞에서도 기죽지 않던 로사였다. 집사장의 일임에도 시녀장인 로사가 나서 그들의 봉급이나 물품을 처리했기에 언제나 우위에서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문학청년처럼 보이는 잘생긴 백작 후계자의 위협 따위그리 무섭지 않았다.
“백작가의 허세 따위 북부에선 통하지 않습니다.”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내 검 앞에 물어보면 되겠구나.”
로사를 향한 나단의 선명한 적의에는 익숙함 따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로사와 그런 로사를 향해 금방이라도 검을 빼 들 듯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 나단의 행동은 선을 넘을 듯 아슬아슬했다.
‘나단, 너 왜 그래. 왜 캐릭터가 변했어?’
게다가 검술 훈련을 받기는 한 거야?
나단이 한 발 내딛자 당황한 로사가 뒷걸음질 치다 치맛단을 밟고 넘어졌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으나 뜻밖에 곁을 지키듯 서 있던 기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고, 공작가 안에서 함부로 검을 뽑으면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주저앉아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는 로사였다. 정말로 검을 뽑는다면 로사의 뒤에 무심히 서 있는 기사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앤시아는 재빨리 나단의 팔을 끌어안으며 머리를 비볐다.
“오라버니. 저 추워요.”
언제 흉포한 분위기를 풍겼냐는 듯 다정한 손길이 앤시아의 젖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런. 미안하구나, 앤. 그 잘나 신 그윈티드 공작가에 여우가 들어앉아 왕 노릇을 하기에 조금 놀아 주고 말았구나.”
한 방, 두 방, 세 방 정도 로사에게 연달아 먹인 나단은 느긋하게 앤시아를 안아 들었다. 어부 바가 아닌 공주님 안기에 앤시아가 당황할 틈도 없이 성큼성큼 복도 안쪽을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로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보다 더 선명하게 들려온 건 하녀들의 감탄이었다.
“세상에. 다정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기세가 굉장하셔.”
“그게 다 사랑의 힘 아닐까?”
“마님을 뒤로 숨기는 거 봤어?
꺄~! 너무 낭만적이야.”
니들 공작가 소속이잖아. 이쪽 편들면 안 되는 거 아냐?’
앤시아는 지금 공작 부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약혼자로 소문난 나단이 찾아왔다면 적의를 드러내며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북부인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과 달리 다들 사랑 이야기에 목말랐던 것뿐일까.
앤시아는 나단에게 안겨 가는 내내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혼란스러웠다.
붙잡아 놓기 위해 앤시아는 천진하게 권유했다.
어쩌면 이걸 기회 삼아 로사의 악의적인 추궁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나 나단에게만 피해가 가지 않으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로사는 상상도 못 할 앤시아의 뻔뻔한 태도에 입만 벙긋거릴 만큼 놀란 듯 보였다.
나단은 그런 앤시아를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자신이 모시는 마님이 구남친과 같은 예전 약혼자를 보고 반가워 눈물을 쏟고 매달리다니.
머리가 식고 나면 이게 얼마나 큰 추문이 될지를 두고 뒷말이 오갈 것이다.
이대로 나단만 며칠 머물다 가도 ‘악녀 인증’ 목표 달성이 쉬울 듯했다.
특히 로사가 극혐이라는 듯 일그러진 얼굴까지 보였으니 나단이 돌아간 후에는 얼마나 난리를 칠까.
나단의 품에 안겨 방 앞에 도착한 앤시아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드디어 제 뜻대로 돼가는 상황에 활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