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3화.
정작 나단은 제 품을 떠나는 앤시아가 기뻐 보이자 조금 풀이 죽었지만. 하지만 금세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다정한 웃음을 보이며 품 안에 챙겨 둔 두툼한 편지를 앤시아에게 전했다.
“앤. 어머니께서 보내는 편지란다.”
“우와! 고마워요, 오라버니.”
인장이 최대한 손상되지 않도록 살살 뜯어냈다. 줄리가 가져온 칼을 사용할 여유도 없이 뜯어낸 편지 봉투 안에는 여러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내보낸 후 침대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첫 장은 백작 부인다운 우아함과 예법으로 시작했다. 마치 편지란 이렇게 써야 한다는 듯한 표본처럼 정갈하고 형식적인 이야기로 시작된 편지는 몇 줄 가지 않아 서서히 감정이 드러났다.
‘앤시아 랜피스를 앤시아 레슬리로 여기며 함께하리라 여겼던’이란 문장은 ‘아가, 네가 너무 그리워 밤마다 네 방에서 잠드는 나를 용서해 다오.’로 바뀌었고
‘정원의 꽃은 가을임에도 봄이 온 듯 화사하지만’이라는 문장은 ‘꽃이 아무리 아름답게 핀들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없단다. 앤, 아가. 네가 없는 정원의 꽃은 들풀보다 못하구나.’로 바뀌어 갔다.
「사랑하는 앤. 보고 싶구나.
그리워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구나.
널 슬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아이 잃은 어미는 어리석게도 이 그리움을 지울 방법을 모르겠구나.
네가 그윈티드이든 랜피스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내 딸 앤시아란다.
아가. 내 아가. 언제든 네가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다오.
언제나 네 편인 엄마가 사랑을 담아.」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던 앤시아는 마지막 줄까지 간신히 읽어 내린 후에야 울음을 터트렸다. 편지가 구겨질까 끌어안지도 못한 채 엉엉 울며 그리움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저도 보고 싶어요. 정말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이쪽 세계관에 따르면 이혼한 여인에 대한 시선은 절대 곱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 따위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백작 부인 힐다는 한결같이 앤시아를 받아 주려 했다.
설령 함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도 받아 본 적 없는 애정은 앤시아에게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악녀가 되는 것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앤시아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이래 가지곤 약해 빠진 어린 영애처럼 보일 뿐이야.”
앤시아는 친절함을 버리기로 했다.
그 첫 번째로 문밖에 서 있을 줄리와 엘리를 큰 목소리로 불러 들였다.
“날 최고로 예쁘게 꾸며 줘. 못하면 벌을 줄 거야.”
트집 잡을 생각으로 과감하게 내뱉은 말에 줄리와 엘리는 오히려 각오를 다진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님. 저희는 마님 편입니다.”
“주인님 편을 들어야겠지만…
저희는 무조건 마님 편 하기로 했어요.”
나단 효과겠지.
공작에게 한주먹거리도 안 될 문학청년 분위기의 나단은 제아무리 공작가 소속의 사용인이라할지라도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설령 공작 부인의 내연남이 나타난 듯한 상황일지라도.
약혼조차 하지 않았다고 우겨 봤자 소문이 돌다 보면 내연남이라는 둥 별 추잡한 단어가 달라붙을 것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제일 예쁘게 꾸미지 못하면 벌을 줄거라니까.”
“네, 마님. 일단 찬 수건을 눈에 대겠습니다.”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차가운 수건이 닿으니 시원해서 좋았다.
두 사람의 손에 머리가 빗겨지고 옷이 갈아입혀지는 동안 수건을 앞뒤로 뒤집어 가며 눈가를 식히느라 상황을 보지 못했다.
수건을 치워 낸 후에도 화장하느라 보지 못했기에 모든 단장이 끝나고 거울 앞에 선 앤시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거울 속에는 안 그래도 사랑스러운 앤시아가 봄에 피어난 화사한 꽃처럼 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어디서 찾아낸 것인지도톰한 무채색 드레스에 은은한 펄이 들어간 파스텔 톤 숄을 적절히 배치해 화사하면서도 우아함을 놓치지 않았다. 놀라서 멍한 표정임에도 붉은 눈가에 적절히 들어간 음영이라든가 과하지 않은 홍조처럼 보이는 볼 터치까지 뭐 하나 지적할 게 보이지 않았다.
양옆에서 땀까지 흘리며 뿌듯한 얼굴을 한 줄리와 엘리의 흡족함이 이해가 됐다.
이걸 트집 잡으면 사람이 아니다.
악녀의 길이 이리도 어려웠던 건가.
앤시아는 결국 칭찬의 말을 하지 않는 정도로 타협 봤다.
“오라버니는? 응접실에 계셔?”
당연히 문 앞에만 서 있던 둘은 모르리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줄 셈이었는데 정작 엘리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답이 돌아왔다.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마님께서 준비되시면 언제든 모시겠습니다.”
“식당? 응접실이 아니라?”
하긴, 나단 성격에 앤시아를 빨리 보고자 잠도 줄이고 달려왔을게 뻔했다. 식사도 대충 때우는 식이었으리라.
앤시아는 자신은 잘 못 먹더라도 나단은 배불리 먹게 해 줄 생각에 차라리 잘됐다 싶어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 앞에서 앤시아는 무척이나 그리운 냄새를 맡았다.
책 속 세상임을 자각한 이후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이 세계의 음식들. 그러나 몇 년간 앤시아의 입맛에 맞추라는 백작 부인의 지시대로 느끼함을 줄이고 불필요한 향신료를 뺀 익숙한 음식 냄새가 식당에서 퍼져 나왔다.
때마침 문이 열리자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 나단이 밝은 얼굴로 앤시아를 맞이했다.
“안 그래도 부르려 했는데 딱 맞게 와 줬구나.”
“오라버니, 이 음식들은 대체…….”
나단의 얼굴을 봐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식탁 위에 올려진 익숙한 요리로 향했다. 예법에 어긋나는 걸 알면서도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빵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익숙한 부드러움에 소름이 끼쳤다.
나단은 자연스럽게 앤시아를 상석에 앉히고 샐러드 그릇을 당겨주었다. 예의상 거절 따위 할 틈도 없이 포크를 집었다.
여린 풀과 작은 크기의 채소들이 상큼한 드레싱에 버무려져 입맛이 돌았다. 수프 역시 뿌리채소와 기름기 없는 고기로 끓여 내 맑으면서도 진한 맛이 쌀밥을 말고 싶을 지경이었다.
독립하면 반드시 쌀을 구해 밥부터 해 먹으리라.
흰 빵을 뜯어 입으로 가져가며 매콤한 냄새에 눈을 돌렸다.
언제 왔는지 못마땅한 얼굴을 한 요리장 하몬이 요리를 들고 있었다.
“어? 설마 이건!”
기대에 찬 앤시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앤시아의 반응에 하몬의 불퉁했던 얼굴이 흐물흐물하게 풀리며 평소보다 더 요정같이 깜찍한 마님의 앞에 요리를 내려놓았다.
기름진 육류 요리를 주식으로 삼는 북부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 해산물과 잘 사용하지 않는 붉은 고추로 맛을 낸 파스타는 하몬의 레시피 중 어디에도 부합되지 않는 괴식이었다.
나단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만들기는 했으나 그 비싼 마수 가죽으로 꽁꽁 싸온 해산물을 앞에 뒀을 때는 난 감했다. 자칫 비릴 수도 있는 이런 요리를 요정 같은 마님에게 내놓아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그러나 막상 요리가 나오자 앤시아는 눈을 빛내며 침을 삼킬만큼 기대감을 드러냈다.
접시가 놓이기가 무섭게 앤시아는 적극적으로 포크를 들었다.
고작 이틀이기는 하나 수프와 과일 조금 정도만 먹던 앤시아의 적극적인 반응에 하몬은 진심으로 놀라고 당황했다.
“요리장, 이거 오라버니가 알려준 레시피지?”
요리사로서 자존심을 후벼 파는 천진한 질문이었다. 하몬이 답을 하기도 전 앤시아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요리장, 정말 솜씨가 좋구나.”
“예?”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똑같이 재현하다니. 일류 요리사가 아니면 못 해냈을 거예요. 고마워, 하몬.”
“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신 겁니까?”
감격한 하몬의 모습에 양껏 포크 질을 하던 앤시아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여기서는 칭찬이 아니라 왜 넌 이것도 못했냐며 박박 긁었어야 했는데!
몇 년간 백작가에 지내며 몸에 밴 칭찬과 애교는 인식할 틈도 없이 튀어나왔다. 이미 감사까지 표한 마당에 앤시아는 빠르게 포기했다. 어차피 맞은편에 앉은 나단의 앞에서 악녀 코스프레 하기에는 앤시아도 부담스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보다 한 달 만에 맛본 백작가의 요리에 손을 분주히 놀렸다.
사용인의 눈에는 그래 봤자 새모이 뷔페 수준의 적은 양이었지만, 이전과 달리 모든 요리에 한번씩 앤시아의 손이 닿았다.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겠다 싶을 때 나단이 먼저 앤시아를 이끌었다.
“지금도 날이 춥기는 하지만 북부는 앞으로 더 추워진다고 하더구나. 산책이라도 할까?”
“좋아요, 오라버니.”
안 그래도 매콤한 파스타며 부드러운 고기가 목 끝까지 차오른 것 같아 움직이고 싶었다.
나단이 내민 팔에 냉큼 팔짱을 끼자 당연하다는 듯 주변에서 헉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으로 향하는 내내 앤시아는 종종 나단을 올려다보았고 그때 마다 어김없이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여전하다 못해 더 깊어진 애정이 절절히 느껴져 앤시아는 기쁘면서도 되돌려 줄 수 없기에 속이 쓰렸다.
“여기가 정원인가.”
“아마도요?”
정원은 잘 관리되어 있었으나 꽃은 거의 보이지 않아 화사한 분위기는 없었다. 좋게 보자면 깔끔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칙칙했다.
나단 역시 그리 생각했는지 앤시아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갑자기 방향이 바뀌자 멀찌감치 뒤를 따르던 이들이 허둥지둥 흩어졌다. 공작 부인을 혼자 움직이게 할 수 없어 따라붙는 전담하녀 외에 일하는 척 은근히 따라붙었던 사용인들이었다.
소문을 부풀려 줄 존재는 앤시아에게 있어 언제든 환영이었으나 나단은 그렇지 않은 듯 불쾌감을 드러냈다.
“가문의 규모가 크다 한들 내실까지 훌륭하다 볼 수 없겠지. 사용인의 교육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네. 천천히 적응한 다음에 꼭 교육해 볼게요.”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던 나단은 그제야 공작가를 헐뜯는 건 공작부인이 된 앤시아에게 부담이 됨을 눈치챘다.
평소라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나단이었다. 여전히 팔짱을 끼며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이는 앤시아가 다른 이의 아내가 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생긴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