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24화.
도무지 앤시아가 다른 이의 아내가 된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단은 앤시아의 손에서 제 팔을 빼냈다.
“오라버니?”
그리고 의식할 틈도 없이 앤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 오라버니.”
“나뭇가지가 튀어나와 있구나.”
어깨를 끌어안은 거로도 부족해 앤시아의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손끝으로 매만지듯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뭇가지를 핑계 댔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나단이 정말 잘하고 있긴 한데 장작을 넘어서 휘발유를 뿌리는 건 과하지 않을까?’
자칫 주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구역마다 순찰 중이던 기사의 눈빛이 나단을 반으로 쪼갤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조심스럽게 행동해도 부풀려질 판에 아예 대놓고 애정을 드러내는 나단의 진심에 앤시아는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나단의 이런 행동은 차후 앤시아의 이혼을 위한 포석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단에게 피해가 가는 건 원치 않았다.
앤시아는 양심의 가책과 높은 악행 포인트 사이에서 갈등하며 나단이 이끄는 대로 온실 겸 야외 티룸에 들어섰다.
마석이 섞여 방탄 수준인 단단한 유리로 만든 온실은 외부에서도 어느 정도 안을 볼 수 있었다. 그걸 이유로 들어 나단은 모든 사용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는 나무에 가려 여간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의 의자에 앤시아를 앉혔다.
바깥에서 안쪽이 보이지 않자 당황한 듯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나단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앤시아에게 집중했다.
“앤시아. 삼 일 전에 도착해 약식으로 결혼했다고 들었다.”
“아, 네. 공작가 전통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윈티드 공작가의 황당한 전통은 전부 조사해서 알고 있단다. 그래서 …… 몸은 괜찮니?”
“몸이요?”
나단의 질문에 앤시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공작가의 전통은 전부 조사했다고 했고 약식혼을 치른 것 역시 알고 있는데 몸이 어떤지를 묻다니.
‘이거 첫날밤 질문이야? 그건 친남매라도 묻는 거 아니지 않아?’
무엇보다 첫날밤에 대한 답을 들어 봤자 앤시아에 대한 마음이 여전한 나단에게 있어 상처가 될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번이 기회일 수도 있어.’
어차피 반년 후 돌아간다 한들 앤시아가 나단과의 미래를 꿈꿀수는 없었다.
결혼한 앤시아를 위해 직접 공작가까지 혼수품을 들고 찾아온 나단은 바보처럼 순정을 보인 셈이었다. 그 덕에 악녀 포인트를 쌓을 기회도 얻을 수 있었지만, 고작 그런 식으로 소비할 만큼 나단의 진심은 가볍지 않았다.
이런 좋은 남자의 미래가 앤시아를 바라보느라 추락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결혼한 후에도 자신만을 보려 하는 나단을 밀어내기에 좋을 때였다. 호들갑을 떨며 첫날밤에 대해 있는 일 없는 일 다 지어내고자 마음먹었다.
그사이 잠시 침묵한 앤시아가 대답을 망설인다고 느낀 나단은 먼저 입을 열었다.
“북부의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거칠기로 소문이 자자하지. 그중 그윈티드 공작은 말할 것도 없이 흉포하다 들었다.”
“아, 네. 그런 소문이 있었죠.”
“그런 이에게 앤, 널 보내면서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네가 울고 있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을지.”
“전 괜찮아요, 오라버니.”
“그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이리 더 아름다워진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안도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묻어나는 나단의 미소에 앤시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다들 친절하고 잘해 주거든요.”
“다들 친절하다라…….”
지금 나단이 떠올린 사람이 누군지 100퍼센트 맞출 수 있었다.
시녀장 로사.
앤시아는 나단의 의심에 곧장 맞장구를 쳤다.
“아, 딱 한 명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제가 준비도 없이 온 거니 어쩔 수 없죠.”
“준비할 시간을 주지도 않은 건 그윈티드가 아니냐. 그걸 왜 너에게!”
앤시아의 자책에 곧바로 반응하던 나단은 격해지는 감정을 다잡으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앤시아가 놀라지 않도록 손을 잡고 다독였다.
앤시아의 체온과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나단을 금세 진정시켰다.
이내 부드럽게 가라앉은 나단의 다정한 음성이 숨결이 닿듯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앤시아. 하나만 약속해 다오.”
무조건 승낙해야 할 것 같은 무해한 다정함에 앤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이는 앤시아가 귀엽다는 듯 나단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를 울리는 이가 있다면.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하는 이가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돌아오라고요?”
“그래. 혼자 돌아오기 두렵다면 내게 편지를 보내 다오. 언제든 무슨 일이 있든 달려올 테니.”
반년 후엔 오지 말라고 해도 갈건데.
말만으로도 든든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듯 앤시아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속마음을 숨긴 채 미소로 답을 대신하자 나단은 안쓰럽다는 듯 앤시아의 손만 도닥였다.
애틋한 분위기는 이제 충분했다. 앤시아는 분위기도 바꿀 겸 계속 마음에 걸렸던 일들을 나단에게 털어놓았다.
“오라버니. 이건 만약에 말인데요.”
“그래. 어떤 만약 말이니?”
“나쁜 짓을 했는데 사람들이 그걸 나쁘다고 말 안 해요. 왜 그런 걸까요?”
“응?”
다정한 웃음만 보이던 나단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를 만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가 할 만한 속이 빤히 보이는 질문이기도 했다.
“어떤 나쁜 짓을 했는데?”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을 이유도 대지 않고 거부했어요.”
앤시아의 악녀로서 정식 첫걸음이었다.
전날 공작저로 들어서기 전 로사와 말다툼이 있었으나 그건 나 단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로사와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앤시아의 경험담이라는 걸 알게 되면 일이 커질 것 같아 넣어 두었다. 그래서 그런지 악행의 시작을 듣는 나단의 표정은 애매했다.
“아, 귀해 보이는 항아리도 일부러 깼어요.”
“다치지는 않았니?”
“괜찮…… 그, 그건 저도 몰라요.”
말을 돌리자 나단은 잡고 있던 앤시아의 손을 앞뒤로 뒤집어 가며 꼼꼼히 살폈다.
예시로 드는 것처럼 말하려고 했는데 나단은 이미 이 이야기가 앤시아의 일임을 알아챈 듯 보였다.
필요도 없는 드레스를 샀다는 말은 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 앤시아는 가장 센 악행을 고백했다.
“마르고 더러운 아이들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어요.”
이건 세지? 그런 마음으로 고백했으나 나단은 여전히 모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처리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지?”
처리라는 말에 앤시아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 같아 슬쩍 손으로 문질렀다.
“그건 하녀들에게 맡겨서…….
“죽였니?”
“아뇨! 의도랑 다르게 잘 씻기고 먹였다고……. 그, 그래도 아동 노동 착취는 분명 나쁜 짓이 죠? 무겁고 지저분한 흙을 나르게 했거든요. 바닥을 막 두드려서 메꾸게 하고요.”
왜 자꾸 설명하면 할수록 흙장난 쳤다는 말로 들리지?
식사 장소를 여기저기 옮겼던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나단에게 고백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허접스러운 악녀 계획을 세운 것인지 반성하게 됐다.
시무룩해진 앤시아의 반응에 나 단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앤, 어째서 나쁜 일을 하려고 한 걸까.”
“그건…….”
반년 뒤에 쫓겨나려고.
솔직하게 말하면 아마도 나단은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다. 대신 앤시아에 대한 마음 역시 그대로 불타오르겠지.
그렇기에 앤시아는 조금 다르게 표현했다.
“공작가의 안주인이라면 때론 냉정해야 한대요.”
“공작가의 안주인이라…….”
다정하기만 하던 나단의 미소에 또다시 씁쓸함이 배어들었다.
“우리 앤은 공작 부인이 되려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이 오라비도 도와야지.”
돕고 싶지 않을 텐데도 앤시아를 위하는 마음 하나로 나단은 언제나처럼 상냥했다. 그래서 앤시아도 마주 웃을 수 있었으나 이어 들려온 말에 당황했다.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니?
그럼 요리장을 자르면 된단다.”
“하지만 취향 문제인걸요. 요리 장 잘못도 아닌데 자르는 건 아니잖아요.”
“역시 착한 앤. 하지만 공작 부인이 기강을 잡지 않는다면 시녀장에게 계속 권한을 주게 되겠지.”
그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방금 안주인으로서 냉정해져야 한다는 핑계를 댔기에 망설이는 사이 나단은 고저 없이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필요하다면 본보기로 삼아도 좋겠지. 요리사니까 혀를 자른다거나.”
“오라버니!”
“거슬리는 항아리를 들인 책임자를 문책하는 것도 좋겠지.”
“아, 아뇨. 그건 그냥 제가 심심해서 깬 거예요.”
“앤시아를 심심하게 방치한 사용인을 벌하는 것도 좋겠구나.
매질해서 내쫓는 건 소문을 내기에 손쉬운 방법이지.”
이 사람은 누구? 정말 다정한 꿀 남자 나단 레슬리 맞아?
앤시아의 눈이 흔들리자 나단의 온화한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더러운 아이들이라……. 고아나 평민 아이를 만났나 보구나.
그 아이들의 처리 라면.”
“오라버니, 이제 됐어요. 더 안들어도 될 것 같아요.”
나단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까 봐 급히 막았다.
예상보다 과격한 나단의 답에 앤시아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 정도로 해야 됐다고? 내가 안일했네, 안일했어.’
원작의 앤시아는 어이없을 만큼 쉽게 악녀로 낙인 찍혔다. 그래서 악녀가 되는 길을 쉽게 생각했다.
나단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귀족의 상식과 삶을 살아온 나단만 봐도 이렇게 달랐다.
현대의 상식을 가진 채 백작가의 따뜻한 품 안에서 지내 온 앤시아는 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앞으로 해야 할 악행을 전면 수정해야 했으나 나단의 예시조차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러다 악녀는커녕 나단이 보듯 말괄량이 어린 마님 정도로 여겨지는 건 아닐까.
그러면 곤란했다. 세워 둔 계획을 수정해야 했기에 앤시아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